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
회귀자 사용설명서 066화
가장 중요한 것(1)
“원정대에서 나가 주시는 걸 건의하고 싶습니다.”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었던 장면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그야말로 그림으로 그린 듯한 명장면이다.
정유라를 비롯한 다른 검은백조의 파티원들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어안이 벙벙하다.
저런 얼굴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만큼 정유라에게는 이 상황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처럼 느껴질 테니까.
이런 배경이 오기까지 내가 얼마나 뒤에서 뒷공작을 치밀하게 했는지 전혀 인지하지 못할 것이다.
본래 여론이라는 게 이렇다.
조용하게 보이다가도 심지에 불을 붙이면 걷잡을 수 없이 팽창한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너무나도 명백한 상황에서도 이런 상황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농담하시는 거죠?”
“…….”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반문하는 꼬라지가 가관이다.
당연하지만 농담일리가 없다.
최영기의 진지한 표정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했는지 입을 꽉 다물고 있는 정유라가 보였다.
“이건 말도 안 돼요.”
“아뇨. 이건 이 원정대를 이끌고 있는 입장에서 내린 합리적인 판단입니다.”
“허….”
“정유라 씨의 의도가 어떤지는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기여해 주신 점 역시 알고 있고요. 이 원정대를 위해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일하셨다는 것 역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더 이상 함께 가기는 힘들 것 같군요.”
“그걸 알고 있으신 분이 방금 같은 말을 하셨단 말이에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이런 상태의 분위기로 원정을 진행하는 것 자체가 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라 씨가 파란의 파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유라 씨가 보여주는 모습은 다분히 비상식적입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원정대를 위해서 말씀드린 거예요. 당연히 파란의 파티에게는 그 어떤 감정도 품고 있지 않고요. 오히려 문제가 되는 건!”
내 이름을 외치고 싶었을 것이다.
슬쩍 눈웃음을 보내자 이빨을 까득 까득 갈고 있는 정유라.
얼마나 화가 났는지 대충 봐도 알 수 있다.
‘풉.’
속으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저주의 말을 쏟고 있을 것이다.
표정이 말해준다.
조금 더 속을 긁고 싶어진 것은 당연지사.
괜스레 최영기에게 한마디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괜, 괜찮습니다. 최영기 씨. 이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뇨, 기영 씨. 이편이 더 좋을 겁니다. 분란을 일으키는 파티원은 언젠가는 커다란 사고를 일으키게 마련입니다. 아니, 분명히 무슨 일이 일어날 겁니다.”
“지금 제가 분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딱히 어째서인지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생각나는 게 있을 테니까요.”
“그런 게….”
“유라 씨의 행동은 이미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유라 씨도 이곳에서 오랫동안 지내신 분인 만큼 아마 제 결정을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설사 유라 씨가 느끼기에 자신의 행동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셨더라도 다수가 유라 씨를 불편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다른 파티원들을 위해서라도 결단을 내려주셨으면 합니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이해?”
아직까지도 자신의 위치에 대해서 깨닫고 있지 못하는 모양.
그저 억울하기만 하다는 표정이다.
‘이런 애랑….’
정치질을 했다는 사실이 황당하게만 느껴질 지경.
지금에서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이 여자는 무능하다.
사냥 실력이나 스펙에는 관계없이 리더로서도 적합하지 않다.
묘하게 바뀌는 표정을 바라보면 더욱더 그렇다.
나와 최영기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 조금 심상치 않게 변하고 있다. 아마 어떤 연결점을 찾으려 뇌내망상을 하기에 여념이 없을 것이다.
어째서 최영기와 내가 자신을 향해 이런 모습을 보이는지, 자신만의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아마도 순식간 일 것이다.
우리는 용병여왕이라는 접전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최영기 씨.”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기 힘듭니다만.”
“공명정대하고 뭐, 신의를 지킬 줄 안다는 소리가 들려서 그나마 믿었던 사람이었는데…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나 봐?”
‘뻔하지 뭐.’
“용병여왕님한테 무슨 언질이라도 받으셨어요? 자기 기둥서방 좀 잘 부탁한다고? 처음부터 우리 길드를 내칠 생각이었죠? 정말로 어이가 없어가지고… 앞에서는 깨끗한 척 정의로운 척 지랄을 해대더니 결국에는 이거였어? 왜? 이기영 이 새끼한테 잘 보이면 용병여왕이 잘해준다고 했나보지?”
“유라 씨, 말씀이 조금 심하신 것 아닙니까. 희라 누나는… 이번 일과는 아무 관계없습니다.”
‘뇌내망상 제대로고요.’
“닥쳐, 이 새끼야.”
“흥분하지 마시고… 천천히 이야기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이제는 막나가고 있는 꼴이 가관이다.
이미 핸들이 고장 난 8톤 트럭의 심정으로 청와대를 향해 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 이면에는 살살 속을 긁는 내 말투와 표정이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고 있었겠지만 내 생각보다 조금 더 제대로 걸려들었다.
“좋겠네. 누구는 용병여왕한테 몇 번 대주고 아이템도 공짜로 받고 꿀 같은 경험도 해볼 수 있고 말이야. 던전 공략이 장난 같지? 그럴 거면 파란에는 왜 들어갔나 몰라. 붉은용병에 들어가면 되는 거 아니야?”
“유라 씨.”
말을 하면 할수록 자신의 이미지를 깎아 먹고 있는 꼴이다.
오랜만에 언급된 용병여왕 때문인지 정하얀의 심기도 불편해 보인다.
슬슬 입을 막을 타이밍이라고 생각하건만 이 여자의 갑작스러운 태세전환에 모두가 당황한 느낌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당황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최영기의 모습은 마치 최대한 분노를 삭이고 있는 모습이었으니까.
“언니, 그, 그만하세요.”
“언니, 그만하세요!”
“이거 놔, 미친년들아. 붉은용병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길드에서 이 일을 알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누가 봐도 파란과 용병이 우리 길드를 억압하고 있잖아! 이건 부당하다고! 정식으로 항의를!”
쾅!
계속해서 부당함을 토로하고 있던 정유라가 입을 닫는 것이 눈에 보였다.
눈앞에 있는 최영기 때문일 것이다.
주먹으로 옆에 있던 벽을 후려친 것.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얼굴이 그가 얼마나 분노했는지를 말해준다.
그러고 보니.
‘용병여왕이 있기 때문에 지금의 자신이 있다고 말했었나….’
제대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그럴 것이다.
우리 정의로운 영기 씨가 존경해 마지않는 희라 누나를 언급하며 미친 소리를 해댄 것이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기둥서방이 어떻고 대준다느니 어쩐다느니 개소리를 해댔다.
아마 정유라는 흥분한 나머지 자신이 뭔 소리를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이런 분위기에서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할 정도로 바보는 아닌 모양.
화를 참고 있는 최영기와 붉은용병들을 보니 그녀뿐만이 아니라 나 역시 조신해지기 시작했다.
‘조신해졌는데.’
말 그대로 미친 벌꿀 오소리처럼 날뛰던 여자가 현모양처로 돌변하는 건 순식간.
나도 모르게 부들부들 다리가 떨려온다.
스탯을 보고 대충 예상하기는 했지만 최영기가 저도 모르게 보내는 살기에는 숨이 턱 막혀올 지경이다.
이런 내 상황을 알고 있었는지 김현성이 손을 뻗자 순식간에 아까와 같은 감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 감사합니다.”
최영기의 모습은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의 수장을 욕했다고 해서 나올 반응을 훨씬 넘어섰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차희라가 더 인망이 두텁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반응이리라.
솔직히 검을 휘두르지 않은 것만 해도 칭찬해 주고 싶은 상황이기는 하다.
‘얘 좀 탐나는데….’
만약 박덕구가 없었다면 최영기를 이쪽에 불러오는 방향을 생각해 봤을 것이다.
이만큼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데도 자신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똥오줌을 가릴 수 있다는 증거였으니 말이다.
정유라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살의에 당황해 입만 뻐끔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능력치를 생각해 보면 이 기운에 저항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분명하다.
‘아주 좋아요.’
마치 폭탄이 터질 것 같은 상황.
그 가운데 최영기가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말은 전부 끝내셨습니까.”
“그게….”
“지금 당장 나가주셨으면 합니다.”
“지나치게 흥분했었네요. 방금의 일은 죄송하지만….”
“저는 지금 당장 나가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더 이상 그 어떤 말도 듣기 싫습니다. 아까 말씀 드린 대로 일정 지분은 따로 챙겨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쾅!
하는 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온다.
“나가 달라 했습니다.”
‘좋고요.’
창백하게 질린 표정이 시야에 들어왔다.
슬쩍슬쩍 히죽거리는 미소를 보내는 것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통쾌하다.
등 뒤로 뭔가 짜릿한 느낌이 스치고 지나갈 정도였으니 다른 말은 필요 없으리라.
“지금 당장 던전을 떠나 주셨으면 합니다, 유라 씨. 저희 마도 길드에서도 더 이상 함께 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파티장들이 눈앞에서 형식적으로 건네는 말은 그나마 예의를 지키고 있었지만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은 조금 무섭게 느껴졌다.
온갖 욕설이 섞인 외침이 들려오는 것은 마치 중세의 마녀 사냥을 현대판으로 보는 느낌이다.
돌멩이만 던지지 않았을 뿐이지 저 여자는 완벽하게 화형대 위에 올라가 있다.
다른 점은 저 여자가 정말로 마녀의 포지션에 있다는 것.
지금에 와서 자신은 마녀가 아니라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보내고 싶겠지만 군중은 돌을 던지는 것이 멈추지 않는다.
얼마나 억울했는지 입가를 깨물고 있는 입에서는 피가 튀어 나오고 충혈된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중이다.
어떻게든 꾸역꾸역 나오는 눈물을 참으려고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참는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키야.’
강 건너 불구경 하는 것은 언제 봐도 묘한 카타르시스가 있다.
그게 내 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더욱이.
결국 조금의 시간이 더 흐른 뒤에 정유라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이쪽을 지나치는 것이 보였다.
그렇지만 나를 째려보는 눈빛은 그녀가 내게 상상하기 힘든 원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짧은 순간에 입꼬리를 올리자 심지어 어깨를 치고 지가는 것이 느껴졌다.
얼마나 세게 치고 지나갔는지 내 몸이 살짝 뒤쪽으로 밀려날 정도였다.
‘아이고….’
물론 무섭지도 않고 위험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본래 한 번 물었던 건 끝장을 내야 안심이 되는 성격인 만큼 나 역시 이후를 생각해 두었다.
혹시나 이쪽에 원한을 품은 미친년이 단검을 들고 등을 찌를 수도 있으니 조금 더 확실히 하는 게 맞다.
말 한 마디 잘못 내뱉은 걸로 인생이 끝장나는 경우를 그동안 꽤나 많이 봐왔다.
현대 사회도 마찬가지지만 이곳도 아마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추측하는 만큼 이번에도 내 생각대로 흘러가는 게 당연하리라.
더 이상 그녀와 하는 건 정치 싸움이라고 보기에도 힘들다.
일방적인 괴롭힘이고 어떻게 보면 값비싼 수업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이번 챕터는.’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중 나머지 남은 하나.
“그럼 출발하도록 합시다.”
“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아뇨. 저희야말로….”
바로.
언론에 관한 이야기였다.
‘끝난 줄 알았을 거다. 이년아.’
나는 그녀가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더 독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