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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33화 (33/1,590)

# 33

회귀자 사용설명서 033화

적(1)

정진호 녀석의 입장에서는 어이가 대문을 박차고 가출한 정도의 수준일 것이다.

“무, 무슨 개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석우 씨.”

“제가 해냈습니다! 이 개, 개새끼를! 찔렀다고요! 형님!”

“이 미친 자식이!”

잠깐 동안 시끄러워진 공간.

정진호는 곧바로 검을 빼들었다.

당연하지만 나는 그게 우리를 공격하려고 하는 의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죽이려는 거야.’

유석우를 죽이고 이 상황을 수습하려고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단 죽여 입을 막고 사태를 나중에 정리하려는 것이 틀림없다. 지금 정진호가 선택할 수 있는 건 그 정도밖에 없으니까.

이런 곳에서 우리 팀과 함께 드잡이를 하기 싫은 것은 분명하다.

만약에 검에 찔린 것이 김현성이나 박덕구라면 승산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무척이나 아쉽게도 검에 찔린 것은 최약체 이기영이다.

‘죽이게 하면 안 돼.’

반사적으로 김현성을 바라봤을 때 녀석 역시 빠르게 자리를 옮기는 것이 보였다.

상황파악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정진호의 똘마니 김재준은 정진호가 뛰쳐나간 걸 전투의 신호로 받아들였는지 단검을 들고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

“이 거지같은 쓰레기가! 네가 죽였어! 기철이를 네가 죽였다고!”

물론 이기철은 내가 죽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옆에 있는 덕구를 가만히 내버려 두고 이쪽에 달려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공략을 진행하는 동안 이 파티의 공식적인 인기인이 된 모양.

후방에서 안전하게 보호받아야 할 내가 순식간에 메인 탱커가 되어버린 것이다.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박덕구의 상황 판단 능력이 조금 느렸다는 것.

적어도 두 번째 공격은 막아줄 줄 알았지만 김재준이 단검을 치켜들고 이쪽으로 달려 들어오는 것을 막지 못했다.

‘제길.’

정확히 목을 노리고 들어오는 듯한 느낌에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리니 등 뒤로 단검이 내리 꽂혔다.

‘아파!’

“아아아아악!”

아프다.

박덕구가 정신을 차린 것은 두 번째 공격이 내리 꽂힌 직후.

커다란 방패로 놈의 몸을 밀치는 것은 물론,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내 앞을 가로막기 시작했다.

뒤에 있는 유석우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조금 어안이 벙벙한 모습.

심지어 나를 찌른 검을 잡고 부들부들 몸을 떨고 있다.

녀석 역시 누군가를 찌른다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떨거지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당연히 정진호와 김현성.

“오해입니….”

라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전에 둘의 검이 부딪쳤다.

‘됐다.’

쾅!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정진호가 저 멀리 떨어져 나가는 게 시야에 비친다.

전투는 이미 시작됐다.

시나리오는 완성됐고 둘을 무대 위에 올렸다.

남은 것은 이 사태를 수습하는 것뿐이다.

어서 빨리 치료해 달라고 하고 싶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이 문제.

생전 처음 느껴보는 격통에 비명 말고는 아무런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치유 마법이 내리 꽂힐 거라고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들려온 것은 정하얀의 비명.

“싫어어어어어!”

‘아파….’

“이놈들이!! 형님!”

“싫어어어어! 싫어어어어어!!”

비명을 지를 시간에 제발 치료해 줬으면 좋겠다.

너무나도 급박하게 굴러가는 상황에 나 역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지경.

앞에서는 괴물들이 달려들고 있었고 정진호와 김현성은 검을 부딪치고 있다.

박덕구는 앞을 막아야 하는지 유석우가 있는 뒤를 막아야 하는지 아직 갈피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일단 쓰러져 있는 나를 최대한 보호하려고 하고 있는 모습이다.

“형님! 형님!!”

“아직 안 뒈졌어….”

“누님! 반지! 반지! 반지 빨리 외우쇼! 반지!”

“아아아아아아아! 오빠! 오빠! 오빠!”

“진정하고 반지! 반지!”

“아!”

정하얀이 패닉할 거라는 것은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사태가 조금 더 심각해 보였다.

박덕구가 정하얀의 손을 꽉 붙든 이후에야 정하얀은 자신에게 뭐가 있는지 생각난 모양이다.

“치… 치유! 치유!”

나에게 쏟아져 내리는 빛.

순식간에 몸이 회복되는 것은 아니지만 묘하게 기분 좋은 빛이 확실하게 내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다.

고통은 여전하다.

그러나 울컥 울컥하고 상처 부위에서 혈액이 나오는 감각은 없다.

‘죽을 뻔했다.’

조금만 더 늦었어도 아마 죽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오빠. 오빠. 오빠.”

“형, 형님!”

“괜찮… 아.”

조금은 가벼워진 몸으로 다시 한번 주변을 살펴본다.

말도 없이 검을 부딪치고 있는 김현성과 정진호.

누가 봐도 김현성이 몇 수는 위다.

당연히 놈의 변명 따위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결국에 우리의 메인 빌런은 유석우와 김재준을 버리고 등을 돌려 이곳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잠깐 동안 이쪽을 바라보던 김현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급하게 말을 이었다.

“덕구 씨! 하얀 씨와 기영 씨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정진호를….”

“알, 알겠소!”

우리가 상황을 정리할 능력이 있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높은 민첩 수치를 가지고 있는 둘인 만큼, 이쪽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은 순식간.

김재준도 상황이 꼬였다는 것을 이해했는지 곧바로 몸을 빼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녀석 역시 유석우를 데리고 가지는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괴물을 막아야 하는 건 박덕구 쪽.

“이 잡놈들이!”

다시 한번 유석우가 검을 휘둘러 오는 것이 보인다.

물론 이번에는 공격에 맞지 않았다.

박덕구가 방패로 놈을 후려 쳤으니까.

퍽!

유석우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떠 벽에 처박혔지만 동시에 괴물 새끼들이 이곳에 달려들었다.

“마력 방패!”

김현성이 준비해준 두 번째 보험이 놈들의 길을 막는다.

동시에 주문을 외우는 것은 순식간.

김재준과 정진호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김현성이라면 둘 다 잡아 올 수 있다.

아니.

“형, 형님 누님이 없어졌….”

김재준은 정하얀이 잡아줄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덕구야. 일단 눈앞에 있는 괴물 새끼들부터 처리하고 곧바로 따라갈 테니까.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다.”

“그러면 다행이지만….”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나 역시 보지 못했다.

그새 주문을 외우고 김재준을 따라 나선 것이다.

민첩 수치가 높은 녀석을 따라 잡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이쪽도 모를 정도로 서두른 것을 보면 아마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올 것이다.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을 맞닥뜨린 탓인지 박덕구의 얼굴 역시 눈물범벅.

내가 쓰러져 피를 흘리는 모습이 꽤나 충격적으로 보였던 모양인 것 같아 녀석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울지 마, 돼지 새끼야.”

“누, 누가 울었다는 거요?”

멍 때리던 녀석 덕분에 몸에 단검이 한 번 더 박히기는 했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 * *

‘제기랄.’

뭐가 어떻게 돌아간 건지 이해하기 힘든 상황.

‘유석우 멍청한 놈. 쓰레기 같은 놈.’

놈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사실 유석우만 멍청했던 게 아니다.

정진호가 검을 뽑은 걸 공격 신호로 받아들이고 냅다 단검을 꽂아버린 자신 역시 마찬가지.

조금 더 냉정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함께 움직였던 친우인 이기철.

이기영 그 때려죽일 개자식이 친구를 죽였다는 생각 때문에 냉정을 찾지 못했다.

‘계획은 취소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

말로는 미안하다 말하면서도 미소를 보이거나 이빨을 보이는 녀석 때문이었다.

자제해야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참지 못했다.

그 표정, 그 표정이 문제였다.

비웃는 것 같은 그 표정.

대놓고 도발하는 그 표정.

속으로 얕잡아 보는 듯한 놈의 눈빛과 미소가 문제였다.

안 그래도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간 상황에서 배에 검을 맞은 녀석을 발견했다.

그 상황에서도 묘하게 즐거운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놈의 얼굴을 발견한 순간, 이성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정진호 개자식 역시 문제.

애초에 녀석과 동료애 따위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토록 헌신짝 버리듯이 버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상관없어.’

그렇지만 그건 이제는 상관없는 이야기.

어차피 녀석과는 필요에 의해서 만나던 사이, 놈이 자신을 이용한 만큼, 자신도 녀석을 이용하면 된다. 간단한 이야기다.

‘일단.’

일단은 이곳에서 벗어난다.

정진호는 방금 그 상황에선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다.

길에 눈이 밝은 만큼 정진호가 도망간 길을 충분히 따라갈 수 있다.

지금도 놈이 도망간 흔적이 확실히 눈에 비친다. 정진호를 따라나선 김현성을 함께 처리하고 이번에는 조금 더 확실하게 뒤를 친다.

이기영 그 개자식을 찢어 죽이지 않고서는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활과 화살을 챙기며 최대한 빠르게 움직이려고 했던 바로 그때였다.

‘뭐야.’

외워놓았던 길과 다르다.

틀림없이 자신이 알고 있는 길이 아니다.

궁수로 전직을 한 이후에 이런 경우는 또 처음.

뭔가 던전 자체에 문제가 있는지 궁금했지만 틀림없이 그건 아니었다.

정진호와 김현성의 흔적 역시 한쪽 벽면을 마지막으로 끊겨 있는 상황이다.

“뭐야….”

살짝 주변을 두리번거렸을 때 정체를 알 수 없는 바람이 불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어….”

한쪽 다리가 떨어져 나간 것을 느낀 것은 조금의 시간이 지난 이후.

“아아아아아아악!!”

‘뭐야…. 이게 뭐야…. 뭐야!’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가 없다.

갑자기 어디에선가 바람이 불어온 이후에 다리 한쪽이 떨어져 나갔다.

뭐가 자신을 공격했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공포에 질리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아아아아아아악!”

다시 한번 바람이 불어온 이후에는 손목이 잘린다.

“뭐야! 뭐야아아아아악!”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마법의 존재.

다시 한번 필사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을 때 어둠 속에서 살짝 모습을 드러내는 여자가 시야에 비쳤다.

처음 보는 것 같은 여자라고 생각했지만 분명히 처음 보는 얼굴이 아니다.

‘정하얀?’

무척이나 붉어진 얼굴.

‘눈이….’

눈이 이상하다.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고, 입고 있던 옷도 엉망이다.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쓱쓱 닦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당신한테는 사… 사과하지 않아요.”

“뭐….”

“절대로 용서 못해. 이… 멍청이! 전, 전부 죽여야 해요. 오빠한테 해를 끼치는 인간들은 모두 죽여야 해.”

“무슨 개소리… 아아아아아악!”

“입, 입 다물어요! 그 입 다물란 말이야! 이… 이… 바보가! 얼마나 아팠을까. 우리 오빠… 히끅… 얼마나 아팠을까요. 처음에 맞았을 때도… 분명히 아팠을 거예요.”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빠르다.

눈앞에 있는 이 여자는 정상이 아니다.

‘씨발… 씨발….’

잘못 걸렸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순식간.

이기영 그 개자식에게 이상하게 집착하는 것 같긴 했어도 이 정도로 미친년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주문을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몸이 먼저 불길함을 감지한 것은 당연지사.

어떻게든 기어서 이 상황을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빠져 나갈 수 있을 리가 없다.

엉금엉금 기어서 도망치기에는 이곳이 너무 넓다.

힘없는 여자의 팔이 머리카락을 잡아 얼굴을 들어 올리는 것이 느껴진다.

“시, 시간이 없으니까 빨리 끝내야 되는 게 너무 아쉬워요. 우리 오빠가… 우리 오빠가 당한 걸 몇 십 배로 돌려줘야 되는데… 그렇게 할 수는 없으니까. 히끅….”

“살려줘… 나는… 나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거짓말쟁이 말은 안 믿어요…. 공기 폭탄.”

오른손에 들려 있는 것은 전에도 한 번 본 적이 있는 마법이다.

여러 괴물을 피 떡으로 만든 마법.

사람 머리통만 했던 그때와는 다르게 이번에 보이는 것은 아주 작은 크기.

뭘 하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을 때, 다시 한번 미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입 벌려요.”

“뭐… 뭔….”

“아… 하시라고요. 당, 당신도 똑같이 느껴봐야 되잖아요. 우리 오빠가 얼마나 아팠는지 당신도 느껴봐야 해요.”

저도 모르게 입을 꽉 다물게 된다.

저딴 게 입 안으로 들어왔다가는 어떻게 될지 상상하기도 힘들다.

그렇지만 턱을 억지로 벌리는 미친년은 결국에는 작은 폭탄을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입 안으로 원하지 않은 이물질이 들어오는 느낌에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식은땀은 계속해서 흘러나왔고 괜스레 몸이 벌벌 떨려온다.

이후에 일어난 일을 상상하기도 전에 뇌를 뒤흔드는 폭발음이 들린 것은 바로 그때.

쾅!

“우워아에에에에엑!”

입 안에서 이빨들의 파편이 터지며 혓바닥과 목, 입천장과 볼을 터져 나온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고통 때문에 뇌가 녹아버릴 것 같았다는 것.

“아프죠? 당신도 아프잖아요. 그런데 왜… 그러셨어요.”

‘미친년… 미친년… 미친년….’

“피 튀었잖아요, 멍청이.”

“살여져… 웨에으으엑 살….”

심지어 자신의 겉모습을 단정히 하고 있는 모습은 뭔가 괴기스럽다.

산발이 된 머리를 차분히 정리하고 얼굴에 튄 피를 소매로 슥슥 닦는다.

“빨리 끝내야 되니까… 이게 마지막이에요. 다음부터는 그러면 안 돼요.”

제발 이러지 말아 달라고.

제발, 살려달라고 머릿속으로 떠올린다.

공포심 때문에 말이 제대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의식은 점점 흐려지는 중.

어떻게든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정신을 붙잡았을 때, 마지막일 것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 죽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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