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회귀자 사용설명서 018화
인간이 다섯이나 모이면 꼭 하나는 쓰레기가 있게 마련이다(3)
일어나라는 목소리가 이렇게 기분 좋게 들린 적은 처음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가장 처음 일어난 것은 박혜영.
그 뒤로는 정하얀이 몸을 뒤척이는 소리도 들렸다.
언제쯤 일어나는 게 좋을까 생각하고 있던 찰나에 내 어깨를 툭툭 건드리는 손길이 느껴진다.
“형님.”
‘박덕구, 나이스.’
마침 나쁘지 않은 타이밍.
잠을 설쳐서 그런지 갑작스레 피곤함이 몰려들었지만 일단 눈을 살짝 뜨고 상체를 일으켰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오늘은 조금 일찍 움직일 계획인가 보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간 이후에 사냥을 마치고 쉼터로 돌아가기로 했소.”
“괜찮네.”
일부로 정하얀에게서 눈길을 돌리지 않고 있다. 피하는 게 더 어색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살짝 정하얀을 바라보니 환하게 웃으며 이쪽을 보는 그녀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어제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
동일인물로 보이지도 않는다.
‘어느 게 진짜야.’
저 표정이 진짜인지, 아니면 어젯밤 내가 본 표정이 진짜인지는 알 수 없다.
일단은 조금 더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나 역시 그녀를 향해 작게 웃어준 이후에 곧바로 몸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피곤해.’
밤잠을 설친 것처럼 정신이 멍하다.
밖으로 나가자 김현성이 이쪽을 바라보며 입을 여는 것이 보였다.
“피곤해 보이시는군요.”
“조금은, 그래도 괜찮습니다.”
“오늘은 조금 안까지 들어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근방에 놈들도 별로 없는 것 같고. 쉼터에 있는 이들이 조금 걱정되기는 하지만 이 정도라면 아마 안쪽이 잘못될 일은 없을 것 같군요. 다만 놈들의 숫자가 조금 많다고 판단되면….”
“네. 물론 바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합리적인 판단이다.
“그나저나 어느 쪽으로….”
“왼쪽 길은 지난밤에 제가 간단하게 체크를 했습니다만 이곳과 별로 상황이 다르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불침번을 2번 서는 것도 모자라 탐색까지 하고 오셨단다.
“고생하셨군요.”
이렇게 열심히 움직여주는 일꾼들이 있으면 나 같은 사람이야 즐겁다.
어쩌면 오른쪽에 무언가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직은 시기상조.
“혜영 씨와 하얀 씨는….”
“저도 준비됐어요.”
“포지션은 어제처럼 놈들을 발견하면 하얀 씨가 혜영 씨 대신 나서면 되실 겁니다. 그럼 출발하도록 하죠.”
“네.”
조금은 피곤한 행군길이 될 것 같았다.
일단 가장 걱정되는 것은 정하얀의 존재다.
뭐가 뭔지 모를 상황이지만 최근에 정하얀이 보여주는 행동은 다분히 비상식적이다.
뭐라고 콕 집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누가 봐도 이상해 보인다.
내가 생각하던 그녀의 모습과 조금 거리가 먼 것 같았다.
무엇이 원인인지 파악하는 것이 먼저. 아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조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질투심?’
원인이 질투심이라고 하기에는 나와 정하얀이 지내온 시간이 너무 짧다는 것이 문제다.
인간관계라는 것이 항상 지내온 시간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함께한 시간이 중요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나와 정하얀을 둘러싼 상황의 특수성이라는 것이 있기는 있다.
이곳은 카페나 레스토랑이 아니다.
굳이 예를 들자면 싸구려 B급 영화에서 위기에 빠진 남녀가 짧은 시간동안 사랑을 느끼는 것 같은 감정.
어쩌면 그녀가 가지고 있는 감정의 정체가 그것일지도 모른다.
불현듯 떠오르는 것은 정하얀의 과거.
과거를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합리적인 추론이 가능할 것 같았다.
부모님은 계시지 않고 언니들과는 연락이 끊긴 지 오래.
만약에 본인이 가족들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이쪽에 조금 더 기대고 싶은 마음도 이해가 간다.
그녀를 둘러싼 환경은 그녀에게 친절하지 않았을 테니까.
‘단순한 추론.’
그렇지만 모종의 이유로 나는 그녀에게 의지할 수 있는 끈이 되어버렸다.
항상 친절하고 믿어주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 감정이 좋아하는 감정을 넘어 집착으로 발전한 형태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내가 노린 것 역시 그녀의 정신적 방파제 역할이었으니까.
마음에 빈틈이 있는 인간은 조금 더 끌어들이기 쉬운 법이다.
‘시험해 볼까.’
고전적이지만 사용해 볼 만하다.
나란히 길을 걸어가는 와중에 박혜영의 어깨를 살짝 끌어당기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심.”
“아… 네.”
조금 긴장한 듯한 모습.
돌에 걸려 넘어질 뻔한 걸 도와줬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뭔가 감사의 표현을 하려고 하는 것 같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그녀의 반응이 아니다.
곁눈질로 정하얀의 눈을 바라본다.
박혜영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정하얀이 보인 것은 당연지사.
김현성이나 박덕구는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특성의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 눈에는 확실히 보인다.
뭐라고 형용하기 힘든 감정이 정하얀의 눈 속에 들어가 있었다.
‘이건 이용할 수 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적의는 나를 향한 것이 아니다.
평범한 질투라고 하기에는 정도가 조금 지나친 것 같기는 했지만 정하얀의 성정을 생각해 본다면 수습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다.
당근과 채찍을 적당히 던져 준다면 정하얀은 이쪽을 위해서라면 몸도 던질 수 있는 충실한 가족이 되어줄 것이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걷자 어느새 꽤나 먼 거리를 이동한 느낌이 들었다.
“근처에 온 것 같군요. 여기서부터는 조금 더 조심히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큼. 알겠소, 형씨.”
아마 여기서부터가 김현성이 미리 봐둔 영역인 모양이다.
확실히 이전과는 냄새가 달랐다.
놈들의 몸에서 나는 특유의 악취가 이곳저곳에 베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저 멀리서 느껴지는 희미한 마력이다.
어떤 종류인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히 뭔가 이질적인 것이 느껴졌다.
어쩌면 김현성이 원하는 건 이것 일지도 모른다.
“뭔가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요? 형님. 놈들이라도 보이는 거요?”
“앞쪽에서 희미한 마력이 느껴진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마력이라는 게 없으니 답답하구만. 형씨는 느낄 수 있겠소?”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기영 씨는 마법사인 만큼 저희보다는 조금 더 이질적인 감각에 익숙할 겁니다. 일단은 확인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군요. 이곳을 공략하는 데 어떤 힌트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김현성은 확실히 연기에는 재능이 없다.
아무래도 앞에 있는 희미한 마력의 정체가 던전 공략과 관련이 있는 모양이다.
“뭐, 어차피 가는 길이기도 하고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 내가 먼저 가보겠소.”
“조심.”
조심할 필요도 없다.
애초에 뭔가 이상하다는 걸 감지했다면 김현성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을 테니까.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자 내가 느꼈던 마력의 정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계단.’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군요.”
말 그대로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다. 이 던전이라는 곳이 어떤 식으로 굴러 들어가는지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고개를 끄덕이는 김현성을 바라보니 이 작위적인 설정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
어처구니가 없지만 맞춰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뻔한 설정이지만 아래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난이도가 올라간다는 건가? 아마 공략에 관계가 있을 것 같습니다.”
“으음, 그런 거요? 형님.”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스타트 포인트가 있는 이 지점에서는 굳이 공략 힌트라고 할 만한 걸 찾을 수 없었으니까. 넓은 이곳에 괴물만 던져준 이후에 던전을 공략하라고 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지. 아마 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부터가 시작일 확률이 높아.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곳보다는 단서가 많겠지.”
내 말을 듣고 김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빙고.’
“지금 당장은 무리가 있으니까 일단은 이곳을 기억해 놓은 이후에 다음에 내려가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오늘은 공략을 위해서 찾아온 건 아니니까. 어쩌면 지하에는 조금 더 우리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게 있을지도 모르고. 괴물의 종류도 조금 다를 수도 있을 테니.”
“지금보다 더 짜증나는 놈들이 나오면 정말로 싫을 것 같소.”
이하 동문이다.
어쨌든 간에 김현성은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지하의 입구를 알리는 것에 성공했다.
이 정도라 하더라고 녀석에게는 조금 큰 성과라고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당장 급한 것은 정하얀과 박혜영의 성장, 싸울 수 있는 인원이 준비가 되어야 아래로도 내려갈 수 있다.
“길은”
“대충 머릿속에 있어.”
“그럼 이제부터는 이곳을 중심으로 놈들을 찾으면 되는 거요?”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일단은 조금 떨어진 지점부터 시작하도록 하죠.”
“알겠소, 형씨.”
어제처럼 눈에 불을 키고 놈들을 찾지 않아도 가까운 곳에서 놈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아마도 이곳을 중심으로 녀석들이 조금씩 분포되어 있는 모양이다.
가까운 곳에 있는 괴물 세 마리.
살짝 김현성을 바라보자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덕구 씨가 두 녀석을 맡아주시면 기영 씨가 빠르게 그중 한 녀석을, 나머지 하나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녀석을 교재로 사용하겠습니다. 혜영 씨와 하얀 씨는 기영 씨와 비슷한 위치에 서 계시면 됩니다.”
“네.”
“알겠소.”
입술을 꽉 다문 이후에 박덕구와 이기영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일단은 박덕구에게 어그로가 끌리게 할 모양인지 박덕구를 먼저 보내는 모습.
나 역시 잔뜩 긴장한 정하얀과 박혜영을 사이에 두고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한 녀석을 방패로 밀어내고 한 녀석은 가죽을 둘둘 말은 팔로 쳐내는 박덕구의 뒷모습이 보였다.
김현성은 다소 여유 있어 보이는 모습으로 한 녀석을 향해 달려가 놈의 팔을 베어내는 데 성공했다.
‘엄청 빠르네.’
민첩 수치가 높아 어느 정도 빠를 거라고 예상했지만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그사이에 나는 창끝에 조금의 마력을 담아 박덕구가 붙들고 있는 녀석에게 창을 내질렀다.
푸욱! 하는 소리와 함께 혈액이 튀지만 신경 쓸 여유는 없다.
‘아직 안 죽었어.’
다시 한번 창을 찔러 넣으려고 했을 때 옆에서 박혜영이 뭐라도 해보겠다는 듯 창을 내지른다.
‘나쁘지 않네.’
일단은 본인이 할 수 있다는 의지가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김현성 쪽은 굳이 쳐다볼 필요도 없다.
아마 이상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 적당히 힘을 빼며 상대하려고 할 테니까.
남은 것은 교재로 사용할 놈.
박덕구가 놈을 잡아놓으려고 몸을 움직이기도 전에 조금 흥분한 것처럼 보이는 박혜영이 창을 내뻗기 시작.
‘멍청한 짓.’
누가 봐도 멍청한 짓이다.
예상대로 창이 빗겨나가면서 남은 괴물 하나가 박덕구의 범위에서 벗어난다.
“앗! 죄, 죄송합니….”
“개….”
인간이 다섯 명이나 모이면 꼭 하나는 쓰레기가 있게 마련.
“덕구야.”
어딘가에서 들어본 적이 있는 이 명언은 언제나 내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다.
“꺄아아아아악!!”
‘망할 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