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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5화 (15/1,590)

# 15

회귀자 사용설명서 015화

각성

“걱정됐나 봐?”

“그… 그게….”

“웃긴다, 얘. 아닌 척하는 것 좀 봐. 내가 기영 씨한테 간 게 거슬리는 거잖아.”

“그,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혜영 씨. 오, 오빠가 뭘 하든 딱히… 저랑은 관, 관계없고….”

“표정은 다른데….”

“정, 정말이에요.”

“정말이긴. 웃기지 마, 이 계집애야. 네 앙큼한 속을 누가 모를 것 같아? 생긴 건 맹하고 멍청하게 생겨가지고 머리 하나는 잘 돌아간단 말이야. 여기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저런 대어를 건질 줄 누가 알았겠어? 혹시 그런 얼굴하고선 생각보다 기술이 좋은 건가…. 이해할 수가 없네. 아님 그 사람 취향이 이상한 건가. 왜 그런 사람 있잖아. 모자라 보이는 사람한테 관심가지는 사람. 풉.”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다.

“또 그 표정. 정말로 마음에 안 들어.”

“죄, 죄,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한데? 어차피 속으로는 전부 바보 취급하고 있으면서….”

“그, 그건 아니에요. 저, 저는 단지….”

“기영 씨가 정말 너를 좋아하는 것 같아? 그래서 너를 아껴주는 걸로 보여?”

“그, 그런 게….”

“착각하지 마, 멍청한 계집애야. 너는 정말로 운이 좋은 거야. 어쩌다가 첫 번째로 눈에 띄었을 뿐이고 어쩌다 보니까 얽혔을 뿐이야. 너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저런 타입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거든. 애초에 이기영 같은 인간은 사람을 잘 안 믿어. 쉽게 질려하고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면 가차 없이 버리지.”

“오, 오빠는 그렇지 않아요. 그리고….”

“그렇게 믿고 싶은 거겠지. 그렇게 믿는 게 너한테 도움이 되니까. 그런데 어쩌려나. 아마 내 말이 맞을 걸…. 지금 당장은 괜찮을지 몰라도 시간이 조금 지나면 달라질 거야. 내가 보기에는 너는 좀 질리는 타입 같거든. 풉. 그런 소리 안 들어봤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무척이나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머리가 굉장히 뜨겁다. 입으로는 무어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는다.

다만 몸이 계속해서 부들부들 떨렸다.

“그런 표정은 처음 보는 거 같은데 혹시 화났어? 정곡을 찔렀나 봐? 너, 항상 버림받는 쪽이었지?”

“아, 아, 아, 아, 아니에요.”

“아니긴. 얼굴에 다 적혀 있는데. 아니면 많이 뺏기게 되는 쪽인가? 어느 쪽이든 비참하기는 마찬가지네. 있잖아. 네가 언제나 첫 번째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 저기 네가 보지 않는 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 것 같아?”

천천히 박혜영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이윽고 귀에 살짝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자신도 모르게 큰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기영 씨 말이야… 생각보다 괜찮더라.”

“거, 거짓말 하지 마세요!”

“어머, 들켰네.”

눈에서는 자꾸만 눈물이 차오른다.

어떻게, 무어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자꾸만 뭔가가 목을 막고 있는 것 같다.

저 여자의 말이 맞다.

부모님에게도 언니들에게도 버림받았다.

함께 지냈던 친구들과도, 좋아하는 사람과도 하나같이 전부 멀어졌다.

어쩌면 자신은 정말로 질리는 타입일지도 모른다.

항상 실수만 저지르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따돌림은 일상이었고 혼자 있는 시간이 더욱더 편하다.

그래도.

‘오빠는 아니야.’

오빠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다. 만나 봤던 사람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가족 같다고 했다. 여동생 같다고 해줬고 아껴주고 싶다고 말했다.

항상 매일 신경 써주고 자신을 돌봐줬다. 덕구 씨도 그렇다고 이야기해 줬다.

오빠가 나를 아낀다고 매일 매일 이야기해 줬다.

실수해도 괜찮다고 더 잘할 수 있다고 항상 응원해 줬다.

바보 같은 질문에도 웃으면서 대답해 줬고 조용히 지켜봐 주었다.

“그, 그럴 리가 없어요.”

“그건 네 희망사항인 것 같은데? 솔직히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 내가 경고 하나 할게, 동생. 원하는 게 있으면 버림받기 전에 빨리 빨아먹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전부 빼앗겨 버릴걸?”

“그, 그, 그만 하세요. 오, 오빠한테 그런 식으로….”

“싫어.”

히죽이는 입가의 미소를 보는 순 간, 어깨를 툭 하고 밀치는 감각이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몸이 뒤로 밀쳐진다.

땅에 엉덩방아를 찧고 뒤를 돌아봤지만 이미 저 멀리 향하고 있는 박혜영의 뒷모습만이 시야에 비친다.

동시에 여기저기에서 목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꼴좋다.”

“방금 뭐야?”

“아무래도 우리 순진한 창녀는 곧 버림받는 모양이네.”

“그만해. 듣겠다, 얘.”

“뭘 그만해? 방금 이야기 못 들었어? 조만간 또 혼자가 될 텐데… 그러면 또 누구한테 붙으려나. 아! 이제는 붙을 사람도 없으려나. 차라리 석우 씨한테 붙는 게 좋았을 텐데… 지 주제를 알아야지. 저러니까 혼자지.”

“이제 쓸쓸해서 어떡하나.”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어.’

오빠가 나를 버릴 리가 없다.

항상 같이 있어 준다고 말했던 오빠가 그렇게 자신을 버릴 리가 없다.

가족 같다고 말해줬던 오빠가 나를 버릴 리가 없다.

‘글쎄. 정말로 그럴까?’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그 여자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귓가에 울려 퍼진다.

“그럴 리 없어!”

“뭐야? 방금?”

“쟤 방금 소리 지른 거 맞아? 정말로 화났나본데….”

“이제 슬슬 본성 나오는 거지, 뭐. 킥.”

그럴 리가 없다. 오빠가 나를 버릴 리가 없다.

오빠는 다른 사람들과 틀리다. 항상 따뜻했고 항상 다정했다.

‘언니도 널 버렸잖아.’

“아, 아니야.”

‘아니긴 부모님도 널 버렸고.’

“그런 게 아니야. 오빠는 달라. 오빠는 달라.”

틀림없이 다를 것이다.

가슴을 진정시키기가 굉장히 힘들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다.

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눈에서는 눈물이 차올랐지만 뺨을 타고 흘러내리지는 않았다.

주위에서 자신을 비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저런 소리는 별로 신경 쓰이지도 않는다. 그것보다는 조금 더 다른 게 필요했다.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오빠가 있는 곳이다.

‘잠깐이면 되겠지? 모르는 게 있다고 하고 찾아가면 만나줄 거야.’

분명히 만나줄 것이다.

조금이라도 얼굴을 봐야지 진정될 것 같은 느낌.

정신없이 발걸음을 옮기던 그때 어디에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지혜의 목소리였다.

“잠깐 모여주세요, 여러분.”

“네.”

“내일 현성 씨와 덕구 씨, 기영 씨가 밖으로 나갈 때 이곳에 있는 인원을 차출해서 나갈 계획이라고 하시네요. 자세한 이야기는 현성 씨한테 들으면 될 것 같고 오늘 지명 받은 사람은 나름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함께 나간다고 들은 적이 있다.

조금 더 같이 있을 수 생각이 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째서 저걸 잊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이제는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조금 더 늘어날 것이다.

‘다행이다.’

고개를 돌리자 이지혜의 뒤에서 김현성과 박덕구, 기영 오빠가 함께 나오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오빠.’

평소와는 조금 다른 진지한 얼굴이지만 뭔가 안정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심장은 쿵쾅쿵쾅 뛰었지만 머리가 아프거나 어지럽지 않았다.

아까 느꼈던 답답한 기분은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 전부 해소되어 버렸다.

이해할 수 없는 기분에 괜스레 얼굴이 붉어졌다.

‘이곳을 봤어.’

틀림없이 이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조금은 웅성거리는 소리가 잦아들자 김현성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일단 바쁘신 와중에도 이렇게 여러분을 모이게 해 죄송합니다. 여러분도 대충 인지하고 계시겠지만 이곳에서 계속해서 생존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식량 배급은 나날이 줄고 있고 생존자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지요. 스타트 포인트에서 가져온 식량과 식수가 있지만 그 양이 넉넉하지는 않습니다. 저희는 조금 더 활동 반경을 넓혀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

“싸울 수 있는 인원이 지금보다 더 늘어야 합니다. 물론 여러분이 그 괴물들을 무서워하고 있다는 것은 압니다. 싸움에 익숙하지 않으신 분들도 있고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으신 분도 계시겠지요. 그렇지만 일단 움직여야 합니다. 안 좋은 말씀을 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모두 당할 겁니다. 해서 저희는 순차적으로 여러분들과 함께 밖으로 나가는 것이 옳다고 판단을 내렸습니다.”

김현성 다음으로 입을 연 것은 기영이 오빠였다.

“기영 씨.”

“네. 뭘 무서워하고 있는지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싸워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여기는 저희가 있던 지구가 아닙니다. 상태창이나 시스템 특성이나 직업 같은 것들이 뭘 뜻하는 건지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불꽃.”

손바닥에서 불꽃이 화르륵 올라오는 모습.

주변 사람들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어떻게 된 건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상태창에서 가리키는 제 직업은 마법사입니다. 아직은 다룰 수 있는 마법이 많지 않지만 저 역시 여러분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놈들이 무서워 도망치고 녀석들과 마주치기 싫어 숨어 다니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분명 운이었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면, 얻을 수 있습니다. 집단이 강해지면 우리들 모두가 강해질 수 있고 종국에는 이곳을 탈출할 수도 있을 겁니다. 조금 더 주체적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오오오오….”

“일단은 시범적으로 두 사람을 함께 데리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하얀 씨.”

“아….”

“그리고 혜영 씨.”

“네. 잘 부탁드려요.”

“일단은 두 분을 데리고 갑니다. 안정적으로 두 분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게 되면 다시 조를 나누고 다음 사람을 데리고 갈 겁니다. 질문 있습니까?”

“무슨 기준으로 뽑힌 건지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가능성. 그리고 여러분의 불안감을 해소시키기 위해서 이기도 합니다.”

“저희끼리 사냥을 나가는 건….”

“여러분의 자유 의지를 막고 싶지는 않지만 추천하고 싶지는 않군요.”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박혜영, 그 여자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다른 사람도 함께 간다곤 들었지만 저 여자도 함께 가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언니, 축하해요.”

“다치시면 안 돼요.”

“현성 씨, 기영 씨, 덕구 씨도 함께 가니까 아마 괜찮을 거야. 조금 무섭기는 하지만 이겨내야지.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나면 좋은 거니까.”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축하받고 있다. 부럽지는 않다. 다만 기분이 괜스레 이상해진다.

‘빼앗지 마.’

서둘러 다시 단상 위를 올려다보니 오빠 역시 박혜영을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입가에는 살짝 미소가 걸려 있다.

아까 들었던 목소리가 계속해서 떠오르는 것은 물론 호흡이 계속해서 가빠진다.

‘질리기 쉬운 타입이니까.’

박혜영이 단상 위로 달려가 다른 이들에게 악수를 건넨다.

‘버림받을 거야.’

‘빼앗겨 버릴걸?’

‘언니들도 너를 버렸잖아.’

‘부모님도 말이야.’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너는 결국….’

‘그만….’

‘버림….’

‘싫어.’

그렇게 오빠가 박혜영의 손을 맞잡는 순간.

안에서 뭔가 무너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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