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회귀자 사용설명서 017화
인간이 다섯이나 모이면 꼭 하나는 쓰레기가 있게 마련이다(2)
“거, 오늘따라 놈들이 보이지 않는 것 같지 않소. 형님?”
“그동안 현성 씨가 이곳 주변을 정리해 놨었으니까. 아니라면 다른 쪽으로 몰려갔을 수도 있겠지.”
“다른 곳에 생존자들이 있다는 소리요?”
“글쎄….”
박덕구 녀석이 궁금한 듯이 중얼거렸다.
단순한 추측일 뿐이지만 아예 말이 안 되는 소리는 아니다.
이곳이 이 정도로 한산한 것을 보면 다른 지역에서 큰 소란이 일어났고 그곳으로 놈들이 몰려갔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김현성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았지만 당연히 박혜영과 정하얀을 데리고 가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놈들의 규모나 위치를 모르는 상태에서 함부로 움직이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국 김현성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이곳에서 야영을 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네. 그렇게 하도록 하죠.”
대충은 예상하고 있던 바, 장소를 찾고 움직이고 쉴만한 캠프를 꾸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물론 텐트 따위는 없지만 적당히 밀폐된 공간은 그나마 안정감을 심어준다.
“첫 번째로는 혜영 씨와 기영 씨가 그리고 저와 하얀 씨, 마지막도 제가 덕구 씨와 함께 서겠습니다.”
“괜찮겠소?”
“네. 충분합니다.”
굳이 사서 고생하겠다는데 막을 이유는 없다.
‘첫 번째는 나쁘지 않지.’
체력 같은 능력치가 높은 저들과는 달리 거지같은 능력치를 가지고 있는 나는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휴식이 필요하다.
김현성의 체력 능력치나 마력 능력치를 생각한다면 하룻밤 새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닐 것이다.
“들어가셔도 됩니다.”
“형님, 고생하쇼.”
“수, 수고하세요.”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대충 고개를 끄덕인다.
정하얀을 비롯한 나머지 인원들은 천천히 안쪽의 석실로 들어간 이후에 나는 천천히 박혜영을 볼 수 있었다.
뭔가 얼이 빠진 듯한 느낌.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거 같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충격이 컸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괴물이 저질렀던 비명이나, 죽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 창을 내질러야 한다는 현실이나 손에서 느껴지는 감촉까지.
소름이 돋는 것이 당연하다.
이미 스타트 포인트에서 한 번 느꼈던 감정을 다시 느꼈을 수도 있고 어쩌면 혈액이나 놈의 내장이 튀어나오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을 수도 있다.
어차피 다음 불침번이 오기 전까지는 시간도 많이 남은 상황.
몇 마디 건네 위로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네?”
“어차피 이곳으로 떨어진 이상 한 번은 겪어야 했을 일입니다.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경험했다고 생각하시면 편하시겠네요.”
“네.”
처음과 비교하면 기가 꽤나 죽어 있는 모습.
“처음에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들 그럴 겁니다. 아마 적응하시면 편해지실 겁니다.”
“기영 씨는 어떠셨나요?”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움직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생각밖에 없어서 무작정 돌로 놈을 내려찍었죠. 무섭기는 했습니다만… 필요했다고 생각합니다. 손은 물론 온몸이 괴물들의 내장과 뇌수로 범벅이 되어버려 냄새 때문에도 고생했죠.”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반쯤은 도박이었을 것이다.
박덕구가 나를 두고 도망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 놈을 움직이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아드레날린이 머리끝까지 올라왔었던 상황이었다.
“아…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제가 우습네요.”
“뭐, 확실히 이쪽에 도움을 주니 어쩌니 같은 소리를 하시기는 했죠.”
기대했던 만큼 실망도 조금 있다.
“그건 거짓말은 아니에요. 불러주신 만큼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도 그럴 줄 알았다.
성향도 나쁘지 않았고 능력치도 준수 했다. 은혜를 베풀면 그만큼 이쪽에 돌아올 게 있다고 생각해서 무리하게 한 명을 더 집어넣었는데 뚜껑을 까보니 속빈 강정.
나와 박덕구, 김현성이 아무렇지도 않게 바깥에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니 우리가 하는 일이 쉬워보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 입장에서는 굳이 박혜영에게 투자할 이유는 없다.
박덕구라는 든든한 녀석이 있기도 했고 조금 불안하기는 하지만 정하얀이라는 마법사와 회귀자 김현성과도 끈을 만들었다.
구태여 박혜영을 도와주려고 했던 건 혹시나 보험을 던져본 것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자꾸만 이런 식으로 겁을 집어 먹는 건 그녀에게도, 나에게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아까 뒤에서 잡아주셨을 때 조금 기뻤어요.”
그러고 보니 바보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었던 모습도 기억에 남는다.
정신이 없어 쌍욕도 내뱉었던 것으로 기억.
그렇지만 대충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는 없었다.
“정신이 없어서 조금 험한 소리를 했던 것 같은데… 신경 쓰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네. 물, 물론.”
“그리고, 도와주는 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다음은 혼자서 하셔야 할 겁니다.”
“네….”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박혜영이 시야에 비친다.
뭐, 눈싸움이라도 하자는 건지 알 수가 없을 지경.
침묵이 꽤나 길어진다. 시간이 조금 지난 이후에 다시 한번 입을 열려고 했을 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오빠….”
“기영 씨, 혜영 씨. 교대할 시간입니다.”
김현성과 정하얀이 바깥으로 나온 것이다. 시간이 이렇게 오래 지났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조금 일찍 나오셨네요. 조금 더 주무셔도 될 텐데.”
“아닙니다. 마침 잠에서 깨버려서… 아침에 깨워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현성 씨.”
김현성과 조금 멀찍이 떨어져 있는 정하얀에게 다가가 살짝 머리를 쓰다듬으니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붉히는 것이 보인다.
평소의 정하얀이다.
박혜영을 바라보는 눈동자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을 보니 저번에 봤던 것은 어쩌면 이쪽의 착각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 고생해, 하얀아.”
“네? 네… 네, 오빠!”
조금 목소리가 크다. 본인도 깜짝 놀랐는지 입을 막고 있는 모습은 조금 귀엽게 보였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이후에는 곧바로 안쪽으로 자리를 옮기자 드르렁거리며 코를 골고 있는 박덕구가 한눈에 들어왔다.
‘세상 편하게 자네.’
이런 환경에서 저렇게 잘 수 있다는 것도 어떻게 생각하면 축복일 것이다.
박혜영은 미리 비치된 자리에 가서 살짝 몸을 눕혔고 나 역시 박덕구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괜스레 생각이 많아진다.
이 사냥이 끝난 이후에 변화할 집단이나 김현성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말로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은 있는지.
공략이라고 한다면 어떤 식으로 어떻게 진행되는 것 따위의 일 말이다.
이미 직업을 얻은 정하얀이나 김현성의 회귀 사실, 과거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튜토리얼의 끝난 이후에 이야기나 이지혜와는 앞으로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할지….
이대로 잠을 자지 못하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도 해봤지만 내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애초에 조금 많이 걷기도 했고 정신적으로 조금 스트레스를 받은 만큼 금방 눈이 감겼다.
‘몇 시지.’
조금 불편한 잠자리 때문인지 중간 중간 깼다.
박덕구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김현성과 함께 불침번을 서기 위해 밖으로 나가는 모양이다.
박혜영이 잠깐 몸을 뒤척이는 소리나 정하얀이 다시 안쪽으로 들어오는 소리 역시 들린다.
“안녕히 주무쇼, 누님.”
“덕, 덕구 씨도 고생하세요.”
뭔가 조금 더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 같기는 하지만 다시 한번 스르륵 눈이 감겼다.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것과 동시에 다시 한번 의식이 흐릿해졌다.
다시 한번 깨어났던 것은 입술에 뭔가 이상한 감촉이 느껴졌을 때.
그리고 무언가가 손을 잡는 감각이 느껴졌을 때였다. 순간적으로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몸이 잘 움직여지지가 않는다. 아니, 그것보다는 누군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들려오는 것은 정하얀의 목소리.
무척이나 작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였다.
“절…… 안…….”
잠이 덜 깼는지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 않는다.
당연하지만 지금 나를 보는 사람이 누구인지 눈치채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흐릿했던 정신이 또렷해진다.
수마가 한순간에 달아난 것은 당연지사.
왼쪽 눈을 살짝 떠 위를 바라보니 조용히 이쪽을 내려다보는 검은 그림자가 한눈에 들어왔다.
뭔지는 모를 상황이지만 이런 상황에서 몸을 일으킬 만큼 멍청하지는 않다.
지금 정하얀이 작게 속삭이는 것이 내게 말을 거는 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애써 눈을 감은 뒤에도 자꾸만 소리가 들려온다.
스르륵 몸을 움직이는 소리, 옷깃이 스치는 소리, 심지어는 입술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진다.
“하아… 하아….”
‘이게 뭐야.’
지금까지 이렇게 당황스러웠던 적이 없다.
특이한 성벽이라도 있는 건지 아니면 이쪽이 너무 정하얀을 몰아붙인 부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가 이쪽에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
“하아….”
그것도 조금 과하게 느껴질 정도로 호감을 가지고 있다.
일단은 쾌재를 질러야 함이 옳다.
애초에 거의 최우선 사항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이 바로 정하얀과 친분을 쌓은 일이었던 만큼 나쁜 결과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쪽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포지션은 오빠와 동생.
결코 이런 상황을 원한 것은 아니다.
시간이 조금 지난 이후에야 정하얀은 이쪽에 조금 떨어졌다.
잠이 오지 않는 건지 자꾸만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궁금함에 살짝 눈을 뜨자 이번에는 조용히 박혜영을 내려다보고 있는 정하얀의 뒷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
한참이나 박혜영이 자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모습.
미동도 없이 한 자리에 서서 빤히 그녀를 쳐다보는 느낌이었다.
‘몽유병이야, 뭐야.’
어디서부터 일이 꼬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일이 꼬였다.
애초에 직업을 얻은 이후에 그 사실을 숨긴 것도 그렇고 박혜영이 함께 원정에 떠나기로 한 당시에 그녀를 바라보던 표정도 마음에 걸린다.
방금.
그리고 지금 같은 이상 행동에는 틀림없이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하얀이 이쪽으로 고개를 휙 돌린 것은 그때.
순간적이지만 눈이 마주친다.
한 번 느껴본 적 있는 감각이었다.
등 뒤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름이 돋아났다.
‘개….’
반사적으로 눈을 감아보지만 들켰는지 들키지 않았는지 알 수가 없다.
아니, 그보다는 어째서.
‘내가 겁먹고 있는 거지?’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움츠리게 된다.
마력의 영향? 아니면 만화에서나 나오는 살기?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번에도 보여준 적이 있는 정하얀의 저런 모습이 나를 옭아매는 것만 같다.
일단 아무 말이 없는 것을 보니 내가 깨어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갑작스레 무서울 정도로 조용해진 장내는 뭔가가 이상하다.
‘제기랄….’
도무지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아까처럼 숨을 마시거나 내뱉는 호흡 소리도, 옷깃이 스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박혜영의 숨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오기는 하지만 정하얀의 입에서 나오고 있는 소리는 아니다.
잠을 청하려고 하고는 있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는 게 문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누군가 조용히 몸을 눕힌 것이 느껴진다.
“…….”
“…….”
아마도 정하얀일 것이다.
마치 1초가 1분 같은 느낌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제대로 알 수 없었을 때, 불행인지 다행인지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날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