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256화 (256/352)

제256화

#68 복수에 대하여 (7)

시리우스 쪽에서 게이트를 확보한 건 며칠 전이다. 세레나의 빙궁 때의 사건 때문인지, 미리 게이트 앞에 경비를 삼엄하게 세워 뒀다.

세레나의 빙궁 때처럼 제삼자에게 게이트가 탈취당해 공략 자체가 실패하는 상황을 막겠다는 거다.

이번에는 열 명도 안 되는 인원이 들어가니 후에 게이트에 난입하는 불청객만 막으면 된다는 생각이겠지.

청 과장 쪽에서는 그 철통 보안을 아무렇지도 않게 뚫었다.

어떻게?

설록진이 갔단다, 그곳에 직접.

개미 새끼 한 마리 접근할 수 없었던 그곳의 보안을 설록진이 무력화시키는 데에 걸린 시간은 단 3분. 차에서 내려 그들 모두를 눈에 담은 설록진은 곧바로 그들을 제 장난감처럼 움직여 게이트 앞을 깨끗하게 치워 놓았다.

한서현이 전해 주는 장면이 내 머릿속에 생생히 떠올랐다.

설록진의 노랗게 물든 동공이 떠오르는 순간,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모세가 가른 바다처럼 갈라진 사람들의 틈으로 들어간 사람은 한 명이었다. 기다란 무언가를 등에 짊어 멘 한지무가 게이트를 통과했다는 소식에 나는 얼굴을 굳혔다.

‘기다란 무언가라…….’

그게 무엇일지는 모르겠지만, 유선제를 상대할 비장의 무기일 게 분명했다.

“이번 일이 끝나면, 한지무는 아마도 살해당할 거야. 아니, 이미 그런 암시에 걸려 있을지도 모르지.”

설록진이 얼굴을 보여 줬다는 건 그런 의미다.

“설록진의 세뇌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어. 시야에 들어오는 동안 잠깐 그들을 조종하는 일시적 세뇌와 거리와는 상관없이 세뇌를 유지시킬 수 있는 반영구적 세뇌.”

전자의 경우에는 수십 명을 한 번에 조종해도 별 부담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런 세뇌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의 수가 겨우 하나, 둘 정도였으니까 말이지. 게다가 쿨타임도 존재하는 스킬이었다.

머릿속에 암시가 심어진 이는, 자신이 세뇌당했다는 사실도 모른 채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마치 세레나의 빙궁 때의 이혜원이 그러했듯이, 트리거가 되는 상황이 오기 전까지는 본인조차도 세뇌를 당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한지무에게 그 세뇌를 걸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차송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지무에게도 그랬을 가능성이 크지.”

━일회용이라며? 쿨타임 6개월짜리 스킬을 쓸 정도라는 거냐?

‘일회용이니까 오히려 더 세뇌를 하기에 적합하죠. 이번 일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한지무는 죽어야 하는 목숨이니까요. 더는 쓸모가 없어진 도구를 처리하는 데에는, 이보다 더 깔끔한 방법이 없잖습니까.’

같은 차를 타고 오는 동안 설록진이 한지무의 머릿속을 어떻게 주물렀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설록진이라면 분명히 그랬을 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일을 성공시키고 싶기도 할 거고요.’

설록진은 생각보다 자신의 계획이 틀어지는 데에 관대한 편이었다. 오히려 때때로는 그런 상황을 즐기기도 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의도대로 되면 재미가 없다면서 말이지.

하지만 목표 자체가 실패하는 걸, 설록진은 견디지 못한다. 설록진이 참아 주는 건 어디까지나 목표가 이루어지면서 생기는 여러 가지 예외들이지, 목표 자체가 무너지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지금 설록진의 목표는 시리우스를 무너트리는 거다.

한지무는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소모하는 패고.

“그쪽에서 이미 게이트에 진입했다며. 어떻게 할 생각이야?”

차송진의 질문에 나는 눈을 굴렸다. 지금 당장 저 안에 들어가 한지무를 상대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시리우스 측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지금에라도 저기에 들어가는 게 맞지. 하지만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잖아, 우리는.”

게다가 나는 누군가의 조용한 수호천사 같은 게 되고 싶지 않거든. 내가 하는 일에는 그만큼 생색을 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라고.

━……그랬냐?

‘예, 그런데요. 저 어디 가서 뭐 떼먹히고 그런 호구 아닙니다.’

━그래, 네 놈이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면야.

차송진이 내게 물었다.

“그러면 유선제 팀이 진입하고 나서 들어가자는 말이야?”

“그래, 백마 탄 왕자님 작전으로 가자. 위기 상황에서 짜잔 등장해서 구해 주는 거지.”

“너 그거 되게 좋아하는구나, 백마 탄 왕자…….”

차송진의 말에 나는 떠올렸다. 내가 차송진을 만났던 날에 했던 망언들을.

“아…….”

“생긴 건 백마 탄 왕자보다는, 오랑캐가 더 잘 어울리는데.”

“오랑캐라니.”

“맞아요, 우리 보스 얼굴이 조금 험악하긴 해도 오랑캐 쪽은 아니거든요?”

“저기, 날 위해서 말해 주는 건 고마운데…….”

“맞아! 우리 보스, 못생기긴 했어도 오랑우탄은 아니다! 사람이다!”

“재호야! 그거 아니야!”

우리 편 맞냐, 이거! 완전 오인사격인데! 나는 너덜너덜해진 감정을 가까스로 추슬렀다.

어쨌거나 계획은 이렇다. 유선제 쪽이 들어간 다음, 우리도 시간을 두고 따라 들어가 그들을 지켜보다가 위기감이 들 때쯤 구해 준다는 것.

“저쪽의 작전이 뭔지 확인하고 들어갈 수도 있고, 유선제 쪽이 미끼가 되는 사이에 한지무를 기습하는 꼴이니 효과도 좋을 거야. 거기에…….”

“네가 유선제의 백마 탄 왕자가 될 수도 있고 말이지.”

차송진의 말에 나는 부들부들 떨었다. 정말이지! 나는 차송진을 노려보며 말을 마무리했다.

“그래, 그쪽에 빚을 지워 둘 수도 있겠지.”

내가 노리는 효과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혹시 모르죠. 이번 일로 유선제도 무언가 교훈을 얻을 수 있을지도.’

자신과 같은 팀이던 한지무마저 적으로 돌렸다는 걸 깨닫고, 자신의 인성을 반성하게 된다거나. 음, 내가 말했지만, 가능성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군. 겨우 그 정도 이벤트로 절굿공이로 곱게 빻아 놓은 것 같은 그놈의 인성이 기적적으로 회복하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을 거다.

그래도 뭔가 배우긴 하겠지.

적어도 같은 팀을 조금 더 생각하는 마음이라든가, 적어도 적을 만들지는 말아야겠다는 정도의 깨달음이라도 좋다.

뭐라도 배웠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게이트에는 어떻게 들어갈 생각인데?”

차송진의 말에 나는 씩 미소를 지었다.

“내가 설록진만큼 사람들 머릿속을 마음대로 헤집을 수는 없지만 말이지. 내게도 제법 그럴싸한 방법이 있거든.”

유선제의 파티가 게이트로 들어가는 날, 우리는 모두 그 근처에서 대기했다. 문제는…….

“생각보다 구경꾼이 많은데요?”

한서현이 낮은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그러게나 말이다.”

C급 게이트에 불과하지만 유선제가 엮인 일이라 그런지 취재진이 은근히 붙었다. 실시간으로 뜨는 기사는 없었지만, 공략을 마치고 나오면 아마 대대적으로 보도를 할 생각이겠지.

“어쩌죠? 저 사람들을 다 제치고 저 안으로 들어갈 순 없을 것 같은데요.”

한서현의 말에 나는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차송진이 내게 물었다.

“애초에 어떻게 저기를 지나갈 생각이었는데?”

“그야, 거짓말로?”

설록진만큼은 아니지만, 내게도 훌륭하게 작동하는 세 치 혀가 있으니까 말이지. 적당히 앞을 지키고 있는 사람 몇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기자들이 이렇게 죽을 치고 있을 줄이야.

“일단은 곧 빠질 것 같긴 한데요.”

기자들의 근처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엿들은 한서현이 내게 상황을 중계해 주었다. 언제까지 여기에서 죽치고 있진 않을 거고 첫째 날이니만큼 금세 빠질 거라나.

“그때까지만 기다렸다가 들어가자고, 그럼.”

나는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눈을 찌푸렸다. 이렇게 시간을 버리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내 말에 일행들은 긴장을 풀고 구덩이에 몸을 기댔다.

[이렇게 땅속 집에서 시간을 보내게 될 줄이야. 그래도 제법 아늑하니 다행이네.]

에드워드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제법 유용한 기술이지?]

[내가 파는 것만 아니라면, 응.]

시시한 대화를 나누던 사이, 구석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차송진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우리랑 같이 갈 생각이야? 여기에서 대기해도 되고, 집으로 돌아가서 쉬어도 되는데.”

“내가 너희 탈출로잖아.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너희만 보내.”

말은 멋있게 했다만, 차송진의 얼굴은 긴장으로 인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게이트에는 영 안 좋은 추억만 있었으니까.

‘음, 이번에도 그리 좋은 꼴을 볼 것 같진 않은데.’

나는 속으로 혀를 찼지만, 굳이 여기까지 따라온 차송진을 돌려보내진 않았다. 차송진이 저렇게 말하는 걸 들으니 왠지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지기도 했고…….

우리가 게이트 안으로 들어선 건, 주변의 구경꾼들이 모두 사라진 뒤였다.

‘한 시간.’

생각보다 지체된 시간에 마음이 초조해졌다.

“그래도 한 시간은 버텼겠죠. ‘그’ 유선제인데.”

한서현의 말에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 그 유선제인데. 무슨 일이 있겠냐?”

* * *

나는 간단한 거짓말로 경비를 제쳤다.

━정신계 아티팩트가 진정으로 필요한 건 이쪽이 아닐까 싶은데.

‘아직까지는 정신계 각성자는 약해 빠졌다는 인식이 강하니까요. 다들 인식표를 달고 다니니까, 오히려 정신계 각성자에 대한 대비는 안 해 놓는달까.’

게다가 나 정도로 정신계 재능을 쓸 수 있는 각성자의 수도 적은 편이고. 보통은 아예 정신계 재능을 써먹는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하거든. 지금 세상에서 인식표를 떼고 정신계 재능을 쓰는 놈들은 딱 하나다.

범죄자.

‘설록진도 그렇고, 저도 말이죠. 평범한 사람과는 거리가 머니까요.’

그러니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몇억짜리 정신계 아티팩트를 채워 놓는다는 생각 자체를 못 한다는 뜻이다.

덕분에 나와 설록진만 편하게 됐지, 뭐.

게이트 안으로 들어 온 우리는 사방을 훑었다. 기후는 온화, 타입은 숲인가. 스태프를 꺼낸 한서현이 마력을 풀어냈다. 한서현의 마력을 받아들인 모래가 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퍼졌다. 에드워드는 게이트를 둘러보며 내게 말했다.

[한국의 게이트도 특별할 건 없네.]

[접속하는 위치가 다르다고 해서 게이트 너머의 세상이 바뀌는 건 아니거든.]

에드워드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보이지 않았지만, 차송진은 달랐다. 나는 김재호에게 눈짓해 차송진의 곁에 딱 붙어 있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제 옆에 붙어서는 김재호를 보며 차송진은 내게 고맙다는 듯이 고개를 까닥였다.

“일단은 앞으로 가 봐야겠네.”

“이쪽이에요.”

한서현이 이끄는 대로 우리는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한순간, 한서현이 걸음을 멈췄다.

“앞에 조금 끔찍한 게 있어요.”

한서현의 눈이 차송진에게로 향했다. 차송진은 침을 꿀꺽 삼켰다.

“난 괜찮, 괜찮아.”

차송진의 말에 한서현이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천천히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리의 눈앞에 나타난 장면은 평화로운 숲과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끔찍했다.

엄청나게 많은 피, 그리고 조각이 난 인간의 신체들. 누군가의 머리는 바닥에 뒹굴고 있었고 팔다리가 장난감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한서현이 미리 경고를 했지만, 그 장면과 마주한 차송진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나는 차송진의 앞에 서서 시야를 차단했다.

에드워드가 질린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여기에서 무슨 빌어먹을 일이 일어났던 거야?]

나는 천천히 그곳을 살폈다.

잔인하게 도살된 신체에 가려져 흔적을 놓칠 수도 있었지만, 나는 어렵지 않게 이곳에서 마력의 흔적을 찾았다. 마력에 의해 파헤쳐진 땅과 창이 박혀 있는 나무, 그리고 그 나무 끝에 걸려 있는 또 다른 신체.

나는 천천히 그들의 수를 셌다.

“다섯, 여기에서 죽은 건 다섯이야.”

“나머지는?”

그 질문에 한서현이 말했다.

“지금 이 게이트에 저희를 빼고 살아 있는 건, 세 사람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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