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회귀자 사용설명서 037화
우리는 살아남았다
[라무스 터커의 연금학개론-영웅 등급-연금술사 전용]
[대 연금술사 라무스 터커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표적인 연금술사입니다. 공화국 군부에 소속되어 생체 연성과 물약 연성 분야의 1인자로 그 명성을 날렸지만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어느 날을 기점으로 숙청당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비록 그는 죽었으나 그가 남긴 연금 지식은 지금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라무스 터커의 연금학개론은 그가 남긴 연구물의 집대성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완성도 높은 서책 중 하나이며 기본 연금 지식에 수록되어 있지 않은 다양한 연금 지식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기본 직업으로 알 수 없는 영웅 등급의 연금 지식을 습득합니다. 마력이 1, 지력이 1 올라갑니다.]
‘영웅 등급?’
이런 아이템이 눈앞에 있으니 흑마법사 앵무새를 저버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사실 올려주는 스탯은 그리 많다고 할 수 없다.
마력 1에 지력 1이 전부.
그렇지만 저 아이템의 가치가 영웅 등급이라는 걸 생각해 본다면 아마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지식을 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김현성의 말대로 상태창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저 서책이 영웅 등급 판정을 받은 아이템이라고 한다면 틀림없이 그에 상응하는 지식을 담고 있을 것이다.
“어떻습니까?”
“…….”
조금 당황스러운 것은 저런 아이템이 갑작스럽게 나왔다는 점.
슬쩍 표정을 보니 본인도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놈도 인간인 만큼 실수를 하는 게 당연하지만 본인조차 박덕구의 도발 아닌 도발에 완벽하게 걸려든 것에 당황한 모양이다.
물론 그 영혼의 외침에 묘한 울림이 있었다는 건 나도 인정하긴 하지만 오늘따라 김현성이 조금은 귀여워 보인다.
“이런 건 어디서 구한 거요?”
“그때 그 상자 안에 함께 들어 있던 책이었습니다. 쓸 일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마침 좋은 타이밍인 것 같아서….”
“그래도 형님은 흑마법사가 어울리는데….”
“무려 영웅 등급의 아이템입니다. 제가 연금술사가 아니기 때문에 이 책을 열람할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기대 이상일 겁니다. 전설 등급 바로 밑에 있는 아이템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이편이 가장 좋을 겁니다. 무엇보다 이런 아이템을 썩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군요.”
“그래도… 흑마법사를… 형님….”
이 상황에서도 박덕구는 흑마법사라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다.
말도 안 되는 변명이긴 하다.
애초에 우리에게 줄 반지나 박덕구에게 선물한 팔찌도 이곳에서 발견할 수 없는 아이템일 확률이 높다.
어디서 갑작스럽게 보물 상자가 튀어나왔다는 건 조금은 억지스러운 이야기다.
백번 양보해서 우연치 않게 얻었다고 해도 저런 서책이 이곳에 있다는 건 확실히 설득력이 부족하다.
‘철판 깔기로 한 건가.’
그렇지만 김현성의 얼굴을 보니 그냥 모른 척하기로 한 모양.
녀석이 인벤토리 째로 회귀한 건지 아니면 아직 우리에게 개방되지 않은 상점 같은걸 이용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가죽 가방에는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물건들이 즐비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인벤토리 째로 회귀한 경우라면 그나마 녀석의 실수가 이해가 가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박덕구의 영혼의 울림에 낚여 저 아이템을 구입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대충 봐도 심상치 않은 물건.
더 이상 고민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흑마법사도 끌리기는 했지만 역시 연금술사가 좋을 것 같군요.”
그제야 김현성의 얼굴이 활짝 펴지기 시작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연금술사로 전직하셨습니다. 기초 연금 지식을 습득합니다.]
[플레이어 이기영의 상태창과 재능 수치를 확인합니다.]
[이름-이기영]
[칭호-없습니다. 조금 더 노력하셔야겠네요.]
[나이-25]
[성향-용의주도한 전략가]
[직업-연금술사]
[직업효과-기초 마법 지식 습득]
[능력치]
[근력-11/성장 한계치 일반 이하]
[민첩-11/성장 한계치 일반 이하]
[체력-15/성장 한계치 일반 이하]
[지력-29/성장 한계치 영웅 이상]
[내구-12/성장 한계치 일반 이하]
[행운-25/성장 한계치 영웅 이상]
[마력-08/성장 한계치 일반 이하]
[장비]
[라무스 터커의 연금학개론-영웅 등급-연금술사 전용]
[마력 방패의 반지-희귀 등급]
[특성-마음의 눈]
[총평-그마나 괜찮은 길을 선택하셨군요. 딱히 할 말은 없지만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픕니다. 네. 정말로요. 당신에게는 과분한 아이템을 가지고 있는 것도 보이네요. 부디 라무스 터커의 연금술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를 바랍니다. 돼지 목의 진주목걸이가 되기에는 영웅 등급의 아이템이 불쌍하니까요.]
몸이 잠깐 푸른색 빛으로 번쩍인 뒤에는 확실히 전직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순식간에 머릿속으로 기초 연금에 대한 지식이 쏟아졌다.
‘나쁘지 않아.’
어렵기는 하지만 이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자 김현성이 나를 바라보는 표정도 슬그머니 달라져 있는 것 같은 느낌.
녀석 안에서 나에 대한 내부 평가가 올라간 모양이다.
쓸 만한 행정가 정도에서 잘 키워야 하는 연금술사 정도로 바뀐 것이 틀림없다.
‘기분 좋은 이야기지.’
그만큼 내가 소중해졌다는 뜻이 된다.
“축하드립니다, 기영 씨.”
“끄응… 아쉽기는 하지만 형님의 선택이 그렇다면….”
“축하드려요, 오빠.”
“고맙습니다. 덕구도 하얀이도 고마워. 선물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현성 씨. 계속 받기만 하는군요.”
특히나 박덕구에게 고맙다.
“아닙니다. 기영 씨가 강해진다면 우리 파티 전체가 강해졌다고 할 수 있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오히려 도와드릴 수 있어서 제가 더 기분이 좋습니다.”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무조건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
김현성이 나를 키워주는 만큼 그만한 결과를 내놔야 놈이 투자를 계속할 것이다.
이를 테면 지금의 나는 주식이다.
김현성은 이기영이라는 주식에 돈을 넣었고 상한가가 뛰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 분명.
바닥으로 꼬꾸라진다고 해도 나를 버리지는 않겠지만 투자 금액이 줄어들 거라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
계속해서 투자받기 위해서는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걸 지속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꼭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하. 일단은 오늘은 이곳에서 쉬는 것으로 하죠. 이 정도 걸었는데도 마땅한 장소가 안 보이는 것을 보면 지하는 야영할 장소가 없는 것 같습니다.”
“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덕구야.”
“거, 대충 주변정리나 하고 오겠소.”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상 노숙이었지만 그래도 대충 주변을 정리하는 것이 맞다.
별건 없지만 그럴듯한 잠자리가 만들어지는 것은 순식간.
긴 튜토리얼도 어느 정도 끝이 보이는 것 같은 느낌에 살짝 고개가 끄덕여 본다.
아직 생존 퀘스트는 완료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김현성이 그다지 초조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이 던전의 공략은 사실상 마무리 단계라고 보는 것이 맞다.
입구를 찾는 것이 됐든 던전의 주인을 처리하는 일이 됐든 이 파티는 무난하게 헤쳐 나갈 것이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녀석들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정하얀과 이미 드르렁 코를 골고 있는 박덕구를 보니 웃음이 나온다.
내일을 위해 잠을 자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잠이 오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연금술.’
새로 얻은 지식을 나름대로 정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일단 이곳에서 당장 써먹을 수 있는 능력은 아니다.
본격적으로 연금술을 하기 위해서는 여러 장비가 필요하다.
연금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촉매도 이곳에는 없다.
그렇지만 미리 미리 공부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기초 연금 지식을 정리하는데도 시간이 필요한 만큼 라무스 터커의 연금학개론은 일단 펼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주무시지 않는 겁니까?”
“잠이 오지 않는군요.”
생존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레벨 업 시켜야 한다.
나 자신을 단련하는 것은 물론, 절대로 한 곳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만들어낸 열정이라고 말하는 게 어울릴 것이다.
물약 연성이나 호물클루스에 대한 기본 지식, 연금촉매와 마력과의 상관관계까지 무엇 하나 만만한 것이 없다.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김현성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당연히 시선을 의식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봐줬으면 좋겠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투자자님.’
이런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 자체가 이득.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김현성보다 내가 더 만족스럽다.
시간이 조금 흘렀다고 생각할 즈음에는 이미 아침이 왔다.
한숨도 자지 못했지만 후회되지는 않았다.
파티원들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여러 가지 잡담을 나누며 다시 한번 발걸음을 옮기는 이들이 보였다.
침울한 분위기라기보다는 조금 여유로운 분위기.
가는 길 중간 중간 김현성은 농담을 던졌고 박덕구는 그 농담에 던전이 떠나갈 것처럼 웃어댔다.
조금은 여유를 찾은 것처럼 보이는 김현성의 모습.
아마 녀석의 그런 분위기를 다른 이들도 조금씩 느끼고 있으리라.
‘던전 보스는 없는 거구나.’
아마도 없다.
충분히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지만 비장한 전투를 앞둔 표정은 아니다.
조금 홀가분해 보이기도 했고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정확히 설명하면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시작이야.’
끝난 것이 아니다.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처음에 길을 무척이나 헤맸던 게 거짓말처럼 김현성을 중심으로 한 이 파티는 조금씩 이 지옥 같은 곳을 벗어났다.
가끔 전투가 일어나기는 했지만 긴장할 정도는 아니었다.
한참을 걷자 눈앞에 조금은 이곳과 다른 양식의 입구가 보였다.
“거 괴물이라도 튀어나오는 거 아닌지 모르겠소.”
“전투 준비한 이후에 진입하도록 하겠습니다.”
“형씨, 내가 앞장서도록 하지.”
“부탁드립니다.”
커다란 문이 열리고 귓가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희귀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희귀 등급 퀘스트-공략 (0/1)]
문이 열리고 주변을 둘러보지만 괴물 따위는 없다.
시야에 비치는 것은 뭔가 신전처럼 보이는 장소.
중앙에는 이상한 마법진이 보였고 반대편에는 또 다른 문이 보인다.
박덕구가 후다닥 달려 나가 문을 밀어봤지만 역시나 문은 열리지 않는다.
“문은 열리지는 않는 모양이오.”
“아마도 뭔가 조건이 있을 거다.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공략이라는 소리가 되는 거겠지.”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바로 그때.
조금 주저하는 나와 박덕구, 정하얀과는 다르게 김현성이 무척이나 익숙한 것을 보는 것처럼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중앙에 있는 마법진에 마력을 슬며시 보내니 가운데 있는 마법진이 빛을 일으켰다.
모두가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뭔가 조금 우습다.
“마력… 이었군요.”
공략에 필요한 대단한 퀴즈 같은 것은 없었던 것.
우리가 살고 있는 곳과 아예 동떨어진 매개체라고 할 수 있는 마력 자체가 퀴즈에 대한 답이다.
[희귀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희귀 등급 퀘스트-공략 (1/1)]
[희귀 등급 퀘스트-생존 (1/1)]
“형님.”
“알고 있다.”
주먹을 꽉 쥔 김현성의 표정은 무언가 해냈다는 듯한 표정.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았지만 놈의 얼굴은 정말로 기분 좋아 보인다.
언뜻 보면 우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간헐적으로 떨리는 어깨와는 다르게 얼굴에서는 뭔가 어마어마한 성취감이 감돌고 있었으니 내 생각이 맞을 것이다.
“예쁘네요.”
“그래.”
엿 같은 장소에서 일어난 엔딩치고는 아름다운 모습이 눈에 띈다.
땅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들은 높은 천장 위로 올라가고 천장 위에 있는 빛들은 이 장소를 가득 메운다.
반대쪽에 있는 문이 천천히 열리고 있는 것을 보니 정말로 이 거지같은 장소를 벗어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빛과는 전혀 다른 햇빛이 쏟아져 내린다.
‘햇빛.’
시야에 비치는 것은 풍경이 아니라 갑옷과 무기를 들고 있는 자들. 대표로 보이는 듯한 여자가 조용히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튜토리얼에서의 생환을 축하드립니다. 이번 튜토리얼 던전의 담당자 이상희라고 합니다.”
우리는 살아남았다.
그걸 실감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