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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297화 (297/352)

제297화

#79 해성회 (4)

하지만 내가 내뱉은 무시무시한 말에도 바깥으로 도망쳐 나온 숫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건물에 틀어박혀 있었다.

내 말을 듣지 못한 건가?

여기에 있으면 다들 죽여 버린다니까! 이런 무시무시한 협박을 듣고 여전히 건물 안에 남아있으려고 하다니, 죽고 싶어 환장을 한 건가.

사람들에게 조금 더 확실하게 말해 두기 위해 입을 열려 할 때였다.

[너는 뭔데 우리더러 여기에서 나가라는 거야!]

처음 시작은 음식집에서 시작된 한 아주머니의 목소리였다.

[어떤 마음으로 내가 이 가게를 지키고 있는데!]

그동안 꾹꾹 눌러 담았던 것이 툭하고 터져 버린 듯, 내게 그렇게 소리를 친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먹먹하게 느껴질 만큼 젖어 있었다.

영원히 나가라는 게 아니라, 싸움이 일어나는 동안만 자리를 비켜 달라는 건데…….

━그야, 너처럼 말하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냐.

‘으음, 그런가?’

내가 어떤 말을 던져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누군가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 우리가 어떻게 이 도시를 지켰는데!]

[우리에게서 터전을 빼앗을 셈이냐!]

[네놈은 대체 누구길래 우리더러 여기에서 나가라고 하는 거야?]

처음에는 한 아주머니의 자그마한 목소리로 시작되었던 그 외침은 어느새 거대한 울림이 되어 있었다.

악당 역할을 맡은 사람이 나만 아니었더라도, 참으로 흐뭇한 광경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아무래도 보스의 생각대로는 안 된 것 같은데요.”

한서현의 말에 나는 볼을 긁적거렸다.

“어떻게든 저 사람들을 대피시키긴 해야 할 텐데 말이다.”

우리 쪽이야 죄도 없는 민간인을 끌어들일 생각이 전혀 없다지만 해성회 쪽에서는 어떤 생각일지 모르니, 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여기에서 전부 대피를 시키는 게 맞았다.

스태프를 두 손으로 움켜쥔 한서현이 내게 말했다.

“어떻게든 저 사람들을 여기에서 쫓아내면 되는 거잖아요?”

“쫓아낸다니, 대피라는 좋은 단어를 두고.”

하늘은 순식간에 검게 물들었다. 아까도 갑자기 나타난 검은 모래로 시야가 차단되긴 했지만, 지금은 햇빛 하나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사방이 껌껌해졌다.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사람들은 겁을 먹은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았지만, 여전히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도시의 상공을 떠돌아다니고 있던 검은 모래가 이윽고 어떤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좀비처럼 몸이 썩어들어 가는 시체들이 벽에 차례대로 달라붙기 시작했다. 누가 네크로맨서 아니랄까 봐, 검은 모래로 빚어낸 시체들의 형상은 지나칠 정도로 리얼했다.

벽에 달라붙은 괴물들은 괴이한 소리를 내며 곧 거칠게 유리창을 때렸다. 쿵, 쿵. 당장에라도 유리창을 뚫고 집안으로 들이칠 것 같은 괴물들의 모습에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은 겁에 질려 비명을 내질렀다.

음, 저 사람들을 대피시키길 바랐던 건 사실이지만 이건 너무 과한 것 같은데…….

치앤츠리앤이 내게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저런 방법으로는 사람들을 대피시킬 수 없을 것 같습니다만…….]

중국어로 내게 말을 붙인 것을 보니, 한서현을 자극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음, 나도 그런 생각이 들긴 했어요.”

문제는 한서현의 이상한 승부욕이 발동해 버렸다는 거다.

“이런 데도 안 나가?”

순순히 바깥으로 나오지 않는 사람들을 끌어내기 위해 한서현은 더 많은 괴물을 벽에다 붙이고 있었다. 일반적인 시체의 모습으로는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인지, 조금 더 끔찍한 모습의 모래 괴물들을 찍어 내고 있었다.

━으음, 저 방법은 글러 먹은 것 같은데 말이다.

하지만 의욕을 활활 불태우는 애를 말리기도 좀, 아니, 물론 잘못된 방법이긴 한데. 다른 뾰족한 방법도 없지 않은가. 그때, 내 팔을 누군가 잡아끌었다.

[대체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미, 민간인을 공격하는 거야?]

[아니야!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

[그, 그럼 저건 뭔데!]

에드워드의 말에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꼭 민간인을 공격하는 것처럼 보여도 말이지, 저건 다 저 사람들을 위한 일인데 말이다.

[곧 여기에서 싸움이 일어날 수도 있잖아. 저 사람들을 미리 대피시키려는 것뿐이야.]

내 해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에드워드의 눈초리는 매서웠다.

[저런 방법으로?]

[어, 음, 나도 영 저 방법이 별로인 것 같긴 한데, 다른 뾰족한 방법이 영 떠오르지가…….]

잠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나를 원망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에드워드의 얼굴을 살폈다.

그래, 이런 식으로는 백날이 가도 저 건물 안에 숨은 사람들을 꺼낼 수 없다. 작전을 바꿀 때가 됐다.

[나쁜 경찰, 좋은 경찰 전략으로 가자. 우리가 나쁜 경찰 네가 좋은 경찰을 맡는 거야.]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작전을 그대로 에드워드에게 말했다. 내 작전을 들은 에드워드의 표정이 벌게졌다.

[나, 나한테 영웅 노릇을 하라고?]

[이미 세상 사람들은 너를 붉은 영웅이라고 알고 있잖아. 이왕 쌓은 명성을 조금 이용하자는 거지.]

에드워드에게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영웅으로서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일이니까. 에드워드는 내 말에 머리를 쥐어뜯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저 녀석한테 잘 말해 줘. 나는 저 모래들이랑 싸우기 싫거든.]

[걱정 말고 어서 내려가. 사람들을 최대한 멀리 여기에서 대피시키자고.]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에드워드는 거침없이 모래 사이를 뚫고 도심지로 달렸다.

“뭐예요?”

갑작스러운 에드워드의 참전에 한서현이 놀라 외쳤다.

“너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네 방법으로 사람들을 끌어내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야. 구원투수로 보낸 거야.”

“저런 녀석이 구원투수라고요?”

“믿어 봐, 다 생각이 있으니까.”

검은 모래를 뚫고 도심지로 달려간 에드워드는 닫혀 있는 창문을 향해 무어라 소리를 질렀다.

[다들 나와요! 어서 여기에서 도망가라고!]

영어와 중국어, 서로 언어는 통하지 않았지만, 에드워드의 간절한 외침은 건물 안에 숨어있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 관심에 고개를 내밀었던 누군가, 에드워드를 알아채고 입을 열었다.

[저건 붉은 영웅이잖아!]

[우, 우리를 구하러 온 건가?]

[뭐라는 거야? 영어가 되는 사람 없어?]

[일단 밖으로 나오라는 것 같은데!]

[하, 하지만 어떻게 밖으로 나가냐고!]

이제는 연기가 필요할 때다. 한서현은 내 눈빛에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모래를 에드워드에게 날려 보냈다. 에드워드는 자신에게 날아드는 검은 모래에 깜짝 놀라 팔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 동작에 맞추어 한서현이 만들어 낸 괴물들은 순식간에 흩어졌다.

그제야 우리의 생각을 읽은 에드워드가 괴물들과 치열하게 싸우는 체를 하기 시작했다.

가까이에서 보면 아무래도 동작이 허술했지만, 검은 모래가 자욱하게 깔려 있는 상황에는 썩 그럴싸하게 보였다.

[어서 나와요!]

에드워드의 손짓과 함께 한서현은 한쪽으로 길을 터 주었다. 사람들은 곧 에드워드가 하는 말을 알아차렸다.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그들은 저 건물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최근 지닝시에서 수많은 인명을 구한 붉은 영웅이라면……. 기꺼이 건물 안에서 나오겠지. 겁이 많은 몇몇은, 에드워드가 직접 ‘구조’를 할 수 있을 테고.

적어도 나와 한서현이 바깥으로 끌고 나오는 것보다는 훨씬 괜찮은 방법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사람들을 대피시킬 수 없었던 나와 한서현과는 달리 에드워드는 손쉽게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있었다. 에드워드의 움직임에 맞춰 연기를 하는 와중에도 한서현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이게 왜 통하는 거예요?”

“간단해. 저 건물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양이야. 너는 늑대고. 그리고 에드워드는 음, 따지자면 양치기 개지. 뭐, 늑대가 자신들을 노리고 있는 상황엔 어떻게든 자신을 살려 줄 것 같은 놈의 말을 듣고 싶지 않겠어?”

“하.”

한서현은 내 설명에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찌 되었든 빨리 사람들을 데리고 가 줬으면 좋겠네요. 덕분에 이쪽은 아무것도 못 하고 있으니 말이죠.”

━아무것도 못 한다고 말하는 것치고는 아까부터 잔뜩 신이 난 것처럼 보이는데 말이다.

‘그러게 말입니다. 막 모래로 언데드를 흉내 내고 말이죠.’

독수리를 다루는 걸 보고도 느꼈지만, 확실히 한서현이 모래를 다루는 실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음, 마치 창조의 권능처럼 느껴질 정도니까.

━모래에 생명이 깃든 건 아니다. 저 수많은 모래 입자를 다룰 수 있을 정도로 지배력이 강하고, 마력의 운용이 말도 안 되게 세밀한 거지.

‘그러니까 말입니다.’

내가 품기에는 점점 더 대단한 인재가 되는 것 같아서 두렵달까. 역시 꿀리는 리더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나도 하루빨리 4획을 완성해야만…….

“그나저나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지 않아?”

“응?”

“저, 저쪽 말이야. 우리가 이쯤 난리를 부렸으면 당연히 나타날 줄 알았는데.”

“확실히.”

차송진의 말에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한서현이 가리켰던 건물을 바라보았다. 건물은 커튼으로 전부 창가를 막아 놔 안쪽을 살펴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한서현은 저 안에 어린애들이 잔뜩 있다고 말했다. 저기에 아이들이 갇혀 있다면, 그 아이들은 평범한 녀석들이 아닐 거다.

해성회에 속한 범죄자거나 다른 곳에서 납치되어 온 각성자일 확률이 높았다.

어린 각성자를 잔뜩 모아 둔 범죄 조직이라,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데.

우리가 여기까지 왔음을 뻔히 알면서도 건물 안의 사람은 잠잠했다.

적어도 우리를 감시했던 물 능력자는 바로 튀어나와 우리를 견제할 줄 알았는데 말이다.

한서현은 저 안에 그 사람이, 정확하게는 그 여자가 있다고 말했다.

“혹시 저쪽도 민간인의 피해를 걱정하는 걸까?”

내 추측에 차송진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런 거라면 좋겠지만, 무언가 한 방을 터트리려고 대기 중이라면 어떡하지? 그, 그게 막 엄청난 거라면?”

역시 걱정이 많은 차송진다운 대답이었다.

“뭐가 됐든 쳐부수면 돼.”

참으로 김재호다운 해결책 제시였다.

“맞아, 적에게 무슨 계획이 있든 상관없어. 힘으로 눌러 주겠어.”

한서현 또한 김재호의 말에 힘을 실어 주었다. 기특하기는 해도 팀 리더로서는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는 대답이었다.

“일단 민간인의 피해를 내지 않는 게 최선이야. 그리고 되도록…….”

나는 슬쩍 김재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린애들도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내 말에 치앤츠리앤이 입을 열었다.

“만약 그 어린애들이 각성자라면, 최대한 빨리 처리하는 게 나을 겁니다. 괜히 봐주다가 피해가 커질 수도 있어요.”

“일단, 시도는 해 볼 겁니다. 그 어린애들한테 아무런 기회도 주지 않는 건 너무하잖아요.”

아무리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의지로 이곳에 내몰렸는지도 제대로 확인할 수 없는 어린애들에게까지 손을 대고 싶지는 않았다.

“재호야.”

나는 김재호에게 시선을 보냈다.

“사각에 숨어 있어.”

우리를 그동안 계속해서 지켜봤다면, 우리 모두의 능력을 알고 있겠지만, 아니, 안다고 생각하겠지.

그게 바로 적의 약점이 될 거다.

“전열은 당신이 맡아 주시죠.”

치앤츠리앤을 전열로, 나는 후방 지원이다. 사실 전열을 맡아 줄 사람만 있다면 우리 중에 가장 막대한 화력을 낼 수 있는 게 나이기도 하고.

건물 안에서 움직임이 느껴진 것은, 에드워드가 범위 안의 시민들을 모두 대피시킨 다음이었다.

한서현의 시선이 건물로 향했다. 하늘에 퍼져 있던 모래들이 일제히 창으로 뭉쳐 건물을 조준했다.

건물의 창문이 깨지며 창문으로 작은 몸집을 가진 누군가가 뛰쳐나왔다.

한서현의 말대로 이제 겨우 십대 중반이나 되었을까 싶게 어린 얼굴을 본 순간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빌어먹을.”

전혀 반갑지 않은 적의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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