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회귀자 사용설명서 012화
이지혜
“일단 앉으시죠.”
“저, 저는….”
우물쭈물하는 얼굴이 보였다.
아직 진정되지 않았는지 어깨를 부르르 떤다든가 눈물을 닦아내는 모습은 조금은 어린아이처럼 보인다.
애초에 그녀는 평범한 21살이다.
살면서 몇 번 겪어보지도 않을 상황을 이런 장소에서 겪었으니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저 여자의 심정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아마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었는지조차 제대로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죄, 히끅….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하다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히끅… 제가.”
“하얀 씨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물론 제가 자세한 상황을 본 것은 아니지만… 일단 천천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저, 저는 정말로 그런 의도로 그런 게 아, 아니었어요. 그, 그냥….”
“알고 있습니다. 편하신 대로 이야기해 주시면 됩니다.”
내가 살짝 웃으며 말을 건네자 그녀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대충 알고 있는 이야기이기도 했고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녀의 말을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것.
울먹이며 두서없이 쏟아낸 그녀의 한탄은 확실히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시스템 상으로는 그녀의 지력 수치가 낮지는 않았었는데 아마 단순한 사고력을 기준으로 지력을 책정하는 건 아닌 듯하다.
“그, 그래서 갑자기 석우 씨가….”
“네… 네… 그랬군요.”
“손, 손을 잡아당기면서 소리를 질렀어요.”
“아….”
그렇지만 내가 알아들을 수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공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잘잘못을 따지는 것보다는 그녀가 어째서 울고 있는지 어째서 억울해하는지 들어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난 네 편이야.’
라고 말하진 않지만 아마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 그래서 그렇게 됐는데… 갑, 갑자기 덕구 씨가 와서… 그 남자를 때리고 지혜 씨가 히끅.”
“그랬군요.”
“거, 거기서 기영 씨가 와서….”
“네.”
문제는 이 한탄의 시간이 꽤나 길어진다는 것.
결국에는 몇 분이 더 지난 이후에야 그녀의 장황한 이야기가 마무리 됐다.
“힘드셨겠군요.”
“아, 아니에요. 이, 이제 조금 괜찮아졌어요.”
확실히 진정했다는 느낌이 든다.
간헐적으로 떨리던 어깨는 제자리를 찾았고 계속해서 울먹이던 표정은 조금이지만 웃음기 섞인 표정으로 변해가고 있다.
어느 정도 여유를 찾은 것이다.
“고마워요, 기영 씨.”
“고마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단지 정황을….”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아까 전에 저를 믿는다고….”
“아아….”
“맨 처음 만났을 때부터 도움만 받네요. 저, 저는 아무것도 해드린 게 없는 것 같은데….”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 어째서 저한테 이렇게 잘해주시는지 물, 물어봐도 될까요?”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이쪽에 호감을 느끼는 건지 아니면 경계하고 있는 건지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아마 후자일 확률이 높을 거라고 생각했다.
유석우 역시 나와 비슷하게 접근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적당한 대답.
“그저 옳다고 생각한 일을 한 것뿐입니다만 굳이 이유를 찾자면….”
“네?”
“집에 여동생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하얀 씨를 보면 집에 있는 동생이 생각나서 말입니다.”
사실 별로 생각나지 않는다.
율하의 성격은 눈앞에 있는 정하얀과는 전혀 딴판이고 나이 말고는 공통점을 찾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이 대답이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아….”
“아마 하얀 씨와 비슷한 나이일 겁니다.”
“죄, 죄송해요. 제가 괜한 걸….”
“하얀 씨는….”
“위, 위로 언니 둘이 있지만… 언, 언니들과는 연락이 끊긴 지 오래 돼서….”
어두운 표정. 굳이 캐물을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은….”
“안, 안 계셔요.”
“공통점이 있군요.”
“기영 씨도?”
“네.”
묘하게 기뻐하는 표정.
“조, 조금 닮았네요.”
“네. 그렇군요.”
공통점이 있다는 건 좋은 일.
조용히 두 손을 모으고 있는 모습을 보니 입꼬리가 올라갔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다가갈지 아니면 여기서 물러서는 게 좋을지 계산해 봤지만 정답이 나오지는 않는 것이 문제.
머릿속으로 조금 생각을 정리한 이후에 나는 다시 아까의 말을 이었다.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으신다면.”
“네?”
“조금 더 편하게 대해주셨으면 좋겠군요. 순전히 제 욕심입니다만….”
“아? 아? 네! 어, 어떻게?”
“일단은 말을 편하게 하는 것부터 시작하죠.”
“네? 네… 그, 그렇다면 편하게….”
“편하게 할게.”
“네… 아니, 응. 알, 알겠어요. 오, 오, 오빠.”
아무래도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 얼굴이다.
정하얀이 인간관계에 서툴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던 부분.
조용히 그녀를 마주보며 마음의 눈으로 그녀를 투시하니 전체적인 능력치가 시야에 들어왔다.
[플레이어 정하얀의 상태창과 잠재 능력을 확인합니다.]
[이름-정하얀]
[칭호-없습니다. 조금 더 노력하셔야겠네요.]
[나이-21]
[성향-순수한 옹호자]
[직업-백수입니다.]
[능력치]
[근력-11/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민첩-11/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체력-14/성장한계치 영웅 이하]
[지력-22/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내구-14/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행운-23/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마력-10/성장한계치 전설 이상]
[총평-전설급 이상의 스탯 한계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체 능력치는 전체적으로 낮지만 향후 마법사나 사제로서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현재 본인이 마력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만약 같은 마법사가 된다고 하더라도 플레이어 이기영과는 차원이 다른 마법사가 되는 것이 당연하니 구태여 스트레스 받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전에 봤던 것보다 근력이 1, 체력이 2 올라갔다. 그 동안 성벽을 빡세게 쌓긴 쌓았던 모양이다.
신기한 것은 역시나 마력 수치가 10이라는 것.
마법사로 전직한 이후에 마력을 얻은 나와는 다르게 그녀는 이곳에 소환될 때부터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아직 느끼지 못했지만 혹시라도 이쪽이 도움을 준다면 뭔가 방법이 있을 수도 있다.
마력과 마법에 대해서 말을 꺼내볼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저, 저기 기영 오빠… 잠, 잠깐 괜찮을까요?”
정하얀의 목소리가 아니다.
뒤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지혜.
불안해 보이는 정하얀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사실 이지혜가 찾아올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던 부분이다.
다만 내 생각보다 조금 더 빠르다.
‘확실히….’
이 여자는 이런 쪽으로는 머리가 잘 돌아간다.
‘이쪽으로 붙겠다?’
어느 쪽이 더 위에 있는지는 이미 아까 있었던 사건으로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
방금은 유석우와 정하얀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자리이기도 했지만 나와 이지혜 둘 중에 누가 더 위에 있는지 가리는 자리이기도 했다.
아마 이지혜 역시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 정하거나 눈에 보이는 계급을 만든 것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내가 자신보다 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성향, ‘이기적인 야망가’.
이 여자 같은 종류, 아니 나 같은 종류의 사람들이 새로운 권력자를 찾았을 때 나오는 패턴은 두 가지.
배척하거나.
혹은 달라붙거나.
생각보다 더 행동력이 빠르다고 생각했다.
이쪽으로서는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지만 조금은 더 생각해 볼 만한 여지가 있는 부분.
나는 이지혜가 아닌 정하얀을 바라보며 살짝 입을 열었다.
“잠깐 비켜줄래? 지혜 씨와 이야기 좀 해야 될 것 같아서.”
“아. 네. 알겠어요. 오, 오빠.”
마지막 말에 조금 힘을 준 것을 보니 뭔가 불안하기는 한 모양.
결국 조용히 정하얀이 몸을 일으킨 자리에 이지혜가 자리 잡았다.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방금 대화가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았다.
“무슨 일이시죠?”
“저… 그… 사과드리고 싶어서요. 그, 소란을 일으켜서 죄송해요.”
“아뇨. 사실 지혜 씨가 잘못한 건 없습니다.”
“아니에요, 기영 오빠. 저도 갑자기 이런 상황을 맞은 건 처음이라 바깥 상황을 생각 안 하고 지나치게 흥분했던 것 같아요. 밖에 나가서 고생하시는 분들 생각하지 않고… 조용히 해결하는 게 좋았을 텐데….”
“괜찮습니다. 만약 제가 지혜 씨였어도 당황했을 겁니다. 오히려 제가 조금 민감하게 반응한 것 같아 죄송하더군요.”
“아니요. 오빠는 할 일을 하셨을 뿐이에요.”
무척 동안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 여자한테 오빠라고 불리는 것은 익숙하지 않다.
“저….”
“말씀하세요.”
“석우 씨 말인데요.”
“당장은 석우 씨를 불러다 뭘 할 생각은 없습니다. 아무래도 치료가 먼저라고 할 수 있으니… 저도 당장 할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아.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계속 이런 일로 신경 쓰이게 하는 것 같아 죄송했거든요. 아무래도 제가 아까는 당황해서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가 없어서요. 맡겨주신다면 제 나름대로 어떤 조치를 취해보려고 하는데… 이번 일은 저한테 맡겨주시면 안 될까요?”
조금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유석우를 어떻게 처우할지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해 본 적 없다.
이곳은 법도 없고 경찰도 없는 만큼 어떤 식으로 처벌해야 할지, 어떻게 벌을 내려야 할지 정해진 게 없었기 때문이다.
“하얀 씨는….”
“저도 잘 생각해 보니 하얀 씨한테 너무 했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맡겨주신다면….”
“뜻대로 하시지요. 애초에 이곳을 관리하는 건 지혜 씨가 하시는 일 같았는데… 주제넘게 제가 끼어든 것 같아 죄송했습니다.”
“아!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에요.”
“예. 저도 무슨 말을 하시는지 압니다. 다만 아까처럼 신경 쓸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요.”
요지는 나 역시 그녀의 권력을 일부 인정한다는 것.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 여자는 틀림없이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너를 굳이 막을 생각이 없다.’
그 대신 신경에 거슬리는 짓은 하지 마라.
납작 엎드리라는 뜻이다.
말을 마치자 슬그머니 이쪽의 손을 잡아 오는 것이 보인다.
객관적으로 보면 이지혜는 미인이다. 애써 심장을 조용히 가라앉혔지만 살짝 몸을 밀착해 오는 것은 적응되지 않는다.
아니, 그보다는 어째서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지도 궁금하다.
“바깥일도 충분히 힘드실 텐데… 이쪽 일까지 신경 써주셔서 너무 감사하네요.”
“그렇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무슨 일이든지요.”
허벅지를 살짝 쓰다듬어 오는 모습 또한 가관.
이쯤 되면 이 여자가 뭘 원하는지 당연히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든 말입니까?”
“네. 무슨 일이든.”
생각보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모습에는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여자는 어리석을 수는 있지만 멍청하지는 않다. 이쪽을 바보로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기이한 열망.
‘권력욕? 야망?’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나는 야망 있는 남자가 좋더라.”
내게 있어서 권력이나 야망이란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다. 물론 이지혜에게는 원인이나 동기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원하는 건 결과니까.
문제는 이 여자와 가까워지는 것이 내게 이득이 되는가.
그녀가 가지고 있는 건 고작 이 멍청한 집단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것 정도다.
여러 가지 쓰임새야 많겠지만 일단은 그게 전부다.
본인 역시 그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쪽에 비벼왔을 것이다.
애초에 집단에 그다지 구애받지 않은 나는 별로 쓸모없겠지만 있어서 나쁠 건 없다.
아니, 어쩌면 다른 쪽으로는 조금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정하얀과 관련해서라든가….
‘어떻게 할까….’
이쪽이 자신에게 혹하지 않다는 것 정도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도 깨닫지 못한다면 정말로 생각 없는 멍청한 년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다.
‘그건 아니겠지.’
목적은 계약? 심플한 관계?
이지혜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꽤나 많다. 흔들릴 뻔한 권력의 재확인, 집단 내 2인자일지도 모르는 사람과 끈을 만들어 놓는다는 것.
나와 자신이 사이가 나쁘지 않다는 여론을 이용할 수도 있다.
뭐가 됐든 친해져서 나쁠 건 없다.
적이 아니면 아군이라는 사고방식은 멍청한 사고방식.
“나는 뭘 얻을 수 있을까?”
“글쎄요. 하얀 씨?”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에게 내 몸을 밀착시켰다.
묘한 흥분감과 기대감이 서린 이지혜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다.
‘좋네.’
느껴본 지 오래된 감각.
살짝 입술을 포갠다. 언뜻 보면 로맨틱하게 느껴질 수 있는 광경.
그러나 서로 생각하고 있는 바는 다를 것이다.
‘서로 이용해 보자고.’
나는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조금 닮은 것 같네요.”
“네. 그런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