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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223화 (223/352)

제223화

#60 잘 못 하거든요, 이런 건 (4)

갑자기 얘기 좀 하자고? 한서현과는 달리, 차송진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나를 찾은 것인지 감도 오지 않았다.

“아, 안 되려나?”

문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차송진은 내 눈치를 보며 눈을 굴렸다.

“들어와.”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차송진은 재빨리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데.”

“서현이랑 싸우는 것 같던데.”

“다 들렸어?”

“벽이 얇더라, 여기.”

최고급 호텔의 벽이 얇다고? 의심하는 내 눈빛에 차송진이 눈을 굴리며 덧붙였다.

“아니면 내가 둘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궁금해서 벽에 귀를 대고 있었을지도 모르고…….”

엿들었다는 얘기를 거창하게도 하네. 차송진은 어이가 없다는 내 눈빛에 재빨리 외쳤다.

“그, 그렇지만 그렇게 심각한 분위기로 둘이서 방에 들어가니까 걱정이 됐다고.”

하긴, 차송진의 입장에서 걱정이 될 만도 했다.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지는 건 늘 새우의 몫이니까. 새우로서는 걱정이 될 만도 하지.

내 눈치를 보며 슬쩍 의자에 앉은 차송진이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 때문에 싸웠는지 물어봐도 돼?”

나는 잠시 고민했다. 말해 줘도 될까. 말해 주는 것까지는 별문제가 아니지만, 이 문제를 차송진이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문제였다.

되도록 차송진의 앞에서는 사람을 죽이네, 마네 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는데.

하지만…….

“혹시 모르잖아, 도움이 될지.”

이렇게까지 말하는 차송진의 성의를 봐서라도 한번 얘기해 볼까나.

━참 나, 누가 들으면 아주 네놈이 선심 쓴 줄 알겠구나. 사실은 고마워서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심정이면서.

‘큼, 큼. 다른 사람의 시각이 필요한 때긴 했잖습니까?’

나 혼자서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답을 모르겠는 걸 어떡하나.

차송진이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속 시원하게 줄 거라는 기대는 하지도 않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지. 차송진의 말처럼 도움이 될지.

나는 차송진에게 한서현과 나눴던 대화를 간단히 말해 주었다. 최대한 수위를 조절한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한 것 같았다.

내 말을 전부 들은 차송진의 얼굴이 아까보다 훨씬 창백해진 걸 보면 말이다.

━네놈이 영 요약을 이상하게 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거냐.

‘제 요약이 어디가 어때서요.’

━‘내가 사람을 좀 많이 죽이긴 했거든? 아, 그래도 서현이는 안 그랬으면 좋겠는데…… 사람 죽이지 말라니까. 서현이가 삐쳐 버렸어. 어쩜 좋지?’ 네가 한 말을 그대로 읊어 봤다, 어떠냐?

어떻기는 형편없었다.

‘……요약은 제 전문이 아니라고요.’

다행히 내 요약 공격에 당했던 차송진은 곧 정신을 차렸다.

“그, 그런 걸로 싸웠구나.”

정신을 차린 게 맞나? 아니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용이 영 그래서 또 넋이 나갔다던가.

“역시 이런 걸 상담하는 건 좀 그런가. 아무리 답을 찾는 게 어려워도 나 혼자서 고민해 보는 게 나을까?”

내 말에 차송진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꼭, 꼭 나랑 상담해 줬으면 좋겠어.”

“하긴, 혼자서 계속 고민해 봤는데 결론이 영 안 나오더라고. 서현이가 화를 낼 만도 하지.”

대화를 몇 번이나 미뤄 놨는데, 대화를 나누고 나서도 딱 부러지는 결론을 내지 못했으니까.

나는 정말로 형편없는 리더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해?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어?”

내 질문에 차송진은 침을 꿀꺽 삼켰다. 나는 차송진의 부담을 덜어 줄 겸 가볍게 말을 던졌다.

“생각나는 대로 말해 봐, 어차피 결정을 내리는 건 내 몫이니까. 그냥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마음이라서 그래.”

내 말에 용기를 얻은 것일까. 차송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이런 말이 나올 일이 없게 사람을 죽이지 않는 거겠지.”

음, 그렇다고 해도 이런 답을 기대한 건 아닌데. 내 표정을 살핀 차송진이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무, 물론 이런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겠지만 말이야. 그래도 어, 원, 원천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단 이런 방법도 있다는 걸 말해 두고 싶었달까.”

차송진의 말에 나는 방긋 웃었다.

“그렇지, 사람을 죽이지 않기로 하면 이런 문제로 더는 싸우지 않아도 될 테니까.”

하긴,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런 말을 하겠지.

굳이 죽일 필요가 있어? 안 죽이면 그만이잖아.

그래, 그렇게 간단하게 끝나는 문제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애써 웃으며 차송진에게 말했다.

“얘기 들어 줘서 고맙고…….”

“잠깐, 아직 내 말 안 끝났어.”

황급히 내 말을 끊은 차송진이 내 눈치를 보며 덧붙였다.

“물론 그게 현실성이 없다는 건, 나도 알아. 벨츠머츠가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 이유가 있다는 것도.”

차송진의 말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설마하니 차송진이 살인을 두둔하는 말을 할 줄이야.

나는 차송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그래,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나, 나도 벨츠머츠가 되고 싶다고 말했잖아.”

“빌런은 죽어도 싫다면서.”

“……그러니까 기준이 중요해.”

차송진의 말에 나는 눈을 찌푸렸다.

“기준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단어가 등장했으니까. 내 질문에 차송진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

“내가 교과서를 만들면서 제일 어려웠던 게 뭐냐면……. 그건 기준을 정하는 거였어. 어떤 기준으로 옳고 그르냐를 결정할 거냐.”

차송진이 테이블의 중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내가 짚은 곳을 기준으로 위를 ‘옳은 것’, 아래를 ‘그른 것’이라고 한다면, 지금은 정확히 반반이지만…….”

차송진의 손가락은 아래로 내려갔다.

“이렇게 되면, 아까는 글렀던 부분이 지금은 옳은 부분이 되는 거잖아. 도덕이라는 건 딱 정해진 게 아니야. 법하고는 달리, 상황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거라고.”

차송진의 얼굴은 진지했다. 그 진지한 태도에 나 또한 자세를 바로 하고 차송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침을 꿀꺽 삼킨 차송진이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조직의 기준은 너잖아. 너는 우리의 리더고, 어, 나도 그렇지만 애들은 널 의지하고…….”

고개를 붕붕 저은 차송진이 쿵 테이블 위에 주먹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네 기준이 곧 우리의 기준이라는 거야. 네 행동에 따라서 우리 조직의 어, 도덕이 달라진다는 거고.”

“내가 기준이라고…….”

“그래, 교과서를 만드는 내내 생각했어. 네 기준이 뭘지. 근데, 도저히 모르겠더라고.”

차송진이 나를 보며 말했다.

“넌, 넌 이상한 사람이야. 악당이지만, 그래, 네 말대로 당장 법의 철퇴를 맞아도 억울하지 않을 악당이지만, 대상이 정해져 있잖아. 나쁜 놈들한테만, 나쁜 짓을 하자고. 그 나쁜 놈한테 어떤 나쁜 짓을 할 건지, 어느 정도로 나쁜 놈을 노릴 건지. 여태까지는 그 기준이 중요하지 않았어. 그냥 우리는 널 따라가기만 하면 됐으니까. 하지만 말이야…….”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은 차송진이 말을 이었다.

“나한테 도덕을 가르치라며. 스스로 생각할 여지를 주라며. 그러려면 네가 말해 줘야지. 우리가 지켜야 할 기준을.”

“내 기준…….”

“응, 아까도 말했듯이 나 혼자서는 네 기준을 도저히 알 수가 없었거든. 마음대로 추측한 다음에 가르치기도 좀 그랬고.”

확실히, 도덕을 가르치라고 말한 주제에 아무것도 신경을 안 쓰긴 했지. 차송진이 여기까지 생각해 올 줄은 몰랐다. 내가 바란 건 재호에게 ‘파란 불에는 손을 들고 건너요’ 정도의 기본 상식을 가르쳐 주는 거였는데…….

“그리고 말이지, 나는 어, 네가 서현이랑 싸운 걸 해결하는 데에도 이 기준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한서현과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차송진이 나를 보며 물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너는 어떤 기준에 따라서 사람을 죽이고 있는 거야?”

차송진의 말에 나는 가볍게 답했다.

“나쁜 놈?”

일단 ‘어린아이랑, 착한 사람들은 절대로 해치지 말자’가 내 기준이긴 하니까. 범죄를 저지른 어른 놈들? 알 바냐, 죽어! 죽어서 이 세상을 위한 거름이나 되렴!

내 말에 차송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런 것 같았어. 그럼 어느 정도까지 나쁜 놈부터 죽여도 되는 건데? 말했잖아, 기준이 중요하다고. 그냥 나쁜 놈이라는 건 대답이 못 돼.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렸다고, 무단 횡단을 했다고 다 죽일 건 아니잖아?”

그러고 보니 여태까지는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죽일 때, 이놈은 정말 죽여도 되는 놈인가를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내게 방해가 되는 놈이면, 조금이라도 죄를 지은 놈이면 가차 없이 목숨을 빼앗았다.

왜냐…….

그편이 간편하니까. 뒷일을 걱정할 필요도 없고.

잠깐, 내가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하게 됐지?

언제부터 사람을 죽이는 게 ‘깔끔한 해결 방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냐고.

내 손이 잘게 떨렸다.

내게 이 생각을 심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깨달은 순간, 당장에라도 구토가 나올 것 같았다.

‘……설록진이나 할 법한 짓이잖습니까.’

그래, 방해가 된다고 치워 버린다니. 그야말로 설록진이나 할 법한 행동 아닌가.

설록진이 했던 말대로다. 처음에는 누군가를 죽인다는 생각만으로, 누군가가 죽었다는 생각만으로도 벌벌 떨었던 나는 사라진 뒤였다.

어느새 나는 내 손으로 누군가를 죽이고 나서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이놈아, 정신 차려라.

내 얼굴을 살핀 차송진이 깜짝 놀라 외쳤다.

“왜, 왜 그래?”

덜덜 떨리는 내 손을 바라본 차송진이 화들짝 놀라 외쳤다.

“아파? 몸이 안 좋아졌어? 가, 갑자기 이러는 걸 보면 알, 알러진가? 뭐, 먹은 것도 없지 않아?”

저 얼빠진 반응에 머릿속을 채우던 생각이 흐려졌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생각해 보니까 내가 너무 아무나 막 죽인 것 같아서…….”

“어, 음.”

차송진은 내 말에 눈을 굴렸다. 어떻게 위로는 하고 싶은데 내용상 함부로 말을 내뱉을 수가 없어서 곤란하다는 얼굴이었다. 차송진의 얼빠진 얼굴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하하.”

“뭔데, 왜 갑, 갑자기 웃는 건데?”

“아니, 그냥.”

나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머릿속으로는 차송진이 한 말을 계속해서 떠올렸다.

기준, 기준이라.

설록진의 기준은 한없이 낮았다.

기분에 거슬리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혹은 재미를 위해서. 그 자식은 언제든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놈이었다.

나? 나 또한 비슷했다. 그놈의 곁에서 시간을 보내며 그렇게 설록진이 사람을 죽이는 걸 수도 없이 봐 왔더니 나도 모르게 물들어 버린 거다.

하지만 내게는 이제 책임질 사람들이 생겼고…….

“그 기준이라는 거, 지금부터라도 잘 생각해 보면 되려나?”

차송진의 말대로 내게는 새로운 기준이 필요했다.

설록진의 것이 아닌, 우리를 위한 새로운 기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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