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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28화 (28/1,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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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 028화

퀘스트(1)

“버티기 빠듯하겠네요.”

“생각보다 많이 남기지 않았어?”

“돌아오지 못했을 경우도 생각해야 되잖아요?”

“재수 없는 소리 마. 그런 경우는 없으니까.”

“물론 나는 우리 현성 오빠와 기영 오빠를 믿지만…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요. 그나저나 하얀 씨가 여기 계속 보고 있는 것 같은데 괜찮은 거 맞죠?”

살짝 뒤를 돌아보니 조금 담담한 표정의 정하얀이 시야에 비쳤다.

박혜영 때처럼 격정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건 아니었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궁금하게 만드는 표정이다.

혹시라도 딴 생각을 하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되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안정권이라고 볼 수 있다.

단순히 대화를 나누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신체적인 접촉을 동반한 대화였다면 상황이 조금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꽤나 거리를 두고 이야기하는 모습은 누가 봐도 친밀해 보이지는 않는다.

살짝 가방을 넘기자 다시 한번 이지혜가 입을 열었다.

“조금 큰 결심을 하셨네요.”

“뭐가.”

“도박은 싫어하는 타입인 줄 알았는데.”

“싫어해.”

“그럼?”

“이기는 게임에 주사위를 던지지 않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야.”

모든 변수를 가정해도 이쪽의 승률은 압도적으로 높다.

던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정보, 전체적인 파티원의 스펙, 회귀자의 존재.

질 가능성 따위는 없다.

물론 그것 이외에도 생각해 볼 것이 많기는 하지만 아득바득 콩고물을 빨아먹어야 하는 내게 있어서 이런 기회는 흔하지 않다.

위기를 함께 헤쳐 나가는 동료의 유대.

그리고….

‘던전 공략의 보상.’

분명히 있다.

김현성이 발견했다고 말한 상자 역시 분명, 그런 종류일 거라고 생각했다.

내 목소리를 듣고 잠깐 동안 입을 다물었던 이지혜가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래서 당신이 좋더라.”

“쓸데없는 소리.”

“아무튼 다녀와요, 기영 오빠.”

“알겠어, 누나.”

역시나 표정이 구겨진다.

겉모습으로는 동안임에도 불구하고 나이에 대해서는 제법 스트레스를 느끼는 모양.

아무래도 그녀는 어린여자가 살아남기 더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니 정하얀이 재빠르게 이쪽으로 다가와 황급히 소매 끝을 잡는 것이 보인다.

내게는 아무 말도 해오지 않았지만 불안했던 모양이다.

박덕구는 너털웃음을 터뜨렸고 김현성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중.

정진호와 유석우를 포함한 두 똘마니는 조용히 나를 기다린다.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인원은 총 8명.

많다고 하면 많다고 할 수 있는 인원이다.

이쪽이 4명, 저쪽이 4명이다.

저쪽은 정진호를 중심으로 한 파티라고 한다면 이쪽은 김현성을 중심으로 한 파티.

함께 걸어가고는 있지만 미묘한 거리는 있다. 대화소리는 많이 들려오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나와 정진호가 이야기를 나누는 게 전부. 그 외에는 끼리끼리 떠들거나 혹은 각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그건 그렇고 정말로 많이 돌아다니신 모양이군요. 저희는 새로운 입구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우연치 않게 발견하게 됐습니다. 스타트 포인트에서 들으셨겠지만 이곳을 빠져나가는 조건은 생존 그리고 공략입니다. 기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는 만큼 전자에 기대를 거는 건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해서… 최대한 공략해 보기로 마음을 먹었었죠.”

“아.”

“어쩌면 생존의 기간은 타인이 던전 공략을 성공할 때까지일지도 모릅니다.”

“그것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어디까지나 추측입니다.”

“만약 정말 그렇게 된다고 한다면 저희가 던전 공략을 해야 쉼터 안에 있는 분들도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게 되는 겁니까?”

“그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겠죠. 뭐, 방법이야 어떻게 됐든 이 던전을 공략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을 겁니다. 아무튼 제안에 동의해 준 것에 대해서는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아니요. 피차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은 건 마찬가지니까요. 사실 이런 기회를 만들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저희도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상황이 조금 불안했던 터라….”

싱긋 웃고 있는 놈의 모습은 정말로 사람 좋아 보인다.

왠지 모르게 경계심을 풀게 하는 종류의 미소였지만 놈의 성향을 알고 있는 내가 경계심을 풀 리가 없다.

오히려 이쪽이 저쪽의 경계심을 풀어줘야 되는 상황.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꽤나 많이 된다.

지구에서의 이야기, 던전에 대한 이야기나 스타트 포인트에서 들려왔던 여자의 이야기들을 하며 발걸음을 옮기자 이번에는 제법 당황스러운 주제가 튀어나왔다.

“그러고 보니 기영 씨는 하얀 씨와 자주 붙어 다니시는 것 같더군요. 혹시… 두 분이….”

지금까지는 누구도 물어보지 않아왔던 이야기다.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슬쩍 주위를 둘러보며 사람들의 시선을 살핀다.

박덕구나 김현성이나 귀를 기울이는 것 같은 눈치.

정하얀에게 한 번 추파를 던진 적이 있는 유석우는 대놓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하얀 같은 경우는 고개를 푹 숙이고 내 소매를 꽈악 잡아당기는 중이다.

내가 뭐라고 할지 무척이나 궁금한 모양이다.

‘이러지 마….’

뇌가 근육으로 꽉 찬 돼지뿐만이 아니라 미치광인 살인마 새끼도 이 설계에 동참하려고 하고 있다.

‘좋은 오빠 동생 사이?’

이건 기각.

‘발전하고 있는 관계?’

이것도 아니다.

어떻게 생각해도 열애설에 휩싸인 연예인의 변명으로밖에 안 보인다.

어차피 정하얀과는 필연적으로 지금보다 더 가까워져야 하는 관계다.

조금 고민했지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결론을 내리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따.

나는 소매를 움켜쥐고 있는 정하얀의 손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

“아직은 딱히 뭐라고 정의할 수는 없지만… 아마 생각하시는 게 맞을 겁니다.”

“오오오….”

입이 찢어져 있는 박덕구의 얼굴.

김현성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 같은 경우에는 내 존재가 정하얀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재미있었던 것은 정하얀의 반응. 무척이나 붉어진 얼굴로 땅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내 손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 있다.

‘슈바… 아파.’

얼마나 강하게 잡아대는지 내 미약한 내구가 버티지 못할 정도.

여러 가지 선택지를 생각해 봤지만 역시나 이게 정답이다.

굳이 뭐라고 정의할 수 없다고 말한 이유는 내가 아직 정하얀에게 마음을 전하지 않은 데 있다.

지금 도장을 찍어도 별 상관이 없을 것 같기는 했지만 그녀와 나는 조금 더 기억에 남는 방식으로 이어져야 한다.

지금처럼 떠밀리는 방식이 아니라 이쪽의 진심을 제대로 전하는 게 더 효과적일 것이다.

다시 한번 고개를 돌리자 히죽거리는 입꼬리가 볼까지 올라와 있는 정하얀의 얼굴이 보였다.

이쪽은 조금 소름이 끼쳤지만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유석우는 심사가 뒤틀리는지 괜스레 인상을 구기고 있다.

정하얀과의 관계에 가장 크게 공허한 인물이 두 명이 있다면 박덕구를 제외한 한 명은 저 녀석.

이쪽에 악감정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것에는 서툰 모양이다.

이번 원정의 쓰레기는 놈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며 나는 괜스레 정하얀의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었다.

유석우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이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며 파티는 계속해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정진호의 똘마니들 중 하나인 궁수는 직업의 효과 때문인지 길을 읽는 능력이나 괴물들의 기척을 발견하는 것에 능했지만 굳이 괴물들을 피해 다닐 이유는 없었다.

정진호는 자신의 힘을 숨기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이곳에 있는 괴물을 상대하는 데는 별 무리가 없었고 이미 익숙해진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조금 의외였던 것은 유석우 역시 적응이 빨랐다는 것.

박혜영 같은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과는 반대로 제법 침착하게 검을 놀렸다.

다른 이들의 수준도 결코 나쁘지 않다.

모두가 정진호 정도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할 일을 잘해내고 있는 모습에 이쯤 되면 이 파티가 꽤나 이상적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빠르고 안전해.’

나와 김현성, 박덕구, 정하얀, 박혜영이 움직일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정진호와 김현성이 혹시 모를 변수에 대비하고 박덕구가 길을 막는다.

나와 정하얀은 후방지원을 할 뿐이었지만 궁수의 화살이나 정진호의 똘마니들도 솜씨가 이쪽보다 훨씬 괜찮다.

왠지 모르게 조금 아쉬워지는 것이 사실.

특히나 정진호의 경우가 그랬다.

검 한 자루를 사용하는 김현성과는 반대로 왼쪽 팔에 들려 있는 작은 방패로 상대방을 견제한다.

저기에 마법까지 사용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조금 더 놀랄 것이다.

놈이 박덕구와 나, 정하얀을 별로 염두에 두지 않았던 이유가 뭔지 알 것 같은 느낌.

놈은 분명히 강하다.

박덕구와 김현성, 정하얀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만약 정진호라는 패를 단기가 아닌 장기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면 꽤나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강하시군요.”

“모두가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조금 더 가야 하나요?”

“거의 다 왔을 겁니다.”

살짝 김현성을 바라보자 녀석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이 느껴지는 계단.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들어가 봐야 알 수 있다.

사실은 김현성에게 조금 더 제대로 된 설명을 요구하고 싶기는 했지만 그렇게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뭐가 있을까.’

어째서 김현성은 이 던전에 들어가는데 지금의 전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는지에 대한 원초적인 의문.

궁금증과 불안감이 뒤섞였지만….

“그럼… 진입하도록 하겠습니다.”

포기하는 짓은 멍청한 일이다.

계단으로 내려가는 길은 어둡다.

조금 긴 계단을 내려가자 것은 거대한 철문이 보였다.

전위에 위치한 박덕구가 천천히 철문을 열고 이윽고 우리가 안으로 들어서자 곧바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어와 꽂혔다.

스타트 포인트에서 들었던 여자의 목소리였다.

[지하 던전에 도달하셨습니다. 희귀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희귀 등급 퀘스트-생존 (0/1)]

“뭐야.”

“오, 오빠….”

“전투 준비합니다.”

“전투 준비하겠습니다.”

굳이 김현성이 입을 열지 않아도 모두들 자신들의 무구를 꽉 붙잡고 있다.

“끼에에에에에엑!”

“끼에에에에에에에엑!”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개 같은 목소리들이 귓가로 내려 꽂혀 왔으니까.

‘제기랄! 제기랄!’

어느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 된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내 생각보다 조금 더 난이도가 있다. 어째서 김현성이 많은 인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이해가 간다.

‘디펜스.’

들려오는 목소리는 확실히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있을 정도의 병력이 아니다.

“철, 철문이 막혔습니다.”

누군가 중얼 거린 목소리.

“도망치지 않습니다.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겁니다.”

“할 수 있을 거다.”

“키에에에에엑!”

놈들이 이곳으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릴 정도다.

괴물 새끼들의 목소리는 둘째치고 땅 바닥을 울리는 것이 굉장히 신경 쓰인다.

불안감에 곧바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

정진호 쪽도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조금 얼이 빠진 듯한 모습이다. 그렇지만 정진호를 중심으로 대열을 정비한다.

‘막을 수 있어.’

당황하기는 했지만 충분히 막을 수 있다. 회귀자는 이 전력으로 공략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거, 제기랄 엄청나게 많구만.”

놈들에게 둘러싸인 적은 스타트 포인트에서 한 번, 박혜영이 병신 짓을 저질렀을 때 또 한 번 그리고 이번이 세 번째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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