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회귀자 사용설명서 054화
가난하다고 해서 착한 것은 아니다(3)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죠?”
“별 다른 생각은 없습니다. 솔직히 제가 옳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은 것뿐입니다.”
“돈이 많기는 한 것 같네요. 단순히 그런 이유로 저 사람들을 전부 고용해서 부릴 정도라니….”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돈은 무슨….’
솔직히 여기 있는 이들을 한꺼번에 고용하는 것은 당연히 문제가 있다.
당장 내 연금술에 들어갈 촉매도 부족한 상황이니까.
나 역시 골드가 남아도는 상황은 아니지만 저들이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무척이나 싸게 임상 실험을 할 수 있는 찬스였고 선희영이라는 여자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부숴버릴 수 있는 기회였다.
여러모로 이득을 보는 장사라는 소리다.
어째서 그녀가 가지고 있는 쓸데없는 생각을 부숴야 하는지는 간단하다.
그게 저 여자를 영입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곳에 들어온 지는 3년차. 버림받은 자들의 성녀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은 2년 전. 클랜이나 길드가 아닌 신전 소속으로 시작했고 신전을 나온 이후부터는 계속해서 봉사 활동에 전념. 대형 길드나 중소형 클랜의 오퍼를 2년 동안 거절해 오고 있는 중.’
그녀의 화려한 이력이다.
나처럼 엘리트 코스를 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신전 소속으로 들어간 행보가 눈에 띈다.
클랜이나 길드의 컨택을 거절한 이유도 무척이나 간단하다.
왜?
우리 버림받은 자들의 성녀께서는 빈민들을 구제해야 한다는 막대한 사명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무려 2년 동안이나 길드나 클랜의 컨택을 거절해 온 셈이다.
아마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제의가 오갔을 것이다.
물론 그 조건에는 빈민에 대한 본격적인 구제 역시 포함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제의를 거절했다면 이유는 뻔할 뻔자.
자신이 직접 행동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런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당연히 알지 못한다.
솔직히 알고 싶지도, 알 필요도 없다.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저 여자의 우선순위를 저들로부터 옮기는 거니까.
말하자면 저 여자를 빈민들과 떨어뜨리는 것이 첫 번째 과제였다.
슬쩍 전방을 보니 꽤나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시야에 비쳤다.
꽤나 의욕적인 모습을 보이는 이들이 몇몇 있기는 하다.
어쩌면 내 계획이 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굳이 걱정하지는 않았다.
“빈민촌에는 아직 일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에게는 가보시지 않는 겁니까?”
“당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지켜봐야 하니까요.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시간이 되면 갈 겁니다.”
“굳이 무슨 짓이라고 할 게 있겠습니까. 바위를 옮기는 단순 노동입니다. 날씨가 조금 덥고 태양빛이 뜨겁겠지만 저들에게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가치 있는 땀방울일 겁니다. 노동의 참 가치를 느끼고 있는 이들을 보니 저도 함께 바위라도 옮기고 싶은 심정이네요.”
“비아냥거리는 것처럼 들리는네요.”
“착각이실 겁니다.”
당연하지만 이쪽을 좋게 봐주지 않고 있다.
내가 그녀였어도 나를 좋게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가치를 정면으로 부정한 사람이니까.
그러나 나쁜 상황은 아니다.
지금까지 그녀에게 접근했던 다른 이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건 적어도 인상을 남긴다는 점에서는 효과적이다.
“제가 저들을 길들였다는 건 도대체 무슨 말인가요.”
“말 그대로입니다. 저들은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을 하기 싫은 것뿐이죠.”
“당신 눈에는 지금 일하고 있는 저들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군요.”
“잘 보입니다. 무척이나 잘 보여요.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뭘….”
“자유 도시 린델 내에 이런 일자리는 널리고 널렸습니다.”
‘조금 위험한 일이기는 하지만.’
“물론 저와 함께 일하는 게 조금 조건이 좋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는 하지만… 비슷한 일은 많습니다. 동쪽 지역은 재개발에 들어갔고 붉은용병 길드에서도 이번에 마탑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잡역부를 구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튜토리얼 근처에서도 현재 대규모 공사가 벌어지고 있다는 건 아십니까? 아마 저들도 대충은 알고 있을 겁니다.”
“…….”
“어제 그 자리에서 제가 저들의 근로 의욕을 조금 고취시키기는 했습니다. 자신들이 개돼지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겠죠. 버림받은 자들의 성녀님이 지켜봐 주시고 있다는 것에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죠. 분명히 그럴 겁니다.”
“그런….”
“저들은 선동당한 겁니다. 아마 자신들이 선동당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을 겁니다. 제가 저들을 부정적인 방향이 아니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었기 때문이죠. 뭐,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이것도 얼마가지 않을 겁니다.”
“뭘….”
“인간의 본성이란 건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은 의욕적일 겁니다. 제 눈에도 그게 보입니다. 저들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보여요. 그렇지만 길어야 한 달이 지나지 않을 겁니다. 땡볕에서 힘들게 일하는 것보다는 빈민촌에서 뒹굴면서 시간을 보내던 때가 그리워질 겁니다. 당신이 주는 안식처가 그리워질 때가 올 겁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고통을 겪고 싶은 사람은 없으니까요.”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잘 알겠지만 당신의 말은 맞는 게 없어요. 사람은 충분히 바뀔 수 있어요.”
“그럼 우리 버림받은 자들의 성녀님께서 저들을 바꿨다는 추론은 어떻습니까. 평범한 사람들을 받아먹기만 하는 짐승들로 만든 겁니다.”
“당신!”
‘너무 심했나.’
부들부들 떨고 있는 선희영이 시야에 비쳤다.
따귀라도 한 대 올리고 싶은지 입술을 꽉 깨물고 싶은 것이 눈에 들어온다.
심지어 커다란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가씨를 너무 심하게 몰아붙인 건 아닌지 생각해 봤지만 이 정도 자극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내 말이 틀리다고 믿으면서도 마음속에 싹트고 있는 의구심을 지우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혹시 저 남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런 작은 의구심만 생겨도 남을 봉사하며 가치를 찾는 여자는 망가질 것이다.
우리 버림받은 자들의 성녀님은 무척 유약해 보였으니까.
“당신 생각대로는 되지 않을 겁니다. 저 사람들이 당신의 생각대로 움직인다는 건 오만이고 독선이에요. 세상은 절대로 당신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아요.”
“글쎄요.”
“설, 설사 그렇게 된다고 해도… 제가 보기에는 저들이 당신보다 훨씬 가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가 있습니까?”
“굳이 이유를 찾지 않아도 너무나도 뻔하게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혹시 언더독 효과라고 들어보였습니까?”
“…….”
“힘의 차이로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구분하는 기본적인 오류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버림받은 자들의 성녀님.”
“…….”
“가난하다고 해서 착한 것은 아닙니다.”
“…….”
“아마 당신의 앞에서는 그저 순박하고 착하기만 한 사람일 수도 있겠지요. 분명히 당신 앞에서는 이 사회의 시스템에 희생된 사람들을 연기할 겁니다. 그렇지만 저들도 어딘가에서는 가해자입니다. 빈민촌은 천사들이 사는 천국이 아닙니다. 저희가 살고 있는 곳과 같은 사회입니다. 그래요. 사회요. 온갖 더러운 일과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비일비재한 사회 말입니다.”
“사회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썩었습니다. 인간이 있는 곳은 갈등이 있게 마련입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작은 실험을 추천하고 싶군요.”
“무슨….”
“당신이 직접 빈민이 되어보는 겁니다. 저들을 구해주는 성녀의 입장이 아니라 저들과 같은 위치에 있는 빈민으로 생활해 보는 겁니다. 그러면 느끼는 것이 있겠지요. 일주일? 아니, 단 하루면 충분할 겁니다.”
“그럴 수는….”
“뭘 걱정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없으면 굶주릴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걱정하고 계시겠지요. 그렇지만 하루 정도는 괜찮습니다. 당신을 따라서 봉사를 하고 있는 멋진 친구들이 있지 않습니까.”
‘네가 없으면 나타나지도 않을 테지만.’
당연하지만 그 친구들 입장에서도 성녀가 없다면 굳이 빈민촌을 찾을 이유가 없다.
나는 한 번 더 입꼬리를 올리며 슬쩍 입을 열었다.
“아니면 혹시 자신이 없으신 겁니까?”
“그렇지… 않아요.”
“준비는 이쪽에서 해드리도록 하죠. 빈민 체험이라고 생각하시면 편할 겁니다.”
“당신 정말… 역겨운 사람이군요.”
“자신이 있다면 응하시면 됩니다.”
“자신이 있고 없고는 문제가 아니에요. 그들은 동물원의 동물들이 아니에요. 당신은!”
“응하실 겁니까. 응하시지 않으실 겁니까. 만약 우리 성녀님께서 응하신다고 한다면 저 역시 성녀님의 뜻에 감복해 봉사 활동을 하고 싶어질지도 모릅니다. 어려운 이들을 도울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응하시는 게 맞죠.”
“후회할 거예요.”
“글쎄요. 후회하는 건 제가 아니라 당신이 될 겁니다.”
입술을 꽉 깨물고 등을 돌리며 멀어지는 모습은 꽤나 가관.
‘너무 순진한데….’
지구가 아니라 이곳에 온 이후에도 저런 순진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건 어떻게 보면 축복이다.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려고 할 테지만 모르긴 몰라도 고생깨나 할 것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다시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자 열심히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보인다.
의미 없는 바위 옮기기에 열과 성을 쏟고 있는 모습이 그대로 눈에 들어온다.
“어이! 거기!”
“이건 못 옮길 것 같은데….”
“다 같이 모여 들면 될 겁니다.”
“네.”
“어이 김씨! 빨리 빨리 와봐!”
“이것만 끝마치고 갈게요!”
‘훈훈하네.’
선희영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정하얀이 이쪽으로 후다닥 달려오는 것이 보인다.
조금은 불안한 표정이기는 했지만 살짝 안아주자 기분이 풀리는 모양.
한쪽 손에 들고 있는 공책을 보니 맡긴 일은 열심히 한 것 같았다.
“오빠.”
“제대로 잘하고 있지?”
“네.”
“한번 들어볼까?”
“네! 그… 그러니까.”
“응.”
“13번 실험체는 조금 무기력한 모습인 것 같아요. 25번은 화가 나 있는 것 같고… 7번이랑 8번은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아까 조금 안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던데.”
“56번이랑 75번이었어요. 일하는 도중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았는데… 그, 그쪽까지는 제대로… 죄송해요.”
“아니, 문제가 있다는 걸로도 충분해. 38번은 좀 어때?”
“아. 38번은 조금 설렁설렁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라… 안 보이는 곳에서 조금씩 쉬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요. 그, 그리고… 그만 두겠다는 소리를 하기도 했고요. 93번이랑 95번은 38번의 말에 동조하기도 했어요.”
“아아아. 그렇구나. 괜찮은 결과네.”
“네.”
“고생했어, 하얀아. 이건 고맙다는 선물.”
“오… 오빠.”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인데… 겉모습을 바꾸는 마법이 가능할까?”
“그건 잘….”
“마력으로 살짝 모습을 바꾸는 정도면 될 거야. 환상 마법 같은 개념처럼. 어려울까?”
“아! 그 정도라면 가능할 것 같아요. 그런데 왜….”
그야.
“세상 물정 모르는 공주님한테 사람 사는 곳이 얼마나 더러운지 보여줘야 될 것 같아서.”
정하얀이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네. 그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