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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56화 (55/1,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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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 056화

가난하다고 해서 착한 것은 아니다(5)

“그러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사제님.”

“아….”

“가난한 자들이 전부 착한 것은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고개를 숙이자 꽤나 험한 꼴을 본 것 같은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당연히 알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철없는 여자의 모험을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공포에 질려 있는 얼굴.

물론 나를 확인하자마자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보는 듯한 표정을 보내오고 있지만 딱히 동정심이 들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재미있었던 것은 온도차.

오늘 아침에 보여줬던 모습과 180도 달라져 있는 것을 보자 괜스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역시 인간은 재밌네.’

그녀가 보호해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빈민들이 가해자가 되어 있고 그녀가 경멸하던 나는 그녀의 구원자가 되어 있는 상황이다.

웃음이 나오지 않는 게 이상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제일 재미있는 상황이다.

많이 맞았는지 얼굴은 부어올라 있었고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다.

걸친 옷은 반 이상이 찢겨져 있다.

여기저기에 멍이 들어 있었고 어딘가에 긁혔는지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은 처음 봤던 단정한 모습과는 딴판이다.

아마 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큰일이라도 당했을 것이다.

“아아….”

눈에 한가득 고여 있던 눈물이 떨어지는 것은 순식간.

선희영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있는 남자와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부랑자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넌 또 뭐야.”

“그건 네가 알 필요 없다, 쓰레기.”

“나참…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네. 누구냐고, 이 새끼야.”

“움직이지 마라.”

당연히 여기 있는 이들을 전부 싸잡아 죽일 자신은 없다.

난 연약한 마법사였고 저들은 다수였으니까.

내 뒤에서 주문을 외우고 있는 정하얀을 믿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은 오히려 저들.

자신들의 욕망을 풀기에 정신이 없었던 쓰레기들이었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 앞에선 약한 종류의 인간.

아니나 다를까 조심스러워 보이는 표정이 보인다. 나나 정하얀의 행색은 저들과 다를 바 없지만 지나치게 당당한 모습에 위축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어… 어디서 오셨습니까.”

“네가 알 필요는 없다.”

“그게….”

살짝 뒤를 돌아보자 정하얀이 외우고 있었던 주문을 내뱉었다.

목소리가 채 터져나오기도 전에 사방을 잠식한 정체불명의 마력이 저들을 포박하기 시작.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여기저기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동그란 눈을 뜨고 벌벌 떨고 있던 선희영도 이쪽으로 허겁지겁 달려오기 시작했다.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게 나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위험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 떨어지셔도 됩니다. 사제님은 안전하니까요.”

이쪽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있는 모습.

“어떻습니까? 이곳저곳을 둘러본 감상은.”

“감사합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빨리, 빨… 빨리 빨리 나가요. 빨리…. 이곳에서….”

아무래도 제대로 사고하는 게 불가능해진 모양이다.

지나친 공포 때문에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못 하는 듯싶다.

어떤 식으로 튜토리얼을 겪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여자는 확실히 이런 상황에 대한 내성이 없다.

조금은 진중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내 입장에서는 똥 밟은 듯한 상황이다.

이 건 별로 좋지 않다.

단순히 그녀를 구출하는 것보다는 조금 더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다.

“이거 놔.”

“네?”

“이거 놓으라고 세상 물정 모르는 여자야. 다시 저기로 던져 버리기 전에.”

“그, 그러지 말아주세요. 제발… 제발….”

“어떤 것 같아?”

“뭐가….”

“네가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이들을 가까이서 보니까 어떤 것 같아?”

“당, 당신 말이 맞아요. 당신이 맞았어요. 전부 다 맞아요.”

제대로 생각하고 있지 않고 있다.

그녀의 얼굴에 깃든 것은 절박함뿐이다.

자신의 생각에 대한 후회가 아니라 단순히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필사적인 외침이다.

“하얀아, 마법 풀어.”

“네. 오빠.”

“하지 마세요! 하지 말아주세요!”

당연하지만 저들에게 걸려 있는 포박 마법을 푸는 것이 아니다.

선희영에게 걸려 있는 환각 마법.

그녀의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기 위함이다.

정하얀이 천천히 마력을 거두자 선희영의 얼굴이 훤하게 드러났다.

“저쪽 똑바로 쳐다봐.”

“네?”

우리 소중한 사제를 핍박하던 쓰레기들의 얼굴도 파랗게 질리기 시작.

자신들이 건드린 사람이 누구인지 깨닫고 있는 것이다.

후회하는 표정보다는 일이 꼬였다는 표정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사람을 잘못 건드렸다는 것 정도는 깨닫고 있을 것이다.

이 쓰레기들은 뭇 클랜의 사랑을 받고 있는 중요한 인재를 건드린 셈이 되는 거니까.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는 놈들을 보니 웃음이 나올 정도.

“사…….”

“살고 싶어?”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보였기 때문에 곧바로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이 여자… 죽일 수 있겠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조금 더 부연설명이 필요한 것 같아 다시 한번 말을 이었다.

“아니, 굳이 죽이지는 않아도 돼. 너희가 하고 싶었던 장난이나 그동안의 스트레스를 이 여자한테 풀어보는 거야. 동경의 대상이었잖아. 버림받은 자들의 성녀님은… 그렇지 않아?”

뭔가에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금수 같은 놈들이 시야에 비쳤다.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개인적으로 이 여자한테는 조금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좋은 구경거리가 될 것 같기도 하고, 굳이 이유를 너희 같은 쓰레기들이 알 필요는 없어. 중요한 건 하느냐 하지 않느냐. 이건 내가 너희에게 주는 기회야.”

“…….”

“거절하면 죽는다.”

“하… 하겠습니다.”

“그래야지.”

조금 멍한 표정의 선희영이 눈에 띄었다.

“형, 형님… 어떻게.”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 이 새끼들아. 어차피 달라질 건 없으니까.”

“정말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는 겁니까?”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잇는다.

“물론. 아까 하려던 걸 마저 해도 상관없다.”

“정말입니까?”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님… 그래도….”

“닥쳐, 이 새끼야. 어차피 이년도 다른 놈들이랑 똑같아. 버림받은 자들의 성녀는 개뿔. 아까 질질 짜는 거 못 봤어? 하기 싫으면 넌 빠져. 고자 새끼야.”

“빠, 빠진다는 건 아니지만….”

“애초에 마음에 안 들었다 이거야. 지가 뭔데 남을 돕네 마네 하면서 지랄병을 떨었는지…. 덕분에 굶지는 않아서 고맙기는 한데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니까. 푸흐흐. 원래 사람일이라는 게 어떻게 응? 어떻게 될 줄 모르는 거 아니겠어?”

“맞는 말입니다.”

화상 자국의 남자가 분위기를 탔는지 꽤나 이쪽에 유리한 소리를 해준다.

생김새만 봐도 개자식이라는 건 대충 예상할 수 있었지만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개자식의 등장에는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선희영은 더 이상 공포에 질려 있지 않다.

오히려 체념한 듯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 나보다 훨씬 당황스러울 것이다.

자신이 평생을 바쳐 봉사해 왔던 대상에게 부정당하고 있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는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정하얀이 나를 잃어버린 기분과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있으리라.

결국.

“흐으윽….”

하는 소리와 함께 처량한 울음이 터져 나왔다.

“푸흐흐흐흣.”

양심이 찔리지도 않는지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금수들의 모습은 꽤나 가관이다.

솔직히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다.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다가가자 선희영을 둘러싸려고 하던 이들이 천천히 물러서는 것은 당연지사.

천천히 선희영에게 시선을 돌리자 뭔가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이렇게… 흐윽…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잖아요.”

“이제야 대화가 통하겠네요.”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잖아요…. 흐윽….”

“조금 더 현실을 바라봐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도움을 드린 것뿐입니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이곳은?”

“당신이 옳았어요. 흐윽… 당신이 옳았다고요. 제가 틀렸어요. 제가….”

“아니요. 그게 아닙니다.”

“뭐….”

“당신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가요.”

“말 그대로입니다, 선희영 님. 당신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숭고합니다. 다른 이들을 위해서 희생할 수 있다는 건 평범한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지요.”

“…….”

“저는 당신을 존중합니다. 제가 당신이었다면 매일같이 일어나 이런 자들을 위해 봉사할 수 없었을 겁니다. 무언가를 바라고 한 행동이 아닙니다. 길드나 클랜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물욕에 집중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가치를 지켜냈습니다. 고생하며 가장 앞장서서 이들을 향해 몸을 움직였습니다. 암요.”

멍한 표정이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다른 이들보다 더 낮은 위치에 있습니다. 실례지만 당신이 지내는 곳을 지켜본 적도 있습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위치를 생각해 본다면 절대로 어울리는 장소가 아니지요. 당신은 모든 것을 양보했습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요. 다른 사람들도 움직였지요. 타 클랜과 길드가 빈민들에게 관심을 가지도록 했습니다. 그래요. 당신은 숭고합니다.”

“바… 바보 같은 소리예요.”

“당신이 저들을 개돼지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제가 전에 했던 소리는 제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었던 당신에 대한 질투였습니다. 숭고하고 아름다우며 진실한 그 모습은 제가 가지고 못한 것들이니까요. 꼬여 있는 건 저였습니다.”

“…….”

질질 짜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위로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 처한 상황에 대한 눈물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그녀의 생각이 달라졌다는 것 정도는 인지할 수 있었다.

“당신은 절대로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네…. 흐윽….”

“당신은 숭고해요.”

“네….”

“존경할 만한 사람입니다.”

“네….”

“잘못된 것은….”

“네….”

“저들이지요.”

“네.”

“은혜도 모르는 금수 같은 개돼지들이야말로 잘못되었습니다.”

“…….”

“자신들이 받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당신을 배신한 자들이야말로 잘못되었습니다. 이런 자들이 린델을, 신성제국을, 사회를 썩게 만드는 겁니다. 숭고한 이들이 계속해서 사회에 이바지해도 이런 자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나아지지 않는 겁니다. 그래요. 이런 자들 때문입니다. 빈민촌이 나아지지 않는 것도, 쓸데없는 오해를 받는 것도, 당신의 숭고함의 빛이 바란 것도 모두 저들 때문입니다.”

“네…. 흐윽….”

“일어서려고 하는 자들이 아닌, 일어설 생각도 하지 않는 이들이 이곳을 썩게 만드는 겁니다.”

“네. 네. 네.”

“자, 그럼.”

“…….”

“진정한 의미의 봉사를 시작합시다, 사제님.”

내 개소리에 대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천천히 일어나 내가 건네는 단검을 받아드는 선희영이 눈에 들어왔다.

“함께 아름다운 린델을 만들어 가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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