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회귀자 사용설명서 035화
새로운 직업이 개방되었습니다(1)
조금 뜬금없는 타이밍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까지 경험치가 축적되고 있었을 테니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첫 번째 직업을 얻은 이후로 김현성과 함께 다니면서 괴물들을 많이 처리하기도 했고 이곳에 들어온 이후에도 놈들을 쉬지 않고 때려잡았다.
어쩌면 오히려 조금 더딘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조금 재미있었던 사실은 유석우를 죽인 이후에 새로운 직업이 열렸다는 것.
‘인간을 죽여도.’
경험치는 오른다.
아마 그뿐만은 아닐 것이다.
모든 행동이 경험치화되고 있을 확률이 높다.
기여도나 막타 같은 것을 수치화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제대로 된 데이터를 얻기는 힘들겠지만 쉼터에 있는 인원도 스탯이 오르는 걸 본 적이 있다.
여러 가지 방향이나 마법에 대한 사고는 지력을 올려주고 마력을 사용하는 것은 마력을 올려준다.
체력이나 민첩 같은 모든 스탯이 마찬가지다.
아마 이 직업 역시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다.
[새로운 직업이 개방되었습니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직업을 선택해 주세요.]
[개방된 직업을 열람합니다.]
[소환사-희귀 등급]
[마창사-희귀 등급]
[흑마법사-희귀 등급]
[연금술사-희귀 등급]
[화염마법사-희귀 등급]
‘선택지가 많아.’
혹시나 사기꾼 같은 직업 같은 게 있으면 어떡하나 조금 걱정했었는데 그렇지는 않은 모양.
오히려 무척이나 다행이다.
모든 직업이 희귀 등급이라는 것에 일단 점수를 주고 싶은 심정.
자세히 훑어보지는 않았지만 일단 나쁜 직업 같은 건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지휘관이 없는 게 가장 다행스러운 부분이다.
당연히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내 전직 정보를 알아낸 박덕구가 다시 한번 지휘관 앵무새가 되는 건 아닌지 걱정했기 때문이다.
말은 안 했지만 그 당시에도 의외로 호소력 있는 박덕구 녀석의 말 덕분에 세 번 정도는 고민했었다.
사실 아직까지 지휘관을 선택했으면 어땠을까, 고민했을 정도다.
이제는 지휘관의 주박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사실이 조금 고마웠다.
계속해서 상태창을 볼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일단은 빠르게 한 번 훑어볼 수밖에 없었다.
슬쩍 상태창을 바라보자 여러 가지 정보들이 쏟아졌다.
[소환사-희귀 등급]
[소환사는 앞서 나가 싸우는 직업이 아닙니다. 소환한 사역마나 정령, 혹은 환수 계약을 통해 싸우는 직업군입니다. 이후에는 테이머, 정령사, 환수소환사 같은 소환사 관련 직군들로 전직할 수 있습니다. 체력이 1, 지력 1, 마력이 2 올라갑니다.]
‘나쁘지 않아.’
소환사 같은 경우에는 정말로 마음에 든다.
나를 대신해 앞으로 나가 싸워주는 환수나 정령의 존재가 있다는 점이 그렇다.
보통 소설이나 게임 속에서 나오는 친화력이라는 재능이 나에게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소환사가 직업으로 나온 것을 보니 내 성향과도 잘 맞는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마창사-희귀 등급]
[마법과 창을 동시에 사용하는 중거리 직군입니다. 전장의 중심을 잡아주는 마창사는 마법과 창을 동시에 활용해 대, 소규모 전투에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직업입니다. 창과 마법에 대한 중급 지식을 습득합니다. 이후에 전직할 수 있는 직업군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민첩이 2, 마력이 2 올라갑니다.]
[흑마법사-희귀 등급]
[흑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원거리 직업입니다. 흑마법은 기존에 가지고 있는 마법 상식을 완전히 뒤집는 새로운 차원의 마법입니다. 악마에게 힘을 빌려온다는 개념 때문에 일부 종교 집단에서는 흑마법에 강한 반발을 느끼기는 하지만 그 파괴력만큼은 다른 직업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기초 흑마법 지식을 습득합니다. 마력이 4 올라갑니다.]
마창사는 일단은 패스.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적어질 것이다. 미약한 근력이나 민첩으로 창을 휘둘러봤자 효율일 리 없다.
그렇지만 흑마법사의 경우에는 조금 다르다. 마력 스탯 +4가 일단 탐이 나기도 하고 기존의 마법 상식을 뒤집는다는 것도 그렇다.
“으음.”
그렇지만 종교 집단에게 반발을 느끼게 한다는 게 조금은 고민되는 부분.
만약 튜토리얼이 끝난 뒤 내가 갈 곳이 중세 시대를 기반으로 한 판타지 세계라면 아마 미친 종교집단이 눈에 불을 켜고 나를 쫒을 것이다.
가장 안전해야 할 내가 그런 상황에 처하는 것은 역시나 사양이다.
[연금술사-희귀 등급]
[연금술사는 기본적으로 마법화학에 대해 연구하고 공부하는 직군입니다. 이들은 마도와 마법 그리고 마력에 대해 항상 새로운 방향과 발전을 모색합니다. 호문클루스 연금지식과 연금술에 관한 기초 지식을 습득합니다. 이후에는 약물제조사, 연금마법사, 호문클루스 전문가 등의 직군으로 전직할 수 있습니다. 지력이 2, 마력이 2 올라갑니다.]
[화염 마법사-희귀 등급]
[모든 종류의 속성 마법사 중에서도 화염 마법사의 파괴력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입니다. 강한 화력을 바탕으로 아군을 지원하는 원거리 직군입니다. 소비 마력이 많기는 하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화력은 적도 아군도 깜짝 놀라게 할 것입니다. 이후에는 폭렬 마법사, 폭탄 마법 전문가 등으로 전직할 수 있습니다. 마력이 5 올라갑니다.]
당연하지만 화염 마법 전문가는 무조건 패스.
물론 생각해 볼 여지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마력을 5나 올려준다는 사실이 그러했고 상상을 초월하는 화력이라는 말에도 눈길이 갔다.
잘 써봐야 한두 번, 단점은 확실하지만 왠지 모르게 나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연금술사?’
사실 연금술사도 그다지 나쁘게 보이지만은 않는다.
애초에 마력에 비해 지력이 높은 나와 가장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있는 직군이다.
전투 능력이 다른 직업군에 비해 조금 떨어지는 것 같기는 했지만 호문클루스, 연금 마법 그리고 뭔가 수상해 보이는 약물제조사 같은 직업은 내 부족한 마력을 메울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확실히 제외할 수 있는 건 마창사 하나.
나머지 직업은 모두 저마다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 선택보다는 조금 쉬울 거라고 생각한 내가 바보 같아질 정도.
첫 번째보다 지금이 더 중요하다.
이를 테면 전공을 선택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번 선택 한 번에 앞으로 나아갈 대륙에서의 위치가 정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리가 아파왔다.
물론 급한 것은 아닌 만큼 조금 더 두고 봐야겠지만 수많은 전공 중 어느 쪽을 심도 있게 파고들 것인지에 고민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
“형님?”
“아. 미안하다, 덕구야. 하얀이 부터 찾으러 가야지.”
“새로운 직업이라도 얻으셨소?”
“응. 조금 갑작스럽네. 아무래도 같은 인간을 죽여도 경험치가 오르는 모양이다.”
“끄응….”
슬쩍 말을 아끼는 박덕구의 모습이 보였다.
다행이지만 크게 충격 받은 것 같지는 않은 모습.
혹시나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런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뇌가 근육으로 꽉 찬 놈이라고 부르고는 있었지만 제 딴에는 고민이 많은 것이다.
물론이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
애써 시선을 돌리고는 있지만 오늘의 기억은 아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덕구 녀석도 일단 상황 자체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긴 한 모양. 묘한 침묵이 부담스러웠는지 놈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김현성 그 형씨랑 누님이 무사한지 모르겠소.”
“당연히 무사할 거다. 김현성은 물론, 하얀이도 별일 없을 거야.”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거요? 그, 마력이라는 것 때문이요?”
“비슷해. 거리가 멀어질수록 감지하기 힘들지만 아마 너도 마력이 생기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걸.”
물론 그들이 무사하다는 걸 마력에 의한 감지로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스펙과 성향을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한 명은 회귀자고 한 명은 천재 마법사이자 괴물이다.
어쩌면 이미 일을 끝내고 이쪽으로 오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
역시나 조금 발걸음을 옮기자 곧바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정하얀이 시야에 비쳤다.
나와 박덕구를 바라보자마자 큰 눈을 뜨고 달려오는 모습은 조금 귀여웠지만 소매에 묻어 있는 혈액을 보니 그렇게 반갑지는 않았다.
“오빠… 오빠! 오빠! 오빠!”
달려와 꽉 안기는 모습은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 적극적.
그만큼 그녀가 나를 걱정한 거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기분이 좋아진다.
“어디 다치진 않으셨어요? 아프지는 않으세요? 이제 괜찮으신 건가요? 흐윽… 유석우는… 그… 그 사람은 어떻게….”
“죽었어.”
“아아아아. 다행이네요.”
정하얀이 충격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받아들이는 게 너무나도 빠르다.
착각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은 아쉬워하는 것 같은 표정.
이유를 묻기는커녕 오히려 가슴을 쓸어내리며 살짝 웃는 모습에 박덕구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는지 정하얀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누님, 어디 갔다가… 지금 온 거요?”
“아… 그… 저도 모르게….”
잠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모습.
아마 따로 변명을 생각해 오지 않은 것 같았다.
내가 쓰러진 당시에 그렇게 소리를 질러댔으니 아마도 그런 생각을 할 여유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런 한편 겉모습은 또 무척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보면 나에게는 무척 잘 보이고 싶은 모양.
조금 당황하는 것 같은 얼굴에 이번에도 도움을 줘야겠다고 생각해 슬쩍 입을 열었다.
“현성 씨를 도와주러 간 거였지?”
“아니에요, 오빠. 그, 그런 것 아니에요. 별로 관심도 없는 걸요…. 그냥 저는….”
“어?”
“현성 씨가 걱정된 게 아니에요.”
생각보다 더 과하게 반응하고 있다.
혹시나 자신이 김현성에게 관심이 있다는 오해를 받기는 싫은 것 같았지만 당연히 그런 의도로 물어본 것은 아니다.
“그냥… 너무 화가 나서….”
“아….”
“김재준 그 사람한테 너무 화가 나서… 저도 모르게 그랬어요.”
사실상 먼저 배에 검을 꼽은 건 유석우였지만 정하얀은 그 장면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다.
나를 주먹으로 치거나 등에 단검을 쑤셔 박은 놈의 모습이 더욱 인상적이었던 것이다.
그때의 기억이 생각났는지 다시 한번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져 내리기 3초 전이라는 것을 인지한 박덕구가 굉장히 난감한 표정을 하며 나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강원도 카사노바치고는 굉장히 어울리지 않은 모습. 허둥지둥하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연애 박사는 무슨….’
“아니. 아니. 아니.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 것 같소, 누님. 사실 나도 당장 뛰쳐나가고 싶었으니… 형님, 그러고 있지만 말고 어떻게 좀….”
“히끅. 그게 너무… 너무 계속 생각나서….”
“누님, 이제 다 괜찮아졌으니까 울, 울지 마쇼. 이제 다 끝났으니까… 모두 무사하고 형님 상처도 다 나았다니까?”
“흐그윽….”
“아이고… 형님! 누님 좀 어떻게… 이미 눈도 퉁퉁 부었는데… 이거 어떻게….”
은근슬쩍 이쪽을 바라보며 위로해달라는 눈빛을 보내는 녀석을 보니 괜스레 웃음이 나온다.
조금은 아팠던 머리가 정리되는 것 같은 느낌.
결국에는 녀석의 바람대로 살짝 정하얀을 안아주자 어깨가 들썩이는 게 보였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오빠….”
뭐가 죄송하다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등을 토닥여 주었다.
“괜찮아.”
“죄송해요, 오빠. 히끅.”
“큼.”
오히려 고맙다.
뭔가 일이 훈훈하게 마무리된 것 같은 느낌이다.
더러웠던 기분이 조금 좋아진다.
정하얀을 위로하며 슬쩍 박덕구를 바라봤을 때였다. 묘하게 함박웃음을 짓는 놈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
‘저 돼지 새끼가….’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을 지경. 물론 정하얀이 아까와는 다르게 진정되었다고는 하지만 너무나도 태연하게 이쪽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다.
당연하지만 나와 정하얀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에서 나오는 훈훈한 미소가 아니다.
그것보다는 조금 더 저열하고 비열해 보이는 미소.
‘설계였나….’
나에게 당한 유석우의 기분을 아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저….’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입니다, 누님.”
강원도 연애 박사 박덕구.
그게 거짓이 아니라 진실일 가능성에 대해 떠올리게 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