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57화 (56/1,590)

# 57

회귀자 사용설명서 057화

이상적인 봉사자

“함께 아름다운 린델을 만들어 가도록 합시다.”

무언가 알 수 없는 얼굴 표정이 시야에 들어왔다. 입을 꽉 깨물고 있는 것은 물론, 굉장히 진중한 표정이다.

솔직히 나도 선희영이 이 정도로 의욕적인 모습을 보여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몇 가지 장치를 해두기는 했지만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예상하고 있었던 장면은 겁을 집어먹고 머뭇거리는 것이었지만 그녀의 생각은 조금 다른 모양.

‘약발이 잘 받는 건가.’

물론 덜덜 떨리는 손과 발을 보면 무의식 어딘가에서는 지금 이 상황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기는 했다.

이미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정신은 그녀에게 정상적인 사고를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좋네.’

엉망이 된 얼굴에 깃든 표정의 정체는 사명감.

내 생각이 정확한지 알 수 없지만 지금 선희영의 얼굴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은 틀림없이 사명감이다.

천천히 단검을 들고 걸어가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어떤 종교적 의식을 떠올리게 한다.

짧게 기도를 드린다거나 손을 위로 들어 올리는 동작 역시 마찬가지.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는 그녀는 저들을 원망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허….’

“사제님… 저희가…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저희가 잠, 잠깐 미쳤었던 것 같습니다. 저희가 정말로 미쳤었습니다.”

“살려주세요, 사제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살려주십시오.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시면….”

“마법사님… 분, 분명히 살려준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살려준다고….”

그 와중에도 목숨을 구걸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은 가관이다.

이미 정하얀의 마법으로 인해 사지가 포박된 채로 단검이 드리워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을 눈앞에 둔 채로 선희영은 뒤를 돌아 이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정, 정말로… 정말로… 하나요?”

브레이크를 걸어 달라는 것 같이 들려오는 목소리.

당연하지만 걸어줄 생각은 없다.

“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지금까지 해오셨던 일과 같은 일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엄연히 남을 돕는 일입니다. 쓰레기가 있으면 치우는 것이 맞지요.”

“네….”

선희영은 우리와 함께 움직여야 하는 인재니까.

환하게 웃음을 보내자 곧바로 그녀가 위로 치켜든 단검을 아래로 내려찍기 시작했다.

비명이 들려온다.

어색하게 단검을 찍어 내리는 그녀의 모습은 괴기스럽다기보다는 숭고하다.

“아으아아아악!”

“사제니임…! 살려….”

“도와….”

“아아아아악!”

끔찍하다면 끔찍하다고 할 수 있는 모습.

연신 피가 튀가 튀고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도와달라는 목소리에 응하는 사람은 없다. 물론, 이곳이 마력으로 밀폐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굳이 그런 작업을 거치지 않아도 저들을 도와주러 이곳에 찾아오는 이들은 없으리라.

녀석들이 말한 그대로, 이곳에서 도움을 청하는 것 자체가 바보 같은 일이다.

빈민촌에 있는 사람은 모두 자기 살기 바쁜 이들이다.

남을 도와준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 이들을 위해 봉사했을 그녀를 떠올리자 웃음이 나올 지경,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들을 욕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자신이 할 일을 끝마치려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봐도 어색하게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가끔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내 도움을 받지 않고 말이다.

“사제님! 사제님! 제발….”

“이 개 같은 년아! 니가 사람이야?”

“죄송합니다. 제발… 제발!”

“아으아아아아악!”

어쩌면 그녀는 처음부터 비정상이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내 기준에서 생각해 보자면 저렇게 이타적인 사람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시간이 조금 지난 이후에는 끅끅거리는 목소리도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조용히 숨을 헐떡거리는 선희영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떻습니까?”

조금은 홍조가 깃든 얼굴.

부어오른 눈덩이와 찢어진 이마에 서 피를 흘리고 있었던 그녀는 내 말에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보람차네요.”

조금은 소름 끼치는 목소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그녀의 모습은 조금 아름다워 보였다.

염려됐던 것은 정신 상태였지만 그렇게 나빠 보이지도 않았다.

여러 가지 조건의 도움이 있기는 했지만 내가 주입한 새로운 가치관은 그녀의 내부에 아주 잘 자리 잡았기 때문이리라.

‘성공적이야.’

“그럼 갈까요?”

“어디….”

뻔한 영입 제의 역시 하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손을 뻗으니 내 손을 맞잡은 손이 느껴졌다.

정하얀이 조금 불편해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문제없으리라.

“새로운 의미의 봉사는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전과는 다르게 조금은 조용하게 활동할 필요가 있지요. 제가 당신과 함께 하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네. 함께요. 당신의 가치관을 실현시키는 것에 문제가 많을 겁니다. 일반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니까요.”

“네.”

“제가 당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제가 증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기영 님.”

“일단은 치료를….”

“괜찮아요. 제가 직접 할 수 있으니까요.”

선희영은 조용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회복되는 모습은 기가 찰 지경.

정하얀이 가지고 있는 반지 때문에 나도 한 번 체험해 본 적은 있지만 내가 느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유능해.’

이곳에서 사제는 무척이나 귀하다.

사제 적성에 맞는 사람을 구하기 힘든 것은 물론, 제대로 된 사제는 보기도 힘들다.

전설 등급의 신성 재능을 가지고 있는 여자와 함께 움직일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은 것은 당연지사.

최소한 눈 먼 화살에 맞고 뒤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남은 것은 이 여자와 함께 클랜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정하얀은 이쪽에 몸을 기대오고 있었다.

내가 선희영에게 보여주는 친절한 모습이 걱정되는 모양.

선희영은 조금 멀찍이서 떨어져 조용히 입을 열어오고 있었다.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그저 일상적인 대화였다.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려 본다면 일상적인 대화를 한다는 것 자체가 조금 아이러니하지만 정하얀도 조금씩 선희영의 말에 응해오는 것을 보면 이 둘은 서로에게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조금 익숙한 인형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느꼈던 것은 바로 그때.

“현성 씨?”

“혹시나 했는데 기영 씨였군요. 이곳에서 만나다니 우연입니다. 실험실에 계실 줄 알았는데… 하얀 씨와 함께 나들이라도 나오셨습니까?”

“아. 사실은….”

살짝 선희영을 보자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선희영이라고 합니다. 잠깐 봉사 활동 차 이곳에….”

“아. 처음 뵙겠습니다. 김현성이라고 합니다.”

서로 처음 보는 모습에 조금 당황스럽다.

김현성의 뒤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꼬마 하나가 시야에 비쳤다.

아직 어린아이 티를 벗지 못한 모습의 꼬마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제대로 구분하기도 힘든 것처럼 느껴졌다.

눈에는 알 수 없는 독기가 들어 있었고 떼 국물이 묻어 있는 얼굴은 꼬마가 빈민촌 출신이라는 것을 설명해 주는 것처럼 보였다.

‘혹시.’

빠르게 마음의 눈을 발동시키자 보이는 모습은 가관.

[플레이어 김예리의 상태창과 잠재능력을 확인합니다.]

[이름-김예리]

[칭호-없습니다. 조금 더 노력하셔야겠네요.]

[나이-14]

[성향-상처받은 도둑]

[직업-궁수]

[직업효과-기초 궁술 지식 습득]

[능력치]

[근력-10/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민첩-31/성장한계치 전설 이상]

[체력-12/성장한계치 영웅 이하]

[지력-15/성장한계치 영웅 이하]

[내구-14/성장한계치 영웅 이하]

[행운-15/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마력-10/성장한계치 전설 이상]

[총평-전설급 이상의 스탯 한계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민첩과 마력이 전설급의 잠재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스탯의 잠재 능력 역시 플레이어 이기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어린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지 않게 조심해서 움직여주세요. 상처받았지만 아직은 순수한 아이입니다. 눈치가 빠른 꼬마지만 미워하지는 말아주세요.]

‘허….’

김현성을 제외하고 모든 능력치가 영웅, 전설을 가리키고 있는 이는 처음 본다.

녀석이 노리고 있던 것이 선희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곧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애초에 빈민촌으로 향한 이유는 이 꼬마를 데려오기 위함이리라.

살짝 아래를 내려다보자 김현성의 뒤로 후다닥 숨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겁을 집어먹은 것 같기도 했고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선희영이 꼬마를 보는 눈이 그리 탐탁지 않아 보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지만 다행히 별 다른 트러블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 이 아이는….”

“빈민촌에서 우연히 만난 아이입니다. 재능이 있어 보여 이것저것 가르쳐 볼 생각으로 데려왔습니다. 생각이 깊고 벌써 직업도 얻은 것 같더군요. 사냥을 나가기에는 조금 어린나이지만… 아! 아직은 낯을 많이 가리는 것 같으니 친해지시려면 시간이 조금 걸리실 겁니다.”

“아… 그렇군요.”

“기영 씨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빈민촌을 둘러보던 차에 우연히 사제님과 연이 닿게 되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마음이 조금 맞아서 말입니다.”

“아아아.”

선희영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김현성은 정말로 그녀를 처음 보는 모양이다.

조용히 그녀를 가늠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 모르나.’

내가 만약 김현성이었다면 저 꼬마를 영입하면서도 그녀를 어떻게든 영입하려고 애썼을 것이다.

그녀의 신성 재능 한계치는 전설 이상.

이유야 어찌됐든 미래를 뒤흔들 만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이들 중에 하나였으니까.

사실상 말이 되지 않는다.

빈민촌의 규모가 조금 크기는 하지만 어쩌면 몇 번 마주쳤을 수도 있다.

선희영은 항상 사람들을 몰고 다녔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현성이 굳이 그녀를 영입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그녀에게 별 다른 인상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럴 수가 있나?’

그녀는 미래가 보장된 사제.

지금도 그렇지만 미래에는 더욱더 성장할 인재다.

불현듯 이상한 생각이 들었던 것은 바로 그때였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그녀가 가까운 미래에 예기치 못할 사고를 당했다면 김현성이 그녀에게 집중하지 않은 것도 이해가 간다.

1회 차의 김현성은 지금 이 시기에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을 테니까.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빈민촌이나 주변에 들려오는 소문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을 수도 있다.

린델은 넓고 같은 시간에도 이곳저곳에서 다양한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해 사냥을 나가거나 어딘가에 틀어박혀 훈련에 열중했다면 버림받은 자들의 성녀님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선희영 그녀가 지금의 삶을 계속해서 유지하며 살아갔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이다.

낭중지추라는 말을 떠올리면 생각하고 있는 추론이 조금 더 설득력이 있다.

그냥 뇌내망상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선희영이 과거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었을 거라는 생각이 괜스레 머릿속에 들어와 꽂혔다.

어떻게 죽었는지는 당연히 알 수 없다.

클랜이나 길드의 오퍼를 받아들인 이후 탐사 도중에 죽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멀지 않은 미래에 전쟁이 일어나 휩쓸렸을 수도 있다.

병에 걸렸을 수도 있고, 클랜과 길드의 이해관계에 얽혀 피해를 받았을 수도 있다.

어쩌면.

‘빈민들에게 죽었을 수도 있고.’

김현성이 회귀하기 전에 일어난 일은 내가 전부 알 수 없다.

단순히 예상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선희영 그녀가 전 회 차에 조금 씁쓸한 인생을 보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거의 확신할 수 있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희영 씨.”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현성 씨. 당분간 신세를 질 것 같네요.”

그녀는 이상적인 봉사자였으니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