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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322화 (322/352)

제322화

#84 닿지 않은 마음 (2)

짜악, 경쾌한 소리와 함께 메이의 고개가 돌아갔다. 우리가 준을 말릴 새도 없이 준은 메이의 뺨을 연속으로 갈겼다. 두 번, 세 번. 그 사이 메이의 뺨은 점차 벌게졌다.

그 모습에 차송진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마,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복수하고 싶다는데, 하게 두자.”

한서현의 말에 차송진의 두 눈이 떨렸다. 내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음, 아무리 봐도 복수는 아닌 것 같은데.”

“복수가 아니고서야 저렇게 야무지게 팰 수가 없다니까요?”

확실히 한서현의 말대로 뺨을 때리는 손이 야무지기는 했다. 몇 년 동안 망치를 쥔 장인의 손으로 내려치는 거라 척 보기에도 정말로 아파 보였다.

“복수였다면 굳이 맨손으로 뺨을 치는 게 아니라 검으로 푹 찌르지 않았을까?”

내 말에 한서현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죠, 그건 너무 빠르고 쉽잖아요. 정신을 잃은 상대에게 그런 식으로 죽음을 주는 건 복수가 아니에요. 자비 쪽에 가깝지.”

“음, 그런가?”

“예. 그러니까 일단은 깨워서 끝장을 보자, 그런 전략이겠죠.”

가만히 우리 둘의 이야기를 듣던 차송진이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외쳤다.

“도대체 둘 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지금 그런 소리나 할 때냐고.”

“우리가 뭐 못할 소리를 했다고…….”

소심한 내 대꾸는 차송진의 살벌한 표정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나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본 차송진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일단 말리자.”

그 말에 한서현이 툭 말을 던졌다.

“그러니까 아까부터 왜 자꾸 말리자는 건데?”

“그럼 저렇게 뺨을 내리치게 둬?”

“저게 그동안 쌓인 감정에 대한 복수라면? 응, 나는 그대로 두는 게 맞다고 생각해.”

한서현은 ‘복수’를 막아야 한다는 차송진의 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서현은 나 못지않은 복수찬양론의 신봉자였고 최근에 그야말로 ‘끝내주는’ 복수를 한지라 복수에 대해 더더욱 긍정적인 사고관을 갖게 돼 버렸거든.

그러니 남의 복수를 막을 리가.

하지만 우리의 도덕 선생님 차송진은, 한서현의 이 비틀린 사고관에 대해 아주 할 말이 많은 모양이었다.

나는 재빨리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우리끼리 싸우진 말자고. 네 말대로 일단은 저쪽을 말려 볼 테니까.”

확실히 조금만 더 패면 무슨 일이 생겨도 생길 것 같으니.

내 말에 차송진은 할 말이 많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잔소리를 틀어막는 데에 성공한 나는 황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어이.]

내 부름에 준이 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 사람을 그렇게 패는 건데?]

[……깨우고 싶은 것뿐이야.]

[으음, 그렇게 해서는 일어나려던 사람도 다시 기절할걸.]

나는 온 얼굴이 퉁퉁 부어 버린 메이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차가운 물을 소환해 메이에게 뿌렸다. 물을 맞은 메이의 몸이 꿈틀거렸다. 눈꺼풀이 흔들리는 게 곧 깨어날 듯싶었다.

문제가 있다면, 덩달아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준이 사나운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는 거다. 그 표정에 찔린 나는 재빨리 바람을 불러 준의 몸을 말려 주었다.

제 뺨을 간질이는 바람에 준의 눈이 가늘어질 때, 메이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흐업.]

이상한 숨소리를 내뱉은 메이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준을 발견한 그녀는 바보 같은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준?]

[드디어 일어났네.]

[네,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야?]

[저 사람이 작업실 벽을 부숴 줘서 걸어 나왔지. 아, 작업실 벽에 구멍이 아주 크게 났어.]

[그런 걸 물은 게 아니잖아!]

메이는 준의 담담한 대답에 소리를 버럭 질렀다. 준은 눈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어떻게 여기에 있냐며.]

그러게, 준의 대답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니까 질문을 할 때는 정확하게 해야지. 나는 나도 모르게 열리려는 입을 가까스로 닫았다.

━끼어들기를 좋아하는 네놈에게는 별일인데?

‘일단은 둘 사이가 어떤지, 좀 두고 보고 싶어졌거든요.’

한서현의 말대로 준이 바라는 것이 복수일 수도 있겠지만, 아닐 수도 있으니 말이다.

‘어딘가 단단히 망해 버린 것 같긴 하지만, 일단은 장인을 꼬셔서 데리고 가는 게 제 목표니까요.’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소리가 있으니, 일단은 음, 그러니까…….

‘필살 가만히 있기 전략입니다.’

━그런 허접한 전략에 ‘필살’ 같은 단어를 붙이면 불법 아니냐?

하지만 그래서야 정말로 별거 아닌 전략처럼 느껴지잖나! 필살 정도는 붙여 줘야, 왠지 그럴듯한 전략처럼 느껴진다고.

━아니, 전혀 아니거든.

레이의 박한 평에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하여간 이 머릿속 꼰대는 언제쯤 내 편이 되어 줄는지. 내가 그렇게 레이와 시답잖은 대화를 나눈 뒤에도 두 사람의 대화에는 영 진전이 없었다.

메이는 바깥으로 나온 준을 보며 섣불리 말을 잇지 못했다. 두 눈을 쉴 새 없이 굴리고 손가락을 잡아 뜯는 게 보는 사람의 몸이 다 긴장으로 덜덜 떨릴 정도다.

하긴 나라도 내가 몇 년 동안이나 가둬 둔 쌍둥이가 바깥으로 나와 나를 노려보고 있다면 좀 무섭긴 할 것 같다만.

━네 녀석이라면 그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입을 놀릴 것 같은데 말이다.

‘뭐, 그냥 죽어 줄 수는 없잖습니까? 일단은 동정표라도 얻어 볼 겸 입을 좀 털어 보겠죠. 그게 효과가 있든 없든,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죽는 것보단 나으니까.’

확실히 메이의 태도는 좀 이상했다. 험상궂은 헌터들 사이에서도 기가 죽지 않을 정도로 사람을 다루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제 쌍둥이 앞에서는 저렇게 약한 모습이라니.

[난, 나는…….]

메이는 마치 말하는 것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바보처럼 말을 더듬기만 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그동안 감금에 학대를 저지른 사람이 메이가 아니라 준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둘 사이의 분위기는 극과 극이었다.

어떻게 몇 년간이나 갇혀 착취를 당한 쪽이 훨씬 침착할 수가 있는 것인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결국, 대화의 물꼬를 트는 것도 준이 맡았다. 그 말에 메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라고? 겨우, 겨우 그런 말이나 하는 거야?]

준의 말은 막힌 배관을 뚫는 뚫어뻥처럼 꽉 막혀 있던 메이의 입을 뚫어 놓았다. 마치 그동안 꽉 막혀 있던 말이 한꺼번에 쏟아지기라도 한 듯, 메이가 악에 받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야말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그동안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 거 아니야! 드디어 밖으로 나왔으니 말이야!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 되겠네!]

[나는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 다 했어.]

[다 했다고?]

[그래. 그러니까 네가 말해.]

메이를 바라본 준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

[이게 마지막일 테니까.]

[마지막?]

메이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준은 여전히 침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쪽이 이제 내 새로운 주인이 되겠지. 저쪽의 전력은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네가 여기에 잡혀 온 걸 보니 너는 이길 수 없는 상대겠지? 그러니까 이게 마지막일 거야. 그러니까 하고 싶은 얘기를 해.]

그 말에 메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 사람들하고 갈 거야? 나, 나를 버리고?]

[내가 널 버리는 게 아니야. 저 사람들이 나를 데리고 가는 거라고.]

[그게 뭐가 달라!]

[달라. 아주 많이.]

그렇게 말한 준이 덧붙였다.

[너는 꼭 내가 널 버리는 걸 선택한 것처럼 말하고 있잖아. 하지만 난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았어. 그때도, 지금도.]

제 말에 마치 석상처럼 굳어 버린 메이를 보며, 준이 말을 이었다.

[그때도 나는 우리 부모님이 죽는 걸 선택하지 않았어. 쑤샹원에게 팔리길 선택하지 않았어. 그 사람을 위해 일하는 걸 선택하지 않았어. 나한텐 선택지가 없었어.]

[하지만 넌, 기꺼이 받아들였잖아. 원망 하나 없이, 그 사람하고 일했잖아.]

[응, 선택했거든.]

[조금 전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다며, 대체 뭘 선택한 건데!]

메이의 원망 섞인 말에 준이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그때, 쑤샹원은 내게 말했지. 내겐 선택지가 있다고 말이야. 하나는 그에게 절대로 협력하지 않고 나 좋을 대로 반항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에게 절대적으로 협력하며 그의 말을 듣는 것.]

[그건 선택이라고…….]

[후자를 ‘선택’하면 널 내 곁에 두겠다고 말했어. 어딘가 나쁜 곳에 팔아 버리지 않고, 고된 일도 시키지 않고. 널 내 옆에 두겠다고.]

[뭐?]

[메이, 내가 여태까지 무언가를 선택해 본 건 그때뿐이야.]

[말도 안 돼! 나, 나를 위해서? 네가 왜! 너는, 너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잖아! 너는, 너는 괴물이고, 너는…….]

메이는 준의 말에 마치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메이, 내게도 감정은 있어.]

[거짓말…….]

[말했잖아. 나도 쑤샹원이 밉다고.]

[하지만 부모님이 그립다고 단 한 번도 말하지 않았잖아! 엄마, 아빠가 보고 싶다고, 무섭다고, 단 한 번도…….]

[말한다고 달라질 게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준의 표정은 여전히 덤덤해 보였지만, 아까와는 달리 그녀의 눈가가 슬쩍 붉어져 있었다. 아주 작은 변화였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심정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네 옆에는 내가 있었잖아! 그러니까 나한테 말할 수도 있었어. 나한테 말하고 같이 슬퍼하고, 같이 고통을 나눌 수도 있었다고.]

[싫었어, 나는. 이미 아픈데, 아픈 걸 또 말하기 싫었어.]

메이와 준은 전형적인 소통 장애를 안고 있었다. 자매는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성향이 너무나도 달랐다.

메이는 슬픈 일이 생겼을 때 다른 이와 나누며 극복하는 사람이었지만, 준은 그 슬픔을 꾹꾹 눌러 담아 놓는 스타일이었다. 그렇게 꾹꾹 눌러 담으면 어느 순간 썩어 없어지니까. 준은 가만히 자신을 괴롭히는 일들이 썩어 없어지길 기다렸을 거다.

문제는 그렇게 기다리는 동안 메이의 마음 또한 까맣게 썩어 가고 있었다는 거겠지.

상황이 이렇게 풀리지만 않았다면, 메이와 준은 그럭저럭 친하지는 않아도 별문제는 없는 자매로 지낼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부모님이 살해당하고, 웬 남자에게 팔려 착취를 당하는 상황에서 둘은 완전히 틀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틀어짐의 결과가 내가 본 구덩이 속 준이었겠지.

[내가 널 가뒀을 때도, 똑같았잖아! 넌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잖아! 너는, 한 번도 나한테, 나한테 그런 말을 하지 않았었다고!]

그렇게 소리친 메이가 눈물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눈물범벅이 되어 바닥에 엎드린 메이와 달리 준의 얼굴은 여전히 덤덤했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해서, 정말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 덤덤한 게 아니다.

그냥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을 뿐이다. 왜냐, 감정을 드러내면 그게 곧 약점이 되니까.

[넌 날 미워했잖아, 메이.]

그리고 준은 진심으로 메이가 자신을 증오했다고 생각했다.

[넌 내게 벌을 주고 싶어 했어.]

그리고 그것에 무척이나 아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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