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회귀자 사용설명서 031화
퀘스트(4)
누가 봐도 내가 잘못한 상황이다.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쓰레기 짓이었다.
장담컨대 솔로몬이 와서 판결을 내려도 나를 죄인이라고 말하리라.
김현성에게 평판이 깎일 각오를 하고 선택한 도박, 확실히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이기철이라는 놈은 아귀의 뱃속으로 사라졌고 정진호의 똘마니는 이쪽을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분노를 보내고 있는 중이다.
갈등도 만들었고 김현성의 반응도 나쁘지는 않다.
내가 일부로 한 일인지 아는지 모르는지는 모르겠지만 만들어진 결과에는 충분히 만족한다.
손도 쓰지 않고 한 놈을 아귀 뱃속으로 보내버린 것이다.
피해자가 되는 모험까지 감행하다보니 이빨을 하나 잃기는 했지만 사랑하고 소중한 동료들의 따뜻한 관심을 얻는 아름답고 바람직한 결과를 얻어냈다.
그러나 정하얀이 또다시 저런 표정을 보내는 것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다른 이성과 스킨십을 하는 것도 금기.
‘이것도 안 되는 건가?’
누군가 내 몸에 손을 대는 것 역시 금기다.
손톱을 까득까득 깨물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잠시. 이쪽이 아직까지 바닥에 엎어져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황급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놈에 대한 적의까지 버린 것은 아니다.
“오, 오빠!”
그러나 입 안에서 피가 흐르고 있는 내 모습을 보니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 모양이다.
심지어 반지를 쓰다듬으며 마력을 보내려고 하는 모습은 가관.
정하얀이 가지고 있는 신성력 반지는 이런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왼쪽 손을 살짝 움켜쥐자 내 뜻을 알아차렸는지 주문을 외우지는 않았다.
눈에는 눈물이 한 가득 고여 있고 커다란 눈에서는 눈물이 쉴 틈 없이 떨어진다.
“괜, 괜찮으세요? 어떡해…. 어떡해요.”
“물론 괜찮아. 내가 잘못한 거니까… 어쩔 수 없지.”
입안이 괜스레 쓰다.
이빨 하나가 날아가서 볼 한쪽이 얼얼했지만 아프다는 티를 낼 수는 없다.
괜한 엄살이라도 부렸다간 정하얀이 대뜸 저쪽에 마법을 날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건 참아줘… 제발 부탁이다.’
이쪽에서 먼저 마법을 쏘는 것도 분명 나쁜 선택지는 아니지만 웬만하면 피해자의 포지션으로 일을 진행시키는 게 좋다.
김현성이 아직 움직임이 없는 것을 보면 김현성도 그걸 바라고 있을 것이다.
“흐으으극….”
내 얼굴을 계속해서 어루만지는 모습은 마치 나라라도 잃은 듯하다.
목이 메는지 자꾸만 히끅거리고 있는 것은 물론, 공황장애라도 걸린 것 같은 모습을 보니 정하얀이 정말로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얼굴.
누가 보면 내가 죽기라도 한 줄 알았을 것이다. 단순히 이빨 하나가 날아갔다고 보여주는 반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격정적이다.
“괜찮으세요? 괜찮으신 거죠? 히끅…. 괜, 괜찮.”
“응 괜찮아. 별거 아니야. 신경 쓰지 마, 하얀아. 정말로 괜찮으니까. 정말로 괜찮아. 하나도 안 아파.”
아프기는 하지만 대단한 상처는 아니다.
이 정도 상처에 이런 반응을 보여준다는 건 어떻게 생각하면 고마운 일이지만 또 다른 쪽으로 생각해 본다면 조금 무섭게 보이기도 했다.
“이놈이! 감히 어딜!”
화를 내는 것은 박덕구 역시 마찬가지.
사실 잘못해서 한 대 맞았을 뿐이다.
그러나 정하얀이나 박덕구가 보여주는 반응은 놈의 예상을 훨씬 뛰어 넘었을 것이다.
이쯤 되면 정진호 역시 당황스러울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누구보다 당황스러워 하는 것은 나를 때린 장본인.
갑작스럽게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불길함을 감지한 것이다.
마무리 되려고 하는 상황에 정하얀의 반응이 새로운 화두를 던져줬다.
오차가 있기는 했지만 나쁘지 않은 정치질이었다.
가해자가 순식간에 피해자로 둔갑하는 마법.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마법보다 더욱더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푸흡.’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입꼬리가 올라간다.
이런 얼굴을 보여주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미소가 지어진다.
결국 고개를 숙인 것은 정진호 쪽이었다.
“죄송합니다, 기영 씨.”
“아닙니다.”
“뭐라고 할 말이 없습니다. 나쁜 의도로 그러시지 않으셨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만약에 마법을 써주지 않으셨다면 더 큰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겠죠. 오랫동안 함께했던 기철 씨가 죽었다는 거에 재준 씨가 조금 흥분한 것 같습니다.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재준 씨?”
“그렇지만….”
“재준 씨. 사과하셔야 됩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고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만약 기영 씨가 아니었다면 저희 모두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정진호의 눈치를 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인상을 구기고 있던 재준이란 녀석도 결국에는 고개를 숙여왔다.
“제, 제가 잠시 흥분한 것 같습니다. 죄송… 합니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주먹.
말을 잇기가 힘든지 나를 제대로 쳐다보고 있지도 않다. 정황상 사과는 해야 된다고 생각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사과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성향이기도 했고, 사과하는 표정도 아니었다.
오히려 화를 참아내고 있는 표정이다.
“괜찮습니다, 재준 씨.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도 조금 경솔했었고… 어떤 말로도 위로 드릴 수 없겠지만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물론 나도 진심은 아니다.
“죄송… 합니다.”
억지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딱히 사과를 받고 있다는 기분이 들지는 않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기분은 좋다.
‘푸흐흣.’
녀석이 분노 조절 장애자가 아니었다면 계속해서 고개를 숙여야 했던 것은 내가 됐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 녀석보다 걱정되는 것은 당연히 정하얀의 존재.
‘이거….’
만약에 박혜영 때와 똑같은 일을 벌이는 것을 생각 중이라면 난감해지는 것은 이쪽이다.
이미 박혜영 사건의 범인은 정진호라고 못을 박아놓은 상황.
갑자기 정진호의 똘마니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진 이후, 다시금 녀석이 사지가 절단된 채로 발견된다면 김현성은 정하얀을 의심할지도 모른다.
물론 나도 함께 용의자 선상에 오를 것이다.
말리고 싶지만 표정을 보면 말려지지 않을 것 같은 느낌.
얼마나 주먹을 꽉 쥐었는지 손톱으로 상처가 난 손바닥을 보니 정하얀이 녀석을 공격하는 건 이미 기정사실화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나쁘진 않아.’
조금 더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면 나쁘지는 않다.
단순하게 생각해 보면 정하얀이 직접적으로 움직여 준다는 건 이쪽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니까.
김재준이 죽는다면 정진호는 손발을 잃는 것이나 다름없다.
‘저건 왜….’
그러나 떨어져 나간 내 이빨을 남몰래 집어 드는 정하얀의 모습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다.
“일단은 움직이겠습니다, 기영 씨.”
“네. 그렇게 하도록 하죠. 소란을 일으켜 죄송합니다.”
살짝 몸을 일으키자 마치 부축이라도 해주겠다는 듯이 이쪽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가져다 대지만 그 정도 상처는 아니다.
그래도 일단은 붙어 있는 것이 정답.
방아쇠를 당기는 타이밍은 이쪽이 정해 줘야 한다.
자신의 이상한 모습을 들키는 것을 싫어했으니 아마 내가 옆에 붙어 있다면 당장은 터지지 않으리라.
“걸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혹시라도 힘드시면….”
“아니, 정말로 괜찮습니다. 현성 씨. 말씀대로 일단은 이곳을 빠져나가도록 하죠.”
“네.”
철문은 아직도 굳게 닫혀 있다.
퀘스트가 끝나기 전에는 열리지 않을 수도 있고 아니면 외부에서만 열 수 있게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이 던전에 있는 퀘스트들을 완료해야 된다는 것.
공교롭게도 퀘스트의 이름 역시 생존이다.
“어쩌면 그 여자가 말했던 생존 혹은 공략이라는 게 이곳에서의 퀘스트를 말하는 걸지도 모르겠군요.”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한 정진호의 말.
아무 말이라도 하고 싶을 것이다.
정하얀을 포함한 모두가 정진호와 똘마니들을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거리감을 좁히려고 발악하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다.
어울려주지 않을까 생각하기는 했지만 마침 나도 비슷한 걸 생각하고 있던 참이다.
“저도 같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1층은 사실 아무런 의미도 없고 이곳에서의 생존과 공략이 주가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생존이라는 게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나 괴물들을 피하거나 이겨내는 게 조건이라면 동시에 공략 퀘스트 역시 해결되는 것이니까요. 만약에 이 가설이 맞다면 1층은 정말로 아무 의미가 없는 장소였겠군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곳에서 생존과 공략을 동시에 해결해야 된다는 소리다.
살짝 김현성을 바라보니 부정하지는 않는 것 같은 느낌.
선두에서 길을 찾느라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다른 소리가 없는 것을 보면 나와 녀석의 가설이 맞는 것 같았다.
1층에서 여자가 말했던 생존과 공략, 두 가지가 모두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생존은 이해가 가지만….”
“어쩌면 이곳에는 보스 몬스터 같은 게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
“그게 일반적이니까요. 상태창이나 직업 같은 것을 보면 이곳은 온라인 게임과 제법 유사합니다. 만약 튜토리얼이 아니었다면 공략을 위한 여러 가지 조건들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단순하게 생존과 공략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던전이라고 한다면 조금 다른 괴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괴물을 죽이는 게 아마 공략이 되겠죠.”
“저도 비슷한 생각입니다, 기영 씨.”
“단순한 추측입니다. 두 번째로는 길을 찾는다는 선택지가 있을 수도 있겠죠.”
“밖으로 빠져나가는 길 말씀이시군요.”
“네. 밖으로 빠져나가는 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저희 모두를 밖으로 나가게 해주는 장치가 있을 수도 있을 겁니다. 몇 가지가 더 있겠지만 생각나지는 않는군요.”
아니면 말고, 그냥 누구나 할 수 있는 추론이고 머릿속에 있는 개소리를 던져본 것에 불과하다. 정진호도 심지어는 유석우도 같은 걸 생각하겠지만 직접 입 밖으로 내뱉는 것과 내뱉지 않는 건 차이가 있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계시는군요. 기영 씨는….”
유석우가 중얼거렸다.
말에 조금 가시가 있는 것 같은 느낌. 불덩이를 일부로 집어던진 것이 아니냐고 묻고 있는 것 같았지만 당연히 웃어 넘겼다.
이쪽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건 저쪽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망상에 불과합니다.”
단순한 망상이다.
계속해서 길을 걸어도 아까같이 괴물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간헐적으로 눈에 띄기는 했지만 아까 같은 전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혹시나 다른 소란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최대한 빠르게 정리했고 아까 같은 사고도 벌어지지 않았다.
체력이 떨어져서 그런지 이동 속도는 굉장히 느려졌지만… 조금의 여유를 찾을 수는 있었다.
그 와중에 마력이 자동으로 차고 있는 것은 웃을 수 있는 부분.
김현성이 간혹 인상을 찌푸린다든가, 정하얀이 김재준을 빤히 바라보는 경우도 있었지만 다행히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특히나 정하얀 같은 경우에는 뭐가 그리 억울하고 분했는지 입 안이 부운 나를 볼 때마다 가끔 혼자서 눈물을 쏟아댔고 고개를 흔들며 혼자 중얼거리는 시간이 많아졌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보이자 조금 당황했던 건 박덕구 쪽.
여자에 익숙하다고 호언장담했던 것과는 달리 정하얀을 어떻게 위로해 줘야 할지 감을 못 잡는 것 같았다.
누가 봐도 상황이 이상하니까.
사실 눈물을 보이는 것보다 더 당황스러웠던 것은 고개를 숙이며 작은 목소리고 속삭였던 부분이다.
너무 목소리가 작아 가까이에 있는 나에게도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다.
가끔씩 귀에 꽂히는 단어들로 미루어 추측해 봤을 때는….
‘죽여야 돼’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굳이 알아들었다는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게 나에게도 이로울 테니까.
“제가 복수해 줄게요.”
들리지 않는 척하는 게 더 좋다.
이건 확신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