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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22화 (22/1,590)

# 22

회귀자 사용설명서 022화

설계

“김현성, 그 형씨는 무사한지 모르겠소.”

“무사할 거야.”

놈들의 포위망을 어느 정도 뚫어내자 박덕구가 툭하니 말을 뱉었다.

조금은 걱정하는 듯한 눈치.

박혜영이 돌아오지 못했다는 소리를 면전에서 들으니 기분이 좀 싱숭생숭한 것 같았다.

김현성이 혼자서 다른 괴물들은 전부 끌고 간 거나 마찬가지인 만큼 녀석 역시 박혜영처럼 돌아오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수세에 몰렸다고 한들 김현성이 괴물들에게 잡아 뜯기는 장면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제대로 움직이면 눈으로 따라가기조차 힘들 정도니 괴물들 여럿 따돌리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아마 지금쯤 그 양반도 그쪽 지역을 빠져나와 나와 같은 것을 걱정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꽤나 공들여서 나간 사냥에서 한 명이 죽어서 돌아왔다.

아마 쉼터에 있는 이들이 조금 더 웅크리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 원정은 무조건 성공적으로 끝마쳤어야 하는 원정이었다.

물론 김현성은 아직 박혜영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겠지만 사고가 터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아플 거라고 생각했다.

“조금은 아쉽게 됐소. 박혜영 그 여자랑 별로 친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열심히 하려고 한 것 같기는 한데….”

“하마터면 전부 다 뒈질 뻔했으니 이 정도면 싸게 먹힌 거야.”

“그, 그렇기는 하지만.”

“지금은 살아 돌아왔다는 걸 감사하게 생각해야 돼. 어쩔 수 없었다. 이쪽의 말을 듣지 않고 설치다가 어그로가 끌린 것도 그쪽 탓이었고 주변의 괴물 새끼들한테 전부 다 들으라는 듯 소리를 지른 것도 그쪽이었어. 냉정하게 말해서 그 여자 대신 너나 하얀이가 죽었다면 나는 그 여자를 용서하지 못했을 거다.”

‘용서하지 못한다’라는 정도로 끝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내가 직접 그 여자를 죽이고 싶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박덕구와 정하얀은 소중한 패다.

슬쩍 시선을 돌리니 정하얀은 물론이고 박덕구도 나를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감동받은 것 같은 표정의 정하얀과 조금은 쑥스러워하는 것 같은 느낌의 박덕구.

“아….”

“뭐, 그,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을 거요.”

사실 박혜영을 죽인 건 정하얀이지만 지금은 그런 것 따위는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김현성을 제외하면 지금 내가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두 명이다.

내구와 체력이 높은 고기방패 박덕구와 마법사로서 측정하기 힘든 잠재 능력을 가지고 있는 정하얀.

둘 다 나에게 어느 정도 의지하고 있다는 단점은 있지만 어떻게 본다면 장점이기도 하다.

그중 한 명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폭탄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그녀의 성향상 이쪽의 힘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건 그렇고 쉼터에 있는 사람들한테는 어떻게 설명할 거요?”

“설명하고 자시고도 없어. 실수가 있었고 한 명이 죽었다. 그게 전부야. 이 정도에 겁먹는다면….”

“겁먹는다면?”

“아무리 이쪽이 도움을 주고 싶다고 해도 결국에는 죽을 거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튜토리얼이라는 사실을 잘 기억해야 돼. 본게임에 들어간다면 지금보다 몇 배는 위험하다고 가정하는 게 맞아.”

가끔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튜토리얼이라는 것을 까먹을 때가 많다.

자칫 잘못하면 뒈진다는 긴장감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다.

본게임에 들어간다면 김현성도 어떻게 하지 못할 인간들이 득실거릴 수도 있고 지금 상대하고 있는 괴물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새끼들이 널려 있을지도 모른다.

‘안주하면 안 돼.’

쉼터에 있는 놈들처럼 안주하면 죽는다.

그나마 생각이 있는 것 같은 이지혜를 제외하곤 대부분이 병신들.

어떻게 쓸 만한 녀석이 단 한 명도 없을 수 있는지 당황스러웠다.

어째서 김현성이 이런 놈들에게 집착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

지난 생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지금 녀석의 과거까지 파헤치기에는 여유가 없었다.

“오늘은 이쪽에서 자고 간다.”

“쉼터에는 들어가지 않는 거요?”

“너무 멀어.”

“거의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끄응. 형님은 어떻게 길을 그렇게 잘 외우는지 모르겠소.”

“이 정도는 보통이야. 애초에 알아볼 수 있는 표시를 남기기도 했고.”

“그새 표식까지 남겼소?”

‘이 자식….’

애초에 박덕구에게 머리 쓰는 건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이 정도면 뇌까지 근육으로 차 있는 것이 틀림없다.

잠깐 동안 내가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봤는지 박덕구가 움찔거린 것을 보고 정하얀이 황급하게 말을 이었다.

“여, 여기요.”

창으로 살짝 긁어낸 것 같은 상처.

벽에 아주 작게 만들어진 상처가 확실히 시야에 비친다.

“누님도 알고 있었구만.”

“주변을 조금 더 신경 쓰는 게 좋아. 만약에 아까처럼 너와 내가 떨어져야 되는 상황이 생기면 어떻게 하려고….”

“큼.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말끝을 항상 흐리는 녀석을 보니 조금은 당황스러워진다.

괜스레 민망했는지 두리번거리며 자리를 잡는 꼴이 꽤나 가관이다.

이곳에서 녀석에게 잔소리를 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나 역시 피곤해진 몸으로 살짝 주저앉았다.

정하얀은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라도 되는 것처럼 이쪽에 찰싹 달라붙어 온다.

그 모습을 본 박덕구의 표정이 뭔가 음흉해 보인다.

“큼큼…. 형님, 그럼 나는 잠깐 주변을 둘러보고 오겠소.”

“그럴 필요가 있나.”

웬만하면 박덕구가 자리를 떠나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다.

“혹시 주변에 이쪽이 발견하지 못한 괴물 새끼가 있는지 누가 알겠소.”

틀린 말은 아니다.

“거, 형님은 마력인지 뭔지를 많이 사용하기도 했고… 누님이 조금 보살펴 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 맡, 맡겨주세요, 덕구 씨.”

“길 잃어버리지 마라.”

“주변만 살짝 둘러보는 정도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슬쩍 자리를 떠나는 모습을 보니 괜스레 정하얀과 단둘만 남았다는 사실이 걱정된다.

대뜸 이쪽에 마법을 날릴 정도로 미치진 않다는 건 알고 있지만 아까 전에 봤던 장면이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맴돌았기 때문이다.

히죽거리는 정하얀과 팔다리가 잘린 채로 꿈틀거리던 박혜영.

무섭다는 감정이 생기지 않을 리가 없다.

“상태창.”

괜스레 상태창을 한 번 외쳐보자 자연스럽게 시야에 내 정보가 비쳤다.

[플레이어 이기영의 상태창과 재능 수치를 확인합니다.]

[이름-이기영]

[칭호-없습니다. 조금 더 노력하셔야 겠네요.]

[나이-25]

[성향-용의주도한 전략가]

[직업-마법사]

[직업효과-기초 마법 지식 습득]

[능력치]

[근력-10/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민첩-11/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체력-14/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지력-25/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내구-12/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행운-23/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마력-05/성장한계치 일반 이하]

[장비-없음]

[특성-마음의 눈]

[총평-개미 쥐꼬리만큼은 성장하셨군요. 체력과 마력, 지력을 중심으로 많은 성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머리 쓸 일이 많았나 봐요? 특히나 높은 성장치를 기록한 지력이 눈에 들어옵니다. 너무 자만하지 말도록 하세요. 아직까지 플레이어 이기영의 능력치는 몬스터들의 분비물보다 못한 수준이니까요.]

도대체 이 총평은 누구의 의견을 바탕으로 작성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능력이 없었으면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겠지만 저 총평만큼은 어떻게 조치를 취하고 싶을 정도.

그렇지만 능력치의 성장에 조금은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마력이 2가 올라간 것이 눈에 띈다.

확실히 머리 쓸 일이 많기는 했는지 지력이 다른 능력치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다.

아직까지 지력 스탯의 정확한 존재 유무를 찾을 수 없는 만큼 뭐가 좋아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기본적인 사고력은 이전보다 조금 나아졌을 것이다.

‘행운.’

미지에 쌓여 있는 행운 수치 역시 마찬가지로 두 단계나 올라간 상황.

정하얀의 상태가 이렇게 된 것이 이쪽에 그리 나쁘게 작용하지는 않았다는 걸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아 반가워졌다.

‘나쁘지 않아.’

재능 최하위를 달려가고 있는 쓰레기치고는 꽤나 좋은 성장치.

이 정도라면 다른 일반인들에 비해서도 그렇게 밀린다고 할 수는 없다.

“능력치… 오르셨나 봐요?”

“응. 하얀이는 뭔가 달라진 게 있어?”

“아, 아뇨. 아직은… 그래도 마력 수치가 조금 더 올라갔어요. 체력이나 근력 같은 것도….”

“그거 다행이네.”

[플레이어 정하얀의 상태창과 잠재 능력을 확인합니다.]

[이름-정하얀]

[칭호-없습니다. 조금 더 노력하셔야겠네요.]

[나이-21]

[성향-순수한 옹호자]

[직업-마법사-일반 등급]

[능력치]

[근력-11/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민첩-11/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체력-15/성장한계치 영웅 이하]

[지력-23/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내구-14/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행운-23/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마력-18/성장한계치 전설 이상]

[장비-없음]

[특성-마법사가 되는 방법-영웅 등급]

[총평-조심하세요. 나이스 보트.]

혹시나 싶어 정하얀의 상태창을 열어봤지만 이전과 크게 달라진 건 찾을 수 없었다.

눈에 띄는 것은 마력이 3이나 올라갔다는 것. 순수한 옹호자인 성향도 아직은 그대로. 지금의 상태도 확실히 순수하다면 순수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태니 불만은 없지만 조금 더 이쪽이 알아보기 쉽게 표기해 줬으면 싶었다.

‘총평은 또 뭐야.’

왠지 모르게 불길하게 들려오는 울림이다.

“전, 전부 오, 오, 오빠 덕분이에요.”

“아니. 사실 내가 크게 도와준 건 없어.”

그녀의 능력치의 성장을 도와주는 것에 내가 크게 기여한 점은 없다.

내가 조용히 웃자 정하얀 역시 환하게 웃기 시작했다.

조금 무섭게 보이는 웃음이기도 했지만 티를 낼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살짝 머리를 쓰다듬자 고개를 푹 숙이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박혜영의 팔다리를 잘라내며 미친년처럼 웃고 있었던 모습은 이미 그 자리에 없다.

한 번 더 그녀가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밖에 없는 상황.

현재 정하얀은 내가 제일 신경 쓰고 있는 사람이다.

컨트롤 불가능한 폭탄을 컨트롤이 가능하게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선택지는 두 가지.’

첫 번째. 아주 천천히 밀어낸다.

그녀를 내 품에서 밀어낸다는 의미가 아니다.

애인 이상의 호감도에서 오빠와 여동생 같은 포지션으로 밀어낸다.

남녀 간의 애정이 아닌 남매의 애정으로 강도를 낮춘다.

질투심 때문에 나를 마법으로 절단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실상 가장 안전한 방법이기도 하고 합리적이기도 하다.

두 번째. 빠르게 이쪽으로 끌어 들인다.

두 번째 선택지가 바로 남녀 간의 애정이다.

이쪽을 신뢰하고 믿고 따르는 것은 물론, 이쪽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를 수 있을 정도의 사이로 발전시킨다.

기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지만 지금 정하얀의 상태로 봤을 때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지 않는다.

사실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첫 번째 선택지.

쉽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지만 아직 관계를 개선할 여지는 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다시금 머리를 쓰다듬자 자기 머리 위에 올린 내 손을 잡았다.

솔직히 조금 깜짝 놀랐다.

“큼… 큼….”

순찰을 나갔던 박덕구가 돌아온 것이다.

“거, 분위기 좋은 것 같구만.”

“네? 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조금 지나치게 당황하는 정하얀.

박덕구는 아까처럼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정하얀을 향해 입을 열었다.

“형님을 돌봐주라고 했던 것 같은데 누님도 조금 엉큼한 면이 있는 거 아니요?”

“그, 그런 게 아니에요.”

실실 웃고 있는 박덕구가 뭔가 부담스러웠는지 정하얀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구석진 곳으로 슬쩍 향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박덕구는 또 실실 웃으며 내 옆자리에 털썩 주저 않았다.

“거, 내가 너무 일찍 온 거요?”

“무슨 말이야.”

“거, 누님이랑 잘되고 있었던 거 아니요?”

이 자식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아니, 생각해 보니 놈의 나이는 23살. 정하얀의 나이는 21살이다.

어째서 정하얀을 누님이라고 부르는지 알 수 없을 지경.

누가 봐도 정하얀은 박덕구보다 어려 보인다.

“정하얀이 너보다 어리다는 건 알고 있지?”

“물론이요. 그렇다고는 해도 형님의 여자가 될 사람을 동생 취급하는 아우가 어디 있겠소.”

“무슨….”

‘개소리야’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그러고 보니 뭔가가 이상하긴 이상했다.

애초에 이쪽이 정하얀에게 원하고 있었던 것은 애정관계가 아닌 유대관계다.

그녀의 주변 환경이 그녀를 이상한 방향으로 이끈 것은 사실이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맞춰지지 않은 퍼즐 조각이 있었다.

그 마지막 조각이 맞추어진 기분이다.

있었던 것이다.

‘제길….’

사랑의 조력자가.

“나중에 잘되면 잊지 마쇼. 사실 말은 안 했지만 형님이 누님을 잘 챙겨달라는 말을 한 뒤로 이쪽에서도 은근슬쩍 푸시해 주고 있었소.”

“뭐… 뭘 어떻게….”

“큼큼… 뭐 잘 어울린다든가 형님이 마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흘리기도 하고…. 누님한테 은근슬쩍 떠보기도 하고 그런 식이었는데 너무 많아서 잘 기억도 나지 않은데… 흐흐…. 너무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

“취향이 조금 특이하다고 생각했었는데… 큼! 형님이 그렇다는데 동생인 내가 도와주는 게 맞지! 내가 볼 때는 고지가 눈앞에 있는 것 같소. 사실 내가 생긴 건 이렇게 생겼어도 강원도 연애 박사 박덕구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박덕구는 입꼬리를 올리며 자기자랑을 쏟아냈다.

황당해서 말도 안 나온다.

첫 번째 선택지니 두 번째 선택지니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박덕구 이 돼지 새끼가….’

완벽에 가까운 외통수.

뇌가 근육으로 꽉 찬 돼지의 설계를 막을 수 있는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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