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회귀자 사용설명서 023화
계산적인 살인자(1)
애초에 내게 선택지 따위는 없었다. 박덕구의 설계대로라면 정하얀은 첫 번째 선택지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이쪽이 무슨 생각을 하든지 간에 정하얀은 혼자 두 번째 선택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을 확률이 높다.
“크어어엉.”
옆쪽에서 코를 골고 있는 박덕구를 보자 괜스레 심사가 뒤틀렸다.
애초에 이곳에서 연애를 할 생각이 있을 리가 만무.
언제 죽어 나갈지 모르는 곳에서 그런 감정을 품는다는 것 자체가 이성적이지 않다.
관계를 가지는 것과는 아예 다른 이야기.
언제 내 신체를 절단할지 모르는 여자와 지금보다 더 가까워지는 것은 사양이었지만….
‘해야 돼.’
아이러니하게도 사지가 찢겨져 죽는 엔딩을 피하는 방법은 그녀와 더 가까워지는 것뿐이다.
가장 위험한 사람임과 동시에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
도박은 즐기지 않지만 필요하다면 주사위를 던질 준비는 되어 있다.
인정하기 싫은 현실에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직까지 코를 골고 있는 박덕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일어나.”
“끄으으으응….”
“일어나라, 덕구야.”
“끄으으응… 뭐요. 벌써 아침이요?”
“조금 일찍 출발할 거야.”
“어이, 누님. 일어나쇼.”
“…….”
“조금 깊게 잠든 모양인데… 누님, 일어날 시간이요.”
“…….”
“끄응… 거 아무래도 우리 누님이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된 것 같은데… 이거, 이거 왕자님의 입맞춤이 필요한 거 아니요?”
‘개자식.’
이쪽의 속도 모르고 약 올리는 듯한 말투다.
입에 화염구를 먹여주고 싶을 지경.
마침 마력도 대부분 회복된 참이다. 별것 아닌 대사가 왜 이렇게 나를 사지로 몰아넣는 것처럼 들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정하얀을 깨워야 하는 만큼 나는 살짝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하얀아.”
“…….”
“하얀아, 일어나야지.”
“으응….”
살짝 머리를 쓰다듬자 그제야 눈을 비비며 일어나는 정하얀이 시야에 비쳤다.
아직은 잠이 덜 깬 것 같은 느낌.
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며 허둥지둥하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지만 왠지 저런 모습조차 조금은 무섭게 느껴졌다.
“아… 앗. 네, 오빠.”
“곧바로 쉼터로 갈 거야.”
“알겠소.”
“간단하게 먹고 출발할 수 있도록 하자.”
“큼. 준비는 맡겨주쇼.”
정말로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움직일 준비를 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누군가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모두가 각자의 방법으로 아침을 맞이하는 것을 보니 제법 맞는 소리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김현성, 그 형씨도 형씨지만 쉼터도 괜찮은지 모르겠소. 조금 시간을 오래 비운 것 같은데.”
“아마도 괜찮을 거다. 그곳에 있는 놈들이 괜히 헛바람이 불어서 지들끼리 사냥을 나가거나 하지만 않으면….”
“제대로 할 수 있다면 더 좋은 거 아니요? 싸울 수 있는 인원은 어차피 더 늘어나야 되니까….”
물론 제대로 사냥만 할 수 있다면 이쪽에서도 굳이 막을 이유는 없다.
“지금까지 겁을 집어먹고 숨어 있던 놈들이 뭔가 심경의 변화가 생긴다고 해서 갑자기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아? 지들끼리 뭉쳐서 사냥을 해보겠다고 나갈 확률도 낮을뿐더러, 만약에 나갔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못하면 전부 뒈졌을 거다. 차라리 그게 낫지.”
“뭔 소리요?”
“박혜영 같은 사태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야 한다는 거야.”
쉼터 안에 있는 이들끼리 사냥을 나갈 확률은 낮다.
그러나 자체적으로 파티를 만들어 밖에 나가서 괴물들을 찾아 나섰다고 한다면 이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있기는 있다.
물론, 내 판단이 전부 옳다고는 할 수 없지만….
“패닉에 빠져서 소리를 지르고 주변에 괴물들을 전부 몰아온 이후에 쉼터로 복귀하는 게 최악의 시나리오지.”
“…….”
“…….”
“아마 쉼터가 위험해진다고 판단하는 놈들도 없을 거다. 전부 다 자기 살기 바쁠 테니까. 공포에 질린 인간은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가 없거든…. 결국 물량으로 들이닥치기 시작한 괴물들을 막지 못한 채 입구가 뚫리고 거기서 쉼터는 끝.”
“거,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게 들리오.”
정말로 끔찍하다.
“현성 씨가 멀리 돌아가라고 지시했던 이유도 바로 그거일 거야. 혹시 이쪽을 아직까지 쫒아오고 있는 괴물 새끼들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거, 형님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똑똑한 것 같소.”
나는 절대로 똑똑한 게 아니다.
“그런 건 아니야.”
다만 항상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고 행동할 뿐이다.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괜스레 불안해진다. 앞서 말했던 상황이 정말로 일어났을 거라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입안이 바짝 말라왔다.
사실 이쪽이야 쉼터에 있는 인간들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지만 그곳에 두고 온 자원이나 재원이 없어지는 것은 사양이기 때문이다.
기껏 안정화 해놓은 장소.
던전 공략의 길이 아직까지 보이지 않는 만큼 쉼터는 아직까지 우리에게 필요한 장소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길을 걷자 묘하게 조용한 것 같은 장내.
이런 침묵은 조금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박덕구와 정하얀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자 얼마 지나지 않아 쉼터가 시야에 들어왔다.
평소와는 다르게 꽉 막혀 있는 입구.
이쪽을 발견했는지 이지혜가 돌무더기를 치우며 밖으로 나오는 게 눈에 보였다.
얼마나 단단하게 쌓아뒀는지 한참이나 지나서야 나오는 모습.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던 이지혜는 평소대로의 미소를 보내오며 이쪽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기영 오빠, 덕구 오빠 오셨어요? 혜영 씨랑 현성 씨는….”
“박혜영은 죽었고 현성 씨는 곧 돌아올 겁니다.”
“아, 그렇군요.”
조금은 담담하게 꺼낸 말에 잠깐 동안 눈을 감은 이지혜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까의 말을 이었다.
“어쩌다가….”
“설명하자면 깁니다. 그보다 그동안 쉼터에 별 일은 없었습니까?
“으음… 따로 말씀드려도 될까요?”
편하게 이야기를 하자는 뜻일 것이 분명.
이지혜의 표정이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뭔가 일이 있기는 있는 것이다.
어째서 항상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지 알 수 없다.
살짝 뒤를 돌아 박덕구를 바라보자 상관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애초에 녀석은 나중에 나에게 듣고 싶어할 테니 상관없겠지만 신경 쓰이는 것은 정하얀의 반응이다.
그러나 이지혜와 대화하는 것은 나로서도 필요한 일인 만큼 정하얀의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어 주며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먼저 안으로 들어가서 기다릴래? 금방 갈게.”
“아! 네… 네. 오빠.”
혹시나 이지혜도 찢어 죽이는 것이 아닌가 걱정됐던 탓이다.
쉼터 안으로 들어가는 와중에도 슬쩍슬쩍 뒤를 돌아보며 이쪽을 바라보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박혜영 때를 떠올리게 했다.
둘이 시야에 보이지 않게 되자 그제야 이지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박혜영은 어쩌다가 죽은 거예요?”
“뒈질 만했어. 괴물 새끼들이 널려 있는 곳에서 소리를 질렀지. 김현성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고… 자세한 게 궁금해?”
“아니요. 대충 무슨 일이 있었을지 예상이 가요.”
살짝 뒤를 돌아보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하얀이 떠나간 길을 바라보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왠지 모르게 이쪽 사정을 대충 눈치챈 것 같은 느낌.
단순한 추론일 뿐이겠지만 내 생각보다 이지혜의 눈치가 조금 더 빠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야기는 빨리 끝내야겠네요.”
“무슨 일이 있었지?”
“유석우를 포함한 몇몇이 밖으로 나갔어요.”
‘이럴 줄 알았어.’
“언제?”
“어제 아침.”
“너.”
“저도 알고 있어요. 함부로 나가게 두면 안 된다는 거.”
“그런데… 왜.”
“사실은 기영 오빠가 현성 오빠와 함께 밖으로 나간 직후부터 사냥을 나가겠다는 의견을 지속적으로 이쪽에 말해왔어요. 기영 오빠가 보여준 마법을 보고 다른 마음을 먹은 건지 아니면 자기가 처한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이 맞는 남자 몇몇과 함께 사냥을 나간다고 하더라고요? 병신들…. 처음에는 당연히 기영 씨들이 돌아온 이후에 가는 게 합리적일 거라고 설득했지만….”
“…….”
“저는 힘없는 여자잖아요?”
무슨 상황인지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마법을 사람들 앞에서 보인 게 악영향을 끼친 모양이다.
애초에 유석우는 정하얀과 있었던 트러블 때문에 알게 모르게 불이익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자신의 입지가 줄어든 만큼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번쯤 해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해할 수 없는 힘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물론, 자신도 우리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해왔을 것이다.
관리자라고 생각되는 이지혜를 제외하면 나와 김현성, 박덕구의 권력은 이곳에서 절대적이었으니까.
나는 잠깐 한숨을 내쉰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그걸 막는 게 네 일 아니었어?”
“그나마 최대한 막은 거예요. 기영 오빠가 돌아오는 게 조금 늦으니 사람들이 불안해하기도 하고… 또 구조대를 보내겠다고 말하는 걸 이쪽에서 어떻게 거절하겠어요?”
“구조대는 개뿔… 평소에는 신경도 쓰지 않던 잡것들이…. 그래서 입구를 막아 놓은 거야?”
“네. 같이 죽을 수는 없잖아요?”
입구가 아예 막아져 있는 것은 그런 연유이리라.
만약 유석우를 비롯한 자칭 구조대들이 괴물들에게 쫓기다 쉼터도 도움을 요청할 경우를 생각한 것이다.
입구를 막고 열어주지 않은 상황까지 생각한 것을 보니 이지혜 역시 나름대로 쉼터를 지킬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고만 치는 멍청한 새끼는 그냥 콱 죽어버렸으면 싶었는데… 엉뚱한 사람이 죽어서 돌아왔네요. 어떡하나… 사람들이 무서워할 텐데…. 싸울 수 있는 사람, 아직도 더 필요해요?”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사실 이 던전을 공략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김현성이다.
전투가 가능하다고 보는 인원이 지금보다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내가 아니라 김현성.
아래층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무조건 인원을 확충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너는 어때?”
마음의 눈에서도 쓰레기로 평가하고 있었던 이지혜지만 박혜영 같은 년보다는 그나마 낫다.
창을 멋대로 내지르는 일도 없을 테고 중간에 소리를 지르는 일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박덕구의 뒤에서 침착하게 자기 일을 해줄 확률이 높다.
“저는 사양이에요.”
“…….”
“무섭기도 하고 괜한 일에 휘말려 죽는 건 사양이거든요. 기영 오빠가 보여준 힘은 확실히 신기하고… 또 탐이 나기는 하지만 괜한 욕심은 객사하는 지름길이에요.”
“…….”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고 하면 되겠어요? 뱁새는 뱁새 나름대로 사는 방법이 있는 거랍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것 같다.
왠지 모르게 나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 같아 입맛이 조금 썼지만 이지혜의 생각은 합리적이기도 하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터에서 사는 것보다는… 능력 있는 남자 만나서 평탄하게 사는 게 제일 아니겠어요?”
어디에선가 인기척이 느껴진 것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그때였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니 앞 쪽에서 몇몇 인형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유석우?’
앞에서 걸어오는 것은 틀림없이 유석우.
그러나 뒤에서 걸어오고 있는 세 명의 인형은 그간 쉼터에서 본 적이 없는 인간들이었다.
“제일 죽었으면 하는 놈만 살아 돌아왔나 보네요. 그것도 혹을 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