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회귀자 사용설명서 036화
새로운 직업이 개방되었습니다(2)
실실 웃고 있는 박덕구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대충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다.
아마 내 기분이 조금 싱숭생술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사랑하는 정하얀으로 잠깐이나마 마음속에 있는 꿀꿀한 기분을 털어버리라는 의도였겠지만 그다지 반갑지만은 않다.
내 품에 안긴 채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정하얀 때문.
“오빠….”
울먹이는 것은 일단 논외로 치더라도 뭔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듯한 느낌.
체취라도 맡고 있는 모양인지 가슴 속에 얼굴을 파묻은 채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아마 김현성이 제때 도착하지 않았 더라면 몇 시간이고 그러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 계셨군요.”
생각보다는 조금 늦었다.
사실 정하얀보다는 김현성이 조금더 빨리 끝날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다.
겉모습은 말끔하다.
그렇지만 옷이 조금 그을렸다든가볼 쪽에 남은 작은 자상으로 봤을때 정진호와의 전투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회귀한 김현성은 당연히 괴물이라고 부를 만한 스펙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진호 역시 만만치 않았던 셈.
‘괴물들.’
그렇지만 아마 일방적이었을 것이 다. 정진호가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인 스탯과 경험의 차이는 분명하다.
끽 해봐야 마법으로 변수를 만드는게 고작이었을 터.
조금 홀가분해 보이는 놈의 얼굴을 보니 정진호는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은 모양이다.
“다른 이들은….”
조금은 민감한 질문.
정하얀이 엉뚱한 소리를 하기 전에 내가 급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죽였습니다.”
“아.”
당연하지만 이곳에서 김현성이 나를 살인자라 비난하지는 않을 것이 다.
후환을 남기는 것보다는 오히려 더욱더 깔끔한 선택.
선의의 중재자라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 녀석이었지만 이런 이들을 살려두면 안 된다는 사실을 나보다 더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정진호는….”
내가 살짝 운을 띄우자 녀석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침울한 기색을 보이는 박덕구 그리고 싱숭생숭한 나와 울먹이는 정하얀.
파티가 전체적으로 조금 기죽은 느낌이었다.
물론 정하얀 같은 경우는 조금 달랐지만 첫 살인에 대한 충격으로 침울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
결국 녀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어왔다.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신뢰할 수 있는 이 파티의 리더가 동료들의 멘탈을 챙겨주기 시작한 것이다.
“알고 있….”
“처음부터 이쪽을 노리고 온 것 같았습니다. 석우 씨를 어떻게 포섭했 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중간부터 석우 씨 역시 그들의 계획에 동참한 모양입니다. 아마 저희가 당했다면 쉼터에 있는 이들 역시 무사하지 못했을 겁니다.”
“…….”
“힘드시겠지만 옳은 일을 하신 거라고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음….”
“옳은 일을 하신 겁니다. 어쩌면 앞으로 이런 일이 잦아질지도 모릅 니다. 저희가 있는 이곳은 튜토리얼일 뿐이고 밖은 더 가혹할지도 모릅 니다. 힘드셨겠지만 이런 결단을 비난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지금뿐 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습 니다만… 부디 이겨내 주시길 바랍 니다.”
“감사합니다.”
“뭐… 고맙소.”
나름대로 훌륭한 연설이었다.
사실 맞는 일이다.
절대로 틀린 일은 한 것은 아니다.
녀석들이 살아 있었다면 쉼터가 위험해지는 것은 물론, 밖으로 나간 이후에도 많은 피해자를 만들었을 것이다.
비록 유석우가 내 경험을 위한 발판이 되었다고 한들, 김현성이 말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쓰레기를 치운 거야.’
말 그대로 쓰레기를 치운 것에 불과.
죄책감을 가질 이유는 없다.
“기영 씨는 조금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습니다. 아마 현성 씨가 선물해 준 반지가 없었다면… 죽었을 겁니다. 두 번이나 목숨을 구원 받은 게 되는 거군요.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상처는….”
“괜찮습니다. 말끔히 나았습니다.”
한 차례 연설이 끝난 이후 김현성은 조금 기분이 좋아진 것 같다.
자신이 생각한 대로 일이 풀렸으니 인상을 구길 이유가 없다.
자세하게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알 수 없지만 왠지 모르게 조금 뿌듯해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계획대로 정진호 무리를 처리했고 그것도 모자라 우리들에게 빚까지 만들었다.
어차피 같이 움직이기로 한 동료로 생각하기는 했었겠지만 이번 사건이 우리가 조금 더 끈끈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도 마찬가지.
같이 고생하고, 같이 위기를 겪고, 같이 이겨냈다.
이 네 명은 밖에 나가서도 확실히 좋은 관계를 유지할 거라 확신할 수있다.
안정감 있고 승차감 좋은 김현성 버스에 타고 있는 걸 상상하는 것만 으로도 졸음이 몰려올 지경.
아니, 긴장이 풀린 느낌이다.
박덕구와 정하얀만으로도 이미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역시 우리 회귀자의 승차감은 확실히 남다르다.
“조금 피곤해 보이시는데 오늘은 가까운 곳에서 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내 생각도 그게 좋을 것 같소. 형님도 그렇고… 누님도 조금 피곤해 보이니까.”
“예.”
정하얀 같은 경우에는 마력의 여유가 조금 있을 것이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기는 김현성을 향해 입을 열었 다.
당연히 직업에 대한 상담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선택하는 건 내몫이지만 미래를 알고 있는 김현성을 떠보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성 씨.”
“예. 말씀 하시죠.”
“새로운 직업이 열렸습니다.”
“아.”
당연하지만 꽤나 반가워하는 표정 이었다.
“빠르군요.”
“예. 아무래도 마법을 써서 괴물들을 잡다 보니….”
“혹시 어떤 직업이 열렸는지 들을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박덕구는 물론 정하얀도 관심이 가는지 나를 보고 있다.
하룻밤 쉴 수 있는 곳을 찾으며 이야기를 하기에 괜찮은 주제이기도 했고 조금 처진 파티의 분위기를 살릴 수도 있는 적당한 소재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소환사, 마창사, 흑마법사, 연금술 사, 화염 마법사. 선택지가 많더군 요.”
“확실히 많은 것 같습니다.”
근처에 적당한 곳이 없었기 때문에 일단은 각 직업에 대한 단점과 이후에 선택할 수 있는 직업까지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이를 테면 화염 마법사는 마력이 많이 필요하다든지, 마창사 같은 경우에는 이후에 갈 수 없는 직업이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내가 정확한 스탯을 밝힌 적은 없지만 아마 김현성 정도라면 내가 어느 정도의 스펙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실례지만… 기영 씨는 마력이 조금….”
“네. 다른 마법사들을 만나보지 못해서 자세하게는 알 수 없지만 가지고 있는 마력 자체는 낮은 것 같습 니다. 하얀이와 비교해도 그다지 높은 것 같지는 않더군요.”
“음….”
자세한 상담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개인 정보를 공개하는 것은 필수.
부족한 것을 굳이 숨길 이유가 없다. 보여줄 장점은 많이 남아 있으 니까.
“아마 화염 마법사 같은 경우에는 조금 더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같습니다. 기영 씨와 화염 마법의 궁합이 그리 나쁜 것 같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높은 마력을 요구한다면 이후에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으니 까요.”
“아, 저도 비슷한 생각입니다.”
어떻게든 기를 쓰고 힌트를 주려는 모습은 꽤나 귀여워 보인다.
녀석의 진짜 나이가 몇 살인지는알 수 없었지만 당장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나보다 어렸기 때문이다.
“마창사도….”
대놓고 말은 하지 못하지만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너 창질 잘 못 하잖아.’
그래도 1인분 역할은 충분히 해왔 다고 생각했는데 확실히 놈의 입장 에서는 어설프게 보였던 모양이다.
어차피 마창사는 선택할 생각도 없었지만 김현성의 저런 표정을 보니 괜스레 씁쓸해졌다.
‘그렇게 엉망이었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소환사, 연금술사, 흑마법사에서 고르는 게 조금 더 좋아 보이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흑마 법사는 추천해 드리기 어렵겠군요.
확신할 수는 없지만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적어도 이상태창은 저희들에게 거짓말은 하지 않으니까요.”
“음….”
“소환수를 유지하는데도 마력이 필요합니다만 어느 정도의 마력이 필요할지에 대해서는 감이 오지 않는군요. 오히려 연금술사가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높은 지력을 가지고 있는 기영 씨에게 적절할 겁니 다.”
“사실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연금술은 촉매로 마법을 발동하는 경우도 있을 것같아서….”
“그뿐만이 아닐 겁니다. 포션이나 많은 종류의 물약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소환수가 필요하면 이후에 호문클루스라는 대체 수단도 있으니더 유리하겠죠. 소환된 생명체가 아닌 만든 생명체에게는 많은 마력이 들어가지 않을 테니까요.”
조금 흥분한 것처럼 열을 올리고 있는 느낌.
나에 대한 데이터가 부족했던 첫번째와는 다르게 이미 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런 만큼 녀석의 추천도 믿을 만하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조금 기뻐 보이는 표정을 보니 점점 더 마음이 기울어진다.
‘희귀하구나.’
연금술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희귀한 것이다.
직업이 잘 열리지 않았을 수도 있고 사람들이 잘 선택하지 않은 경우도 있겠지만 아무튼 간에 연금술사 라는 직업 자체는 굉장히 희귀하다.
마찬가지로 사제 역시 희귀하다고 가정해 본다면 포션 같은 경우에는 조금 더 가치가 올라갈 것이다.
애초에 사제가 가지고 있는 신성력 에도 한계가 있다는 걸 생각해 본다면 질 좋은 물약은 꼭 필요한 물건.
소환사도 끌리기는 하지만 비슷한걸 2명이나 가지고 있는 걸 생각해 본다면 이후에도 다른 소환수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였다.
한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박덕구가 고개를 저으며 이 상담에 참전한 것이다.
“무슨 소리요? 형님이라면 당연히 흑마법사요.”
‘….’
“어둠의 힘을 뿌리며 괴물들을 섬멸하는 흑마법사를 떠올려 보니 당연히 형님과 가장 잘 어울린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데… 누가 봐도 형님은 흑마법사 아니요?”
논리도 없고 뭣도 없지만 굉장히 무게감 있게 들려오는 울림이다.
전에 지휘관 어쩌고 했던 것은 전부 잊은 모양.
이번에는 흑마법사에 꽂힌 것 같았다.
“뭐, 세간의 시선이 어떻든 무슨 상관이요? 혹시나 형님을 노리는 놈들이 오면 내가 전부 날려 버릴 테니 별로 상관없을 것 같고…. 형님의 인품과 흑마법사는 사실 별로 어울리지 않지만 검은색 로브를 입고 있는 형님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멋질 것 같은데….”
“연금술사가 더 괜찮을 겁니다.”
이쯤 되니 김현성도 꽤나 긴박해진다.
박덕구에 외침에 묘한 울림이 있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아니! 형님은 무조건 흑마법사!”
이전에 지휘관 앵무새가 되었던 박덕구는 갑작스레 흑마법사 앵무새로 진화하기 시작.
“연금술사가 확실히 더 좋습니다.”
“무조건 흑마법사!”
“연금술사가….”
“흑마법사! 어둠의 힘을 뿌리는 형님의 모습을 보고 싶다니까.”
“연금술사!”
“흑마법사!”
“연금!”
“흑!”
“연!”
‘괜히 물어봤다.’
왠지 다시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전보다 더욱 열을 올리고 있는 둘을 보자니 당황스럽다.
아무래도 어둠의 힘이라는 게 묘하게 박덕구의 심장을 울리는 모양이 다.
슬쩍 정하얀에게 시선을 돌리자 의사를 물어보는 줄 알았는지 정하얀도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어느 쪽도 고, 고를 수 없어요.
연금술을 하는 지적인 오빠와 어둠의 힘을 사용하는 오, 오빠라니….”
당연히 그런 걸 물어본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체불명의 논쟁은 점점 더 뜨거워지는 중이다.
결국에는 김현성이 슬쩍 가방을 뒤적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주 우연히… 아주 우연히… 구한 물건입니다. 마침 연금술사 전용 아이템으로 보이는군요. 만약 연금 술사를 선택하신다면 이걸 선물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건 또 어디서 나온 거야?’
김현성이 가지고 있는 저 가죽 가방은 마법의 가방이라도 되는 모양 이다.
이 정도로 다급하게 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덕분에 흑마법사의 인식이 별로 좋지 않을 거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녀석이 꺼낸 아이템을 확인한 순간, 우리 파티의 흑마법사 앵무새를 저버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