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회귀자 사용설명서 006화
회귀자(3)
사실 정하얀뿐만이 아니다.
김현성 이 녀석도 마찬가지.
이유야 어찌됐든 놈은 한 번 이 세계의 끝을 본 강자일 가능성이 높다.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알고 있고 닥쳐올 미래를 바꾸고 이용하려고 하는 의지도 가지고 있다.
판타지 소설에서나 나왔던 표현을 빌리자면 녀석은 일종의 선택받은 용사인 셈이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부러운 놈.’
녀석이 등에 짊어진 것이 부러운 게 아니다.
다만 놈이 앞으로 얻을 것이나 이용할 것들이 부럽다.
놈이 위로 올라가는 것은 이미 기정 사실.
이쪽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얻어 놔야 한다고 생각했다.
“언제까지 가야되는 거요. 거, 확실히 이 길이 맞는 거요?”
“네. 거의 다 왔습니다.”
박덕구가 심드렁하게 중얼거렸고 녀석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을 살피며 경계를 늦추지 않는 모습을 보니 묘하게 새롭다.
놈 역시 괴물들을 주의하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지금 당장은 스탯이 그리 높지 않다.
특성이나 직업을 얻었다는 것 그리고 마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남들보다 유리한 고지에 있기는 하지만 괴물들이 사방에서 덮쳐온다면 녀석 역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래서 지켜내지 못했던 거겠지.’
만약 그것이 가능했다면 스타트 포인트에서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생각보다 많이 살아 있는 것 같소. 대부분이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조금 더 구해낼 수 있었을 겁니다. 저도 처음에는 경황이 없어서 괴물들을 자세히 마주하지 못했죠.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이 조금 더 있었더라면….”
“뭐, 나도 그건 같소. 당장 꽁무니 빠지게 도망치는 게 전부였으니…. 아마 형님이 없었으면 진즉에 죽었을 거요. 30명이 모두 그때 있었던 사람들이오?”
“아! 사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다른 지점에서도 포인트가 있었던 것 같더군요. 저희가 있었던 곳에서는 조금 멀리 떨어진 곳이었지만….”
“끄응… 이곳에 온 사람들이 우리뿐만이 아니군.”
“네. 아마 수색 범위를 넓히면 좋은 소식이 들려올 겁니다. 수색대가 다른 사람들의 흔적도 조금씩 찾고 있으니까요.”
도대체 뭐가 좋은 소식이라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다른 생존자들을 더 찾을 생각이요?”
“여건이 된다면 당연히 그래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눈은 진심을 말하고 있다.
성향에 붙어 있는 선이라는 글자는 그저 폼이 아닌 모양.
자세한 사정은 알 길이 없지만 모두를 구해내겠다느니 함께 살아남겠다느니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머리가 아파졌다.
‘이 새끼….’
왠지 모르게 생존자 캠프가 어떤 식으로 굴러가고 있을지 눈에 보인다.
“조금 표정이 안 좋으시네요. 역, 역시 불편하신가요?”
내 표정이 조금 안 좋아 보였는지 정하얀이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아.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잠깐 생각할 게 있었던 터라….”
“불, 불편하시면 역시.”
“괜찮습니다.”
“아… 저… 그….”
“네?”
“조, 조금 늦었지만 구해주신 거… 감사드려요.”
감사의 인사에는 살짝 미소를 보냈다.
이 여자를 부축하는 건 조금 불편하기는 하지만 문제되진 않는다.
아주 약간이라도 점수를 따놓을 수 있는 부분에서 따놔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하얀의 얼굴은 묘하게 붉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이성간의 접촉하는 게 익숙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너무 가까이 몸을 붙이기보다는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경계심을 허무는 것에 도움이 된다.
최대한 사람 좋은 미소를 유지하자 그제야 나쁘지 않다는 듯 내게 의지해 오는 정하얀을 바라볼 수 있었다.
조금 더 길을 걸어가자 보이는 것은 꽤나 널따란 공간.
‘나쁘지 않네.’
꽤나 괜찮은 공간이다.
들어올 수 있는 입구가 하나라는 것이 나쁘지 않다.
입구로 들어오는 괴물을 막을 수 있는 방책이 어느 정도 마련되어 있는 것 같았고 바깥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다.
“놀랍군. 여기는 어떻게 찾은 거요?”
‘이미 알고 있었겠지.’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생존자들과 적당한 곳을 찾던 와중에 발견한 장소죠.”
“정말 운이 좋구만….”
아마 이전 생에 이 장소를 사용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사방이 뚫려 한꺼번에 괴물들이 들어올 수 있었던 스타트 포인트와는 다르다.
조금 조잡하지만 이런 장소에서 이 정도면 견고한 성이나 마찬가지다.
스타트 포인트와 무척이나 멀어진 이 지점을 우연히 발견했다는 것은 가능성이 희박하다.
조금이지만 녀석이 정말로 시간을 되돌아 왔다는 확신이 서기 시작했다.
“거 대단해 보이는군. 그렇지 않소? 형님?”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라면 놈들이 백 마리가 넘게 달려들어도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소.”
“그렇지는 않을 거다.”
“조, 조금 오바하긴 했소.”
인원만 충분하다면 어쩌면 막아낼 수도 있다. 그러나 퇴로가 없다는 것은 약점이기도 하다.
만약 저곳에 정말로 이쪽이 감당하기 힘든 숫자의 괴물들이 침입한다고 한다면 무조건 몰살이다.
운이 좋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전부 죽을 거다. 나는 김현성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방이 막혀 있군요. 입구로 많은 숫자의 괴물들이 들어온다면….”
“그래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주변에 모이는 괴물들의 정리도 착실하게 해주고 있고요.”
“정기적으로 사냥이라도 나가는 겁니까?”
“네. 일단은 다른 단서를 찾을 때 까지는….”
그 사냥은 누가 하는 것인지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입구까지 천천히 걸어 나가자 우리를 마중 나오는 여자를 바라볼 수 있었다. 조금은 작은 키에 전체적으로 애교가 많은 인상이다.
“현성 오빠 다녀오셨어요? 아 새로운 분들도 오셨군요.”
검과 방패를 들고 성큼성큼 걸어오는 거대한 덩치에 박덕구를 보고 조금 움찔하기는 했지만 미소를 잃지 않으며 이쪽에 웃음 섞인 말을 건네는 것은 조금 놀라웠다.
‘살갑네.’
친화력이 좋은 모양.
“지혜 씨.”
“조금 늦으시는 것 같아서 걱정했어요.”
[플레이어 이지혜의 상태창과 잠재 능력을 확인 합니다.]
[이름-이지혜]
[칭호-없습니다. 조금 더 노력하셔야겠네요.]
[나이-29]
[성향-이기적인 야망가]
[직업-백수입니다.]
[능력치]
[근력-05/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민첩-09/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체력-09/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지력-18/성장한계치 희귀 이상]
[내구-08/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행운-12/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마력-00/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쓰레기.’
나보다 더 절망적인 쓰레기의 등장에 나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사실,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
[총평-축하합니다. 플레이어 이기영. 드디어 영혼의 단짝을 만나셨군요. 플레이어 이기영과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낮은 스탯은 물론, 잠재 능력도 형편없습니다. 검이나 지팡이를 드는 것을 추천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형편없는 재능에 감탄해 목숨을 끊는 용도로는 또 이야기가 다르겠지만요. 둘이 이어지는 것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태어날 2세가 너무나도 불쌍하니까요.]
목 밖으로 튀어 나오려는 욕을 애써 집어넣었다. 저 상태창에 떠오른 메시지가 나를 도발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상태창을 서둘러 꺼버린 이후에 여자의 정보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형편없는 재능 수치, 형편없는 스탯보다 더욱 눈에 띄는 것은 그녀의 성향이다.
‘이기적인 야망가.’
어쩌면 나와 비슷한 타입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안에 있는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김현성을 마중 나온 이 행동도 다분히 남의 시선을 의식한 행동.
살아남기 위해 김현성에게 비비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헤헤. 혹시 성함을 들을 수 있을까요?”
“박덕구요.”
“이기영입니다.”
“정, 정하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다들 반가워요. 그럼 일단은 쉴 곳을 안내해 드리도록 할게요. 괜찮죠? 현성 씨?”
“물론입니다. 부탁드립니다, 지혜 씨.”
“네. 맡겨만 주세요. 현성 오빠.”
주먹을 꽉 쥐는 모습은 얼핏 귀여워 보이기는 했지만 그녀의 성향을 떠올려 보자 달갑지만은 않다.
나와 정하얀, 박덕구를 위아래로 스캔하는 것을 보면 우리가 어쩌다 합류한 것인지 계산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거대한 덩치를 가지고 검과 방패를 들고 있는 박덕구의 경우에는 일단은 합격점.
다리를 쩔뚝거리는 정하얀과 그런 그녀를 부축하는 비실한 나는 낙제점인 모양이다.
대놓고 박덕구 쪽으로 달라붙으며 입을 조잘거리는 꼴이 우습다.
“혹시 괴물들을 만나셨나요?”
“만난 것뿐만이 아니요. 벌써 몇 놈을 잡았지.”
“어머… 무섭지는 않으셨어요?”
살짝 놀라는 것 같은 표정은 작위적.
“물, 물론 무섭기는 무서웠지만… 큼. 사실 형님이 아니었으면 큰일 났을 거요.”
박덕구가 쓸데없는 말을 내뱉는 순간 이지혜의 시선이 다시 이쪽으로 돌아왔다.
같은 동족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지금 그녀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나에 대한 자체 평가를 수정하고 있는 것이다.
어중이떠중이 정도에서 박덕구의 형님 정도로 내부 평가가 올라갔으리라.
“아아. 기영 씨도 함께 싸우셨군요.”
“함께 싸우다마다! 형님이 창을 한 번 내지를 때마다 괴물 새끼들 서넛이 우수수 나가떨어진다오.”
‘닥쳐, 이 돼지야….’
박덕구의 입을 틀어막고 싶다.
녀석에게 조금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은 하지만 나에 대한 호감도가 지나치다.
적어도 뒤통수를 맞을 걱정은 없어 다행이기는 했지만 저런 행동들은 나를 당황스럽게 한다.
“아, 그렇군요. 정말로 다행이네요. 쉼터가 조금 더 안전해지겠군요.”
조금은 기대하는 듯한 말투.
그러나 별로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안으로 들어오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생존자들의 눈빛을 읽었기 때문이다.
특성 마음의 눈을 발동시켜 인원들을 모두 체크하고는 있지만 특별한 이들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다만 녀석들이 보내오는 시선이 어떤 것인지는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다.
‘안도.’
녀석들 모두 안도하고 있다. 창을 들고, 검과 방패를 들고 온 우리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다.
“허….”
뭔가 대충 이럴 거라고 예상했었지만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니 한숨이 나온다.
김현성이 만든 이곳은 무척이나 안전한 곳이다.
우리가 아닌 저들에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