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회귀자 사용설명서 021화
다행이다
“하얀아?”
“오, 오빠.”
‘이럴 줄 알았어….’
눈으로 보이는 현장은 생각보다도 더욱 참혹했다.
조용히 웃고 있는 정하얀과 팔과 다리가 잘린 채로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박혜영.
꿈틀거리고 있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헛구역질이 나올 뻔했지만 억지로 다시 집어넣었다.
흔들리는 정하얀의 눈동자가 보였기 때문이다.
마력으로 만들어진 벽을 봤을 때 이상한 불안감이 감돌기는 했지만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이다.
‘어떻게… 해야 되지?’
어떤 식으로 방향을 잡아야 할지 무척이나 애매하다.
일이 터지기 전에 말리는 것이 최고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해 빠르게 정하얀을 찾아 나선 보람이 없다.
‘박덕구라도 있었다면.’
녀석은 마력을 느끼지 못한다.
왼쪽 길을 둘러봐 달라고 말한 이후 혼자 이곳에 온 것이 통한의 실수다.
“읍… 읍!”
그 와중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법에 입이 막힌 채로 도움을 청하고는 박혜영의 모습은 기가 찰 지경이다.
정하얀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슬쩍 정하얀을 바라보니 혼이라도 빠져나간 것 같은 표정이 시야에 비쳤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녀 역시 사고가 정지된 것이다.
사실 나 역시 그녀와 별반 다르지 않다.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었으니까.
‘도망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것이 옳은가.’
한 번쯤은 생각해 볼 수밖에 없는 문제.
위험을 느낀 신체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돌리라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뇌는 그 기대를 배신했다.
이해득실을 따지기 시작한 것이다.
정하얀은 틀림없이 이쪽에 호감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그 감정은 이미 옛날 옛적에 뛰어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혜영을 죽이려고 한 이유 역시 어쩌면 나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 틀림없이 관련이 있다.
어쩌면 평소에 박혜영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녀가 지금까지 보인 반응을 바탕으로 추론해 본다면 답은 하나다.
이곳에서 내가 정하얀을 기피하는 모습을 보이면.
어쩌면 그녀의 화살이 내게 향할 수도 있다.
내가 알고 있지도 않은 마법을 펑펑 써대는 미친 여자와 드잡이질을 하는 건 이쪽에서 사양이다.
이렇게 계속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도 무척이나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지경.
결국에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다.
“혜, 혜영 씨는 어떻게… 된 거야?”
“네?”
제발 내가 주는 기회를 배신하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제발 정답을 말해줬으면 좋겠다.
더 이상 이쪽이 어떻게 도와줄 수가 없다.
“팔이랑 다리가 어째서… 어떻게 된 거지?”
손으로 입을 막는 것도 잊지 않는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도 빼놓을 수 없다.
정하얀의 표정이 조금 밝아진 것은 바로 그때. 예상과는 다른 내 반응에 자신이 상상하는 최악의 상황은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 일이 자신이 벌인 일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다.
말할 수 있는 선택지는 아주 간단.
그녀라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저도 자세히는 잘 모르겠어요. 오빠… 갑, 갑자기….”
떨리는 손과 발, 부들거리는 입술과 떨리는 목소리.
그녀는 공포에 질린 것이 아니다.
이 일을 자신이 벌였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거짓말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나오는 반응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하얀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간다.
“눈을 떠 보니 그, 모두와 떨어져 있어서 어떻게 된, 된 건지는 자세히 모르겠어요. 제가 여기에 왔을 때는 혜영 씨가… 이, 이렇게.”
‘나쁘지 않아.’
나쁜 변명은 아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정하얀의 손을 잡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
“어디 다치지는 않았지?”
“오, 오빠.”
어딘가 다치는 것을 염려해야 하는 것은 나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린다.
혹시라도 그녀가 외워놓은 주문이 없는지 자꾸만 체크하게 되는 것은 물론, 손에 쥔 창에도 힘이 들어간다.
그 와중에도 박혜영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정하얀을 바라보는 중이다.
“읍! 읍! 읍! 읍읍! 읍!”
대충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유추해 볼 수 있다.
‘도망쳐.’
혹은.
‘살려주세요.’
후자일 확률이 높지만 안타깝게도 이쪽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정하얀을 적대하거나 도외시하는 것은 자살행위에 가깝다.
그녀의 정신은 틀림없이 마모됐고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망가졌다.
이쪽에 호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 집착이 타인에 대한 분노, 살인으로 이어진 만큼, 내가 그녀를 부정했을 때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가 없다.
아마 그 분노가 여기까지 뻗쳐 나오리라.
다루기 힘든 폭탄이지만 이쪽에 호감을 가지고 있는, 잘 써먹을 수 있는 인재와 성장 가능성이 적은 쓰레기 중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가.
답은 뻔하다.
누가 봐도 정하얀 쪽으로 붙는 것이 합리적이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살릴 수 없어.’
천천히 죽어가는 박혜영을 살릴 능력이 없다.
만약 그녀가 정말로 쓸 만한 패라고 하더라도 지금은 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
그녀의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이쪽 역시 필사적이다.
“읍! 읍! 읍읍! 읍읍읍! 읍!”
살려달라고, 제발 버리지 말아달라고 이쪽을 간절히 보는 눈을 외면하기 어렵다.
나는 급하게 그녀에게 다가가 옷으로 상처 부위를 동여매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정하얀의 표정이 보이기는 했지만 그녀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박혜영은 죽는다.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죽을 거다.’
이미 출혈이 너무 크다. 천천히 정신을 잃어가고 있고 눈동자의 초점이 흐려지고 있다.
“어쩌면 던전에 있는 함정이 발동됐을 가능성도 있어. 하얀이는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마력으로 이루어진 벽을 통과하고 들어왔으니까.”
정하얀이 만들어낸 벽이다.
“…….”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에서 마력이 느껴진 것을 생각해 보면 이 근처에 함정과 비슷한 장치가 있을 수도 있지. 그걸 고려하지 못했어.”
1층에 그딴 장치 따위는 없다. 확신할 수 있다.
“아마 내가 주문을 외우던 과정에서 함정이 발동됐을 가능성이 클 거야. 지금 입을 막고 있는 마법 역시 우리가 알 수 없는 함정일 가능성이 크고… 다행히 주변에 다른 마력은 느껴지지 않지만….”
주문을 발동한 것은 정하얀이다.
“네… 네….”
“읍! 읍!”
정하얀을 위한 적당한 시나리오는 이미 완성됐다.
문제는 김현성에게도 이 개소리가 먹힐 것이냐에 대한 것.
이미 한 번 이곳을 와본 녀석은 1층에 함정 따위가 없다는 걸 이미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되도 않는 소리로 개소리를 지껄였다간 의심받는 것은 이쪽이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박혜영을 어떻게 해야 할지 당최 감이 오지 않는다.
녀석이 혜영 씨를 발견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에 대한 것.
함정에 당했다?
애초에 이곳에 함정은 없고 녀석은 그걸 알고 있다.
괴물에게 당했다?
절단면이 너무 깔끔하다. 누가 보더라도 지금 박혜영은 괴물에게 공격당한 것이 아니다.
몸 주변에서 희미하게 남아 있는 마력의 향이나 아직까지 입을 봉인하고 있는 정체불명의 마법은 틀림없이 박혜영이 괴물이 아닌 이질적인 힘에 죽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김현성이라면 틀림없이, 틀림없이 눈치챌 수 있다.
계속해서 상처를 동여매고 있기는 하지만 이걸로 응급처치가 될 리가 만무.
기본적인 지혈법이나 응급처치도 배운 적이 없다.
뭐라도 하는 척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한계.
‘제기랄.’
결국에는 꿈틀거리며 발버둥 치던 박혜영의 움직임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발견되면 안 돼.’
김현성에게 그녀가 발견되면 안 된다.
최고의 방법은 괴물들이 그녀를 발견하는 것이지만 생각할 것이 너무 많다.
무엇보다.
‘내키지 않아.’
내키지가 않는다.
마지막 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으리라.
숨을 헐떡거리기 시작한 그녀가 눈에 비친다. 숨이 끊어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조용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주여. 뜨거운 화염을, 막아낼 수 있는 힘을.”
정하얀은 그런 내 모습을 뭔가 뒤숭숭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화염벽.”
없는 마력을 끄집어서 사용한 마법이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어지러워졌지만 입술을 꽉 깨물고 마법을 유지하는데 마력을 집중했다.
“오, 오빠.”
“데려가기 힘들 거야. 이미 출혈이 너무 커. 함께 가려고 했다가는 우리까지 죽을 거야. 너마저 잃을 수는 없어…. 그러니 일단은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돼. 시체를 수습해 줄 수는 없으니까. 최소한 이렇게라도 하는 게 맞아. 그래, 이렇게 하는 게 맞아.”
이미 숨이 끊어진 박혜영에게 달라붙기 시작한 불길은 그녀를 계속해서 좀먹었다.
넘실거리는 불꽃이 마치 파티라도 벌이는 듯한 모습이다.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게 된다.
‘최선의 선택이었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살짝 정하얀의 표정을 보니 뭔가 웃음을 참기 힘들어하는 느낌이었다. 입에서는 욕지기가 튀어 나왔지만 괴물이 된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다.
나 역시 그녀와 마찬가지다.
왠지 모르게 자괴감이 든다.
조금 더 불길을 지켜보고 싶지만 계속해서 이곳에 있는 건 자살행위다.
내가 만들어낸 불꽃 때문인지 정하얀이 만들어 놓은 마법벽이 허물어 졌다.
곧바로 발걸음을 옮기자 박덕구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혜영 씨는 어디 갔소? 누님은 무사….”
굳이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저으니 무슨 상황인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정하얀을 발견하고 나서는 살짝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박혜영이 죽었다라는 것을 암시하자 표정이 조금 굳어진 것이다.
“주변에 다른 괴물들은?”
“그렇게 많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아마 김현성 형씨가 녀석들을 끌고 반대쪽으로 향한 것 같은데… 재빠른 양반이니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겠지.”
“다행이네.”
정말로 다행이다. 녀석이 그만큼 이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건 정말 다행이다.
“그나저나 어, 어떻게 된 거요?”
“설명하자면 길다. 나중에 설명해 줄게. 조금 말하기 힘든 이야기이기도 하고….”
“알, 알겠소 형님.”
박덕구에게는 대충 설명해도 상관없으리라.
정하얀의 이야기는 웬만하면 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계속해서 달리기 시작하니 이쪽으로 달려드는 녀석들이 몇몇 보였다.
“형님 괜찮은 거요?”
“마력이 부족해.”
“너무 무리하지 마쇼.”
박덕구가 녀석들을 밀어내며 달리자 어느 정도 그 지점에서 멀어질 수 있었다.
폐가 터질 것 같은 느낌.
박덕구나 정하얀도 별반 다르지 않다. 모두가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솔직히 쓰러질 것 같은 심정이다.
그래도 정신을 잃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일을 끝까지 마무리해야 한다.
조금은 어두운 표정으로 뒤쪽을 바라보자 정하얀이 이쪽을 향해 은근슬쩍 입을 열었다.
“역, 역시… 슬, 슬프세요?”
불안해하고 있는 듯한 표정과 질이다.
물론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잘 알고 있다.
“네가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다.”
내 목소리에 정하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주 활짝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오, 오, 오빠.”
“정말로 무사해서 다행이다.”
반 정도는 진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