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회귀자 사용설명서 014화
당황(2)
“마력이 잘 움직이지 않아서요.”
‘뭐야.’
다시 한번 표정을 살펴봤지만 아까와 같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웃고 있는 모습이 아까 전에 훌쩍거렸던 그녀와 잘 매칭이 되지 않았다.
상태창을 다시 한번 봤지만 달라진 것이 없는 게 당연하다.
절대로 잘못 본 게 아니다.
[직업-마법사-일반 등급]
이미 정하얀은 직업을 얻었다.
‘언제부터?’
정하얀의 상태창을 마지막으로 살핀 것은 비교적 가까운 삼 일 전이었다.
마법에 대해서 강의 아닌 강의를 시작한 날짜와 거의 비슷하다.
그녀가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내가 마법에 대한 이야기를 넌지시 던졌던 순간부터 직업을 얻었을 가능성이 있다.
[특성-마법사가 되는 방법-영웅 등급]
[마법에 대한 기초와 기본 지식을 완벽하게 습득합니다. 마력 포인트가 영구적으로 2 올라갑니다. 성장 가능성이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이건 또 뭐야….’
특성마저 해괴하기 짝이 없다. 직업을 이해하자마자 관련된 영웅 등급의 특성을 얻은 것이리라.
정황상 그렇다고 보는 것이 맞다.
마법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받아들인 것만으로도 직업을 얻었고 새로운 특성까지 손에 넣은 경우가 있다는 건 처음 보는 경우.
만약 이런 일이 다른 이들에게도 가능했다면 김현성은 이 방법을 선택했을 것이다.
정하얀은 분명 특이 케이스다.
생각이 길어지자 정하얀이 조금 불안한 듯이 나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저… 오, 오빠?”
“아, 미안. 잠깐 다른 생각이 들어서… 마력을 움직이는 방법 말이지?”
“네, 네! 오빠 말대로 해봐도 너무 어렵게 느껴져서….”
어렵게 느껴질 리가 없다.
“마력량이 조금 많아서 그런가… 이상하네.”
먼저 살짝 손을 뻗어오는 것이 보인다.
나는 살짝 올린 정하얀의 손을 잡고 내 안에 있는 미약한 마력을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내부로 들어가 마력을 쌓으려고 했지만 정하얀의 마력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단순히 둔한 것이 아니다.
‘막고 있어.’
내가 자신의 마력을 움직이는 것을 의도적으로 억제하고 있다.
인상을 찡그리자 그제야 정하얀의 마력이 내가 간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역, 역시 오빠는 대단해요.”
‘얘 진짜….’
“이미지해 보자.”
“네?”
“주문을 한번 이미지해 보는 거야. 손에서 피어오르는 불꽃으로… 아까 내가 한 것처럼 할 수 있겠지?”
“아! 네, 네!”
조건에 걸맞은 마력은 완벽하게 쌓았다.
여기까지 온다면 작은 불꽃을 이미지하는 것 정도는 그녀에게는 손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마력은 곧장 허물어져 버린다. 시간이 지나거나 실패한 것이 아니다. 정하얀 스스로가 의도적으로 그것을 무너뜨렸다.
“역, 역시 아직은 너무 어려운 걸요. 저, 저는 왜 이럴까요…. 이, 이렇게 열심히 가르쳐 주시는데….”
심지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가관.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아니, 원래는 실패하는 게 당연한 거니까 아직 직업이 없어서 그런 거일 수도 있어. 만약 사냥에 나간다면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그렇지?”
슬쩍 흘린 직업이라는 단어에도 반응하지 않는다.
“한, 한 번 더 해보면 안 될까요?”
“아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하자. 일단은 나도 할 일이 있으니까.”
“약, 약속이라도 아니면… 오, 오늘도 혜, 혜영 씨랑… 만, 만나시나요?”
박혜영은 이지혜가 이쪽에 붙인 여자였다.
그 날 일이 있었던 뒤로 이지혜가 연결 고리가 될 수 있는 사람을 한 명 보내온 것.
여러 가지 일로 쓸모가 있을 거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아직까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는 박혜영을 통해서 집단의 상황이나 내부적인 이야기를 듣는 게 전부.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영 씨?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
“아. 잠시만 기다려 주시죠.”
‘박혜영’
좋은 타이밍인지 나쁜 타이밍인지 알 수가 없다.
다만 눈앞에 있는 정하얀의 표정 변화가 크지는 않다.
“아! 선, 선약이 있으셨네요. 저, 저는 그것도 모르고….”
“아니, 혜영 씨와 약속은 없었어. 무슨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네. 일단 자리 좀 비켜줄래?”
“아… 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정하얀과 이쪽으로 들어오는 박혜영.
부른 기억은 없는데 어째서 이곳에 온 건지 궁금해진다.
박혜영을 빤히 바라보는 정하얀의 시선이 느껴지기 시작. 질투심을 이용하는 것은 어느 정도 원하는 바이기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다.
“하얀아, 내일 또 보자.”
“아! 네!”
정하얀이 이쪽의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박혜영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조금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어서 말이에요.”
“어떤?”
“다음번에 사냥을 나가실 때는 이쪽에 있는 인원 몇몇을 차출해서 함께 나간다는 이야기요.”
“네. 맞습니다.”
“만약 괜찮으시다면 제가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꽤나 직접적이다.
자연스럽게 박혜영을 마음의 눈으로 한번 스캔해 봤지만 눈에 띄는 능력치나 특이사항은 없었다.
[플레이어 박혜영의 상태창과 잠재 능력을 확인합니다.]
[이름-박혜영]
[칭호-없습니다. 조금 더 노력하셔야겠네요.]
[나이-27]
[성향-계산적인 외교관]
[직업-백수입니다.]
[능력치]
[근력-10/성장한계치 영웅 이하]
[민첩-11/성장한계치 희귀 이상]
[체력-20/성장한계치 희귀 이상]
[지력-10/성장한계치 희귀 이상]
[내구-10/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행운-09/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마력-00/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총평-눈에 띄는 능력치나 특이사항이 없다는 한심한 소리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전체적인 밸런스가 무척이나 잘 잡혀 있습니다. 근접 직군, 혹은 궁수 같은 원거리 직군으로도 무난한 성장이 가능해 보입니다.]
성향은 계산적인 외교관.
자세히 읽어보지 않아도 어떤 성향일지 대충 예상이 간다.
나는 잠깐 동안 그녀를 바라본 이후에 말을 이었다.
“글쎄요. 일단은 하얀 씨를 먼저 추천했습니다만….”
“역시 남자는 어린 여자가 좋은 가 봐요? 제가 더 잘해줄 수도 있는데. 저런 꼬맹이는 재미없지 않아요?”
“어떻게 생각하셔도 별로 상관없겠지만 굳이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닙니다.”
“어떻게 안 될까요? 그게 우리 사이에 더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 사이가 정확히 뭔지 알 수 없다.
아무래도 이지혜에게 이쪽을 여러모로 도와달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쓸데없는 이야기를 들은 모양.
아무래도 박혜영에게는 내가 여자에게 관심이 많은 호색한 정도로 보이는 모양이다.
확실히 능력치도 나름 준수하고 잠재 능력도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
준수하게 성장한다면 이쪽에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계산적이다’라는 성향 자체는 마음에 안 든다.
다만 가는 게 있다면 오는 게 있다는 것 정도는 이해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유는?”
“어차피 싸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덕구 씨와 기영 씨가 이쪽에 들어온 덕분에 상황이 조금은 변했거든요. 현성 씨가 우리를 어떻게 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이제는 소수예요. 이곳은 여자도 남자처럼 강해질 수 있는 곳이고 여러 가지 시스템으로 기존의 신체 능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곳이니까요.”
“네. 맞습니다.”
“괴물을 무서워하는 건 모두가 마찬가지지만 자기들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어요. 본인들끼리 나가보겠다고 뭉치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고, 어차피 모두가 싸울 수 있는 상태가 된다면 기영 씨 입장에서도 자기 편이 하나 더 늘어나는 건 손해가 아닐 거예요. 만약 하얀 씨가 뭔가 특별한 힘을 얻어서 돌아온다고 한다면 이 현상은 가속화 될 거예요.”
“꼭 제가 편을 가르고 있다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제가 정곡을 찔렀나요?”
“아니요. 별로 신경 쓰지도 않습니다. 혹시 지혜 씨도 당신이 여기 온 일을 알고 있습니까?”
“아마 대충은? 지혜 씨 생각을 누가 알겠어요?”
“굳이 저를 찾아온 이유는….”
“말이 통할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정하얀 그 계집애만 편애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기도 하고 만약에 거절하신다고 하면 제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지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겠습니다.”
“역시 말이 통하네요.”
“현성 씨가 돌아오면 아마 작업을 시작할 것 같습니다. 제가 어떻게든 잘 말해보도록 하죠. 그렇지만 현성 씨가 무리라고 판단한다면 기각될 가능성도 있으니 너무 기대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이런 대답을 들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희망적이에요.”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 * *
“웃긴다. 정말.”
“쉿. 듣겠다. 얘.”
주변에서 목소리들이 들려왔지만 별로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영 오빠가 있는 곳이 신경 쓰인다.
“하얀 씨! 무슨 생각해요?”
“아, 아! 아니. 아무것도….”
“피곤하시면 쉬셔도 돼요. 몸 쓰느라 힘들었을 텐데… 풉. 여기서 일하시면 힘들지 않겠어요?”
“네? 네?”
“모르는 척하는 거 봐.”
“하지 말라니까.”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쪽을 향한 적의는 느껴졌다.
별로 피곤하거나 힘이 들지는 않았다. 무척이나 익숙한 일이었으니까.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두 언니들에 비해 자신은 바보 같았고 어딘가 굼뜨고 멍청했다.
항상 자신을 돌봐주던 첫째 언니와 무척이나 똑똑했던 둘째 언니, 아마 언니들이 어느 순간부터 연락을 끊은 것 역시 자신이 멍청했기 때문이리라.
“어휴… 냄새 나.”
“취향 한번 참 독특하네. 별로 예쁘지도 않은 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고… 그러니까 여우라는 거 아니겠어.”
“쉿. 그만하라니까. 듣겠다, 야. 달려가서 이르면 어떡하려고 그래?”
“뭐, 해보라지. 이미 질렸을지도 모르지. 아니, 분명히 질렸을걸?”
앞서 들려온 소리에는 괜스레 손이 파르르 떨려왔다.
‘기영 오빠.’
자신이 이곳에서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아까 전에 손을 잡고 있던 게 생각나 괜스레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질렸다?
오빠는 그런 마음으로 자신을 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조금 더 다른 이유다.
‘두근거렸지.’
분명히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여동생 같아서요.’
전에 들었던 말을 생각하니 미묘한 쾌감이 전해진다.
무척이나 생소한 감각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다.
망치질 하는 것처럼 가슴이 쿵쾅쿵쾅 뛰고 괜스레 다리를 베베 꼬게 된다.
자신조차도 감정을 제어하기가 힘들다.
‘내일이면 또 만날 수 있어.’
내일이면 또 만날 수 있다.
다시 한번 단둘이 이야기할 수 있고 귀여움 받을 수 있다.
옛날에 가족과 함께 있었던 것처럼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일종의 마약이다.
직업을 얻은 것을 숨긴 것도, 특성을 얻은 것을 숨긴 것도 전부 기영 오빠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길었으면 했기 때문.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가슴이 무척이나 아팠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혹시 자신을 찾지 않을까 겁이 난다.
들리는 목소리들을 애써 무시하며 괜스레 오빠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던 바로 그때였다.
“어머. 혹시 기다리고 있었어?”
방금 전까지 오빠와 함께 있었던 박혜영, 바로 그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