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회귀자 사용설명서 063화
던전 공략은 정치다(5)
확실히 기분이 나쁘다는 표정이었다.
“사과할 필요 없습니다, 기영 씨.”
“네?”
“기영 씨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아니 설사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유라 씨가 굳이 기영 씨의 잘못을 지적할 권리는 없습니다.”
‘잘한다.’
“엄연히 기영 씨는 파란의 파티원입니다. 만약에 실수했다고 생각했다면 제가 먼저 말씀을 드렸을 겁니다. 어째서 유라 씨가 먼저 우리 파티원의 행동을 문제 삼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나쁘군요.”
사실 이것까지는 계산하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단순히 여론을 조작해야 한다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한번 떠올려 보니 김현성이 기분이 나쁜 것도 당연하다.
엄연히 정유라가 한 행동은 월권다.
내 소속은 파란.
나를 관리하는 일 역시 김현성의 일이라는 것.
아무 상관없는 정유라가 이러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본인의 입장에서는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혹은 선배의 입장에서 던질 수도 있는 소리였지만 이 대륙에서 진득하게 오래 붙어 있었던 김현성의 상식 내에서는 용납이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말하자면 타 파티원에게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은 금기라는 게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는 룰.
정유라는 그 룰을 어긴 셈이 된다.
‘우리 파티를 호구로 봤다는 거지.’
김현성의 발언을 간단하게 직역하자면 이렇다.
‘도대체 네가 뭔데 우리 애들을 건드리느냐.’
박덕구 때처럼 공략을 이끌고 있는 최영기에게 하는 소리도 아니고 굳이 나를 이곳으로 불러내 한 소리를 하는 건 확실히 문제가 있다.
따뜻한 김현성의 품이라는 건 예상보다 조금 더 행복한 공간이다.
‘아주 좋아.’
상황은 아주 좋게 돌아가고 있다.
사실 화를 내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운 법.
시누이를 연기하기 위해 감정을 잡기는 쉽지 않았지만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이 배역은 내게 딱 들어맞는다.
“현성 씨, 유라 씨는 선배의 입장에서… 한 말씀 해주신 것… 같습니다. 딱히 그럴 의도는 없으셨던 것 같은데….”
“아닙니다, 기영 씨.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이런 식으로는 아닙니다.”
“저도 잘못한 것이 분명….”
“확실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기영 씨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솟아 오르려는 입꼬리를 막을 수가 없다. 당황하고 있는 정유라의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미 비호감 지지율은 천장을 꿰뚫을 지경.
별것 아닌 선동으로도 이미 당선이 확정된 정유라를 보니 정말로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푸핫.’
그 와중에도 나에게는 격려의 말들이 쏟아져 내리는 중.
위로를 받는 것도 일이다.
“아직 기영 씨가 이곳에 오신 지 잘 모르셔서… 현성 씨 말이 맞습니다. 만약에 기영 씨에게 직접 할 말이 있었다면 적어도 파티장에게 양해를 구하는 게 맞습니다. 저런 식으로 뒤에서 따로 불러내 잘못을 지적한다는 건…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이건 아니지요. 아무리 잘못했다고 한들 이런 식으로는 아닙니다.”
“파란의 파티가 경험이 부족해 배우고 있는 입장이라곤 하지만 파란 역시 던전행을 함께 진행하고 있는 파티 중 하나입니다. 못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제 역할을 충분히 잘해주고 있는 상황에서… 검은백조의 행동은 정말로 이해하기 힘드네요.”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예의에 대해서 말을 하는 마도 길드.
“기영 씨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공략을 진행될 때는 실제로 열심히 임해주시기도 했고….”
“아암. 그렇지. 그렇고말고. 사실 어디 이런 분위기로 공략을 진행하는 게 쉬운 일인가. 다른 파티 들어가면 싸우고 헐뜯는 게 일상다반산데….”
“의사소통은 중요합니다. 솔직히 검은백조가 뭐한 게 있다고 저러는 건지 원….”
“쯧….”
감정에 충실한 붉은용병까지 함께해 주고 있다.
물론.
“너무한 것 같습니다. 쯧.”
“유라 씨, 이렇게까지 하는 건 조금 심하지 않습니까. 엄연히 같이 원정을 나온 파티입니다.”
“어휴….”
정유라 그녀에게도 직접적인 비난에 화살이 쏟아져 내렸다.
사전에 치밀한 설계가 없었다면 이런 그림은 만들어내지 못했을 거다.
‘이래서 이미지가 중요한 거지.’
이래서 평소 쌓아왔던 이미지가 중요하다.
“오빠…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
“응. 괜찮아, 하얀아. 별일 아니야.”
“정확히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가요?”
“괜찮습니다, 희영 씨. 아까 전에 말씀 드렸던 게 전부입니다.”
사실 따귀라도 한 대 맞았으면 정말로 좋을 뻔했다.
그렇지만 정유라도 그 정도로 생각이 없지는 않은 모양.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면 정하얀이 정유라 암살 작전을 계획할지도 모르는 만큼 이 정도가 딱 적정선 이기는 하다.
아무튼 간에 흘러가는 상황은 이쪽에 무척이나 유리하다.
정유라는 계속해서 표정을 구기고 있었고 나에게는 계속해서 위로의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었다.
사과할 필요 없었다거나 오히려 분위기를 좋게 만들어 졌다는 것이 주된 평가.
딱히 모난 짓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원정대에 활기를 불어 넣었으니 당연한 반응이리라.
솔직히 여기서 정유라가 어떤 선택을 할지가 제일 궁금하기는 했지만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다.
‘잘못을 인정하고 납작 엎드리기.’
그나마 이게 제일 나은 선택이기는 하지만, 그럴 경우 결과가 그리 좋지 않을 것이 당연할 것이다.
이미 무너져가는 위치라고는 하지만 고개를 숙인다는 것은 그녀의 입지가 더 줄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조금 밉보이는 걸 감수해서라도 자신이 파티에 기여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전하려고 하는 것이 맞다.
그게 가장 옳은 선택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딱 중간 포지션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
그녀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인 것 같았다.
“일단은 죄송합니다.”
사과하되 너무 저자세로 나오지 않겠다는 것.
‘멍청한 년.’
“기영 씨는 엄연히 제 파티원이고 제 관할 아래 있습니다.”
“미리 말씀을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현성 씨. 그리고 갑작스러운 상황에 상처 받았을 기영 씨에게도 사과드리겠습니다.”
“단순히….”
“제가 조금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무 긴장감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만약에 정상적인 파티로 이루어진 원정대라고 한다면 이런 걱정을 할 필요도 없겠지만….”
‘등신.’
“조금이지만 경험을 가지고 있는 선배로서 할 말은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 방법이 잘못됐다는 건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정유라 씨가 기강을 바로 잡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첫 번째에 저희의 실수가 있었다고 하지만 그 후에는 그렇게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잔 실수가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내 생각보다 꽤나 괜찮게 대처하고 있는 모습.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다.
‘내가 잘못하기는 했다. 그런데 너희들 실수했잖아? 솔직히 우리 등에 업혀가는 입장인데 이 정도는 이해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너희들 경험 없잖아. 배우려고 온 거잖아. 그럼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그래도 방법이 잘못되기는 한 것 같네. 미안하긴 미안하다.’
궤변이기도 하지만 정론이기는 하다.
만약 여론을 등에 업은 것이 그녀였다면 내가 당선됐을 수도 있을 만큼 훌륭한 대처다.
아니나 다를까 검은백조에서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사실 많은 탱커분들이 파란의 탱커분을 배려해 주고 있는 거잖아요. 만약에 그게 아니었으면 조금 더 원활하게 진행됐을 거예요. 저희의 부담도 조금 줄어들었을 거고요.”
“파란의 궁수분도 사실 일인분을 하고 있다고는 판단하기 힘들고….”
“연금술사분도 사실 전투 직군은 아니어서….”
사과를 하면서도 우리 파티 자체를 물고 늘어지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반대되는 의견도 튀어나온다.
“그렇지만 방해가 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하얀 씨의 마법 때문에 도움을 받은 적도 많고 무엇보다 선희영 씨가….”
“몇 번이나 도움을 받았습니다. 벌써부터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렇지만 이렇게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좋지 않다.
말하자면 의미 없는 심판대에 올라가 버린 셈.
긍정적인 분위기든 부정적인 분위기든 일단 심판대에 올라갔다는 건 확실히 불리하다.
이쪽을 심판대에서 빠르게 내리고 검은백조를 올리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조금 굳어져 있는 김현성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 것.
‘역시.’
김현성의 부처의 환생이라고 해도 화가 날 것이다.
대충 보기에도 김현성은 정치질에 익숙해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 우리 파티가 정치질을 당하고 있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을 테니까.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저희 파티에게 할 말이 있으시면 저를 통해서 직접 해주시면 됩니다.”
“네. 정말로 죄송합니다, 현성 씨. 그리고 마음고생 하셨을 파란 파티분들께도 무척이나 죄송합니다. 특히 기영 씨에게는 정말로 죄송해요.”
“아닙니다. 조금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요.”
“저도 깜짝 놀랐네요. 상처 받으실 줄은 몰랐는데… 나중에 따로 이야기라도 나누도록 해요.”
“뭐, 그렇진 않습니다. 조금 당황했을 뿐이죠.”
우리를 심판대로 올리기는 했지만 저년이 잃은 것도 많다.
여론을 잃는 순간 정치생명은 끝이라는 걸 모르고 있을 리가 없다.
어쩌면 이 여론을 뒤집을 만한 수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가지고 있는 것은 뻔하다.
이 원정대에 더욱더 열심히 기여하는 것.
말하자면 원정대의 안전을 위해 억지로 악역을 자처했다는 느낌이었지만 가짜 악역을 진짜 악역으로 만드는 것 정도는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쉽다.
‘어떻게 할까….’
선택지는 무척이나 많다.
여유로운 척하지만 체크 메이트를 한 번 피한 것에 불과하다.
이미 저년은 국민비호감으로 낙인 찍혔다. 이 여론을 이용하기만 해도 그녀를 고립시키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우리 김현성은 그렇게 단순한 방법으로 해결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잠깐 모여주시겠습니까.”
“네.”
파티원들끼리 할 이야기가 있는 것을 눈치챘는지 다른 이들이 살짝 자리를 비켜줬고 김현성은 그런 우리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일단은 죄송합니다.”
“아뇨. 현성 씨가 죄송할 건 없습니다. 오히려….”
“아닙니다. 배우자는 입장으로 이 던전행을 선택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타 파티에게 무시 받고 계실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딱히 무시 받고 있었던 것은 아닌데….’
“여러 가지를 배우셨을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만….”
“네.”
“지금부터는 이런 일은 없을 겁니다.”
본래 김현성은 책임감이 있는 녀석이다. 열이 받기는 했던 모양.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녀석을 보니 무언가 따로 생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위치를 조금 변경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조금 더 전위에 서겠습니다. 덕구 씨는 하던 대로 계속 해주시면 됩니다. 마법을 쓸 타이밍도 이쪽에서 따로 지시하도록 하겠습니다. 희영 씨는 덕구 씨에게 조금 더 집중해 주세요. 이쪽은 없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예리는 평소와 하던 대로….”
“네.”
“하얀 씨는 화력을 조금 더 늘리셔도 됩니다. 희영 씨가 계속 덕구 씨를 봐주시면 되니까요.”
본래 녀석은 절대로 호구라고 할 수는 없다.
‘아아아아.’
그제야 김현성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일선에 나서지 않았던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를 위해서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조금 더 사냥에 익숙해지라는 의미였을 수도 있고 혹시 모를 자만심을 줄이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다.
우리 파티는 모두의 주목을 받고 있었고 실제로도 계속되는 편한 생활로 인해 예전 같은 절박함이 사라지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고맙게 올라타겠습니다.’
정유라에게 엿을 먹이고 싶은 건 나뿐만이 아니게 됐다.
검을 꽉 쥐고 있는 회귀자를 바라보며, 조금은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