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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71화 (70/1,590)

# 71

회귀자 사용설명서 071화

언론(4)

분위기를 보니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똑똑하네.’

시대에 흐름에 탑승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검은백조에서도 이런 흐름에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고 내부적으로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인재를 찾았을 것이다.

그게 이지혜라는 건 조금은 당황스러웠지만 아예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정치에 능하기도 했고 그나마 내가 본 사람 중에서는 머리 회전이 빨랐으니까.

자기 주제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정유라보다 백 배는 낫다.

지금 이렇게 이쪽에 반갑게 인사를 보내는 것도 계산된 행동일 가능성이 높다.

‘보여주고 싶다 이거지?’

함께 온 검은백조 길드의 일원들에게 나와의 친분이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함일 터.

모른 척해도 별로 상관없지만 아마 저쪽의 행동에 맞춰주면 이쪽에 떨어지는 것도 있을 것이다.

이지혜는 거래가 뭔지 확실히 이해하고 있는 여자다.

“정말로 지혜 맞아?”

“네. 여기서 또 뵙네요. 헤헤.”

“오랜만이네. 그동안 잘 지냈어?”

“네. 물론이죠. 앞으로는 보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또 보게 돼서 다행이네요.”

“반갑다. 정말.”

고개를 끄덕이며 눈웃음을 치는 것을 보니 내가 생각하는 게 맞는 모양이다.

검은백조에서 온 중년 여성은 꽤나 기분이 좋아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 쪽의 고인 물들도 무척이나 즐거워 보이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하하. 이런 인연이 다 있습니다.”

“네. 그러네요.”

‘왜 웃는 거야. 이 미친 늙은이는.’

애초에 저 늙은이들이 이 자리에 있는 것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묘하게 저자세를 보이고 있는 태도도 그렇다.

심지어는 눈치를 보는 것 같은 느낌.

당황스러워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검은백조가 아무리 린델을 대표하는 대형 길드라고는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파란이 굳이 고개를 숙일 필요는 없다.

현재 파란은 붉은용병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입장이었고 흘러가는 상황 자체가 이쪽에 유리하고 돌아가고 있었으니까.

얻을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정유라에게 빅 엿을 먹이는 것만이 아니다.

외교적으로도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나 개인보다 파란 전체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많다.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대충 봐도 사이가 좋아 보인다.

“늦게 인사드리러와 정말로 죄송합니다. 저희 쪽에서도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말입니다.”

“아닙니다. 이렇게 직접 와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충분? 지랄하네. 미친 늙은이가.’

지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고 있는 꼴은 꽤나 가관.

사건의 당사자들은 조용히 있는데 자신들끼리 사과를 주고받고 있다.

이쪽이 조용히 서 있는 것을 보고 인사를 건네 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다.

솔직히 무례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슬쩍 중년여자를 바라보자 뭔가 눈치가 보였는지 이쪽에 인사를 해오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아, 소개가 늦었군요. 검은백조 길드의 최은희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기영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 미친 늙은이는 나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곧바로 내 인사를 막고 다시 한번 여자를 향해 입을 여는 것이 보인다.

“이거 이럴 게 아니라 간단하게 차라도 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최은희 님.”

“예, 설호 씨. 그렇게 할까요?”

이쪽을 힐끔 쳐다본 늙은이는 최은희이라는 여자와 다시금 대화를 나누기 시작.

이 늙은이가 내 설계를 전부 망가뜨리고 있는 것을 보니 화가 치밀어 오른다.

‘뒤집어?’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쓰레기가 더 짜증나게 다가오는 어이없는 상황.

언젠가 짜증나는 짓거리를 해올 거라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개판을 칠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뭐라고 한마디를 하는 게 좋지 않을까 머리를 굴리고 있었던 찰나였다.

“차는 두 분이서 마시고 오시는 게 좋겠네요. 일단 해결해야 하는 문제도 있으니까요.”

이지혜가 조용히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아.”

조금은 황당하다는 이설호의 얼굴과 이지혜를 바라보는 최은희의 표정이 꽤나 비슷하다.

그렇지만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최은희을 보니 내 생각보다 이지혜가 이번 일에서 맡은 권한이 크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다는 거지?’

검은백조의 중역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높으신 위치에 있는 분들에게 무척이나 신뢰받는 모양이다.

이쪽에 그리 나쁜 상황은 아니다.

“그럼 그렇게 할까요? 설호 씨?”

“네?”

“저희끼리도 따로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이번 일에 대해서는 아이들에게 맡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일단은 가져온 선물부터 보여드리도록 할게요.”

“허허허. 이것 참 고맙습니다, 최은희 님.”

‘미친놈.’

최은희이라는 여자가 우리 쪽에 있는 김설호보다는 조금 더 나아 보인다.

그나마 사태 파악은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살짝 이쪽을 돌아본 최은희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이지혜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럼 아가, 잘 부탁한다.”

“네, 언니.”

어딜 봐도 언니로 보이지 않는 외관이지만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

이윽고 김설호와 최은희를 비롯한 고인 물들이 응접실을 나가는 것이 보였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나와 이지혜와 정유라.

싱글벙글 웃고 있는 이지혜와는 다르게 정유라는 표정이 좋아 보이지 않다.

그동안 마음고생을 한 게 눈에 보일 정도.

아마 여러모로 스트레스가 심할 것이다.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기도 했고 일이 이만큼 커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사방에서 자신을 비난하는 것은 물론 붉은용병과의 관계도 틀어졌다.

많은 모험가들이 검은백조를 보이콧하고 있었고 심지어는 일반 파티에도 들어가기 힘든 상황일 것이다.

지금 그녀의 위치는 국민비호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길드 내에서 입지가 내려간 것도 당연하다.

아마 검은백조에서 아직까지 쫓겨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해야 되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그러게 왜 나댔는지 몰라.’

실실 웃고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당연지사.

어차피 우리밖에 없는 자리이기도 했고 이지혜도 딱딱한 분위기보다는 이런 분위기가 더 마음에 들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지혜가 소파 뒤에 몸을 눕히며 말을 이었다.

“짜증 나지 않아요?”

“뭐?”

“저기 늙은이 말이에요. 대충 봐도 쓸모없어 보이는 사람 같던데…. 나 같으면 머리통을 뜯어 버리고 싶었을 거예요.”

“뭐, 틀린 말은 아닌데… 이쪽도 나름의 사정이 있으니까. 그보다 네가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요. 검은백조 길드에서 원래 오퍼를 받고 있는 상황이기는 했는데 사실 출세길에서는 멀어지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런데 세상이 이렇게 변할지 알았겠어요? 우리 길드 측에서도 사태를 수습할 사람이 필요했고 제 입으로 말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나름대로 머리가 잘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편이거든요. 이런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사람으로 제격이라고 판단하신 것 같더라고요. 우리 길드의 윗분들이.”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이게 전부 오빠 덕분이죠. 역시 여자는 남자를 잘 만나야 된다니까.”

“그거 참 고맙네.”

“빈말로 하는 말이 아니에요. 실제로 이기영과 친하다는 덕을 톡톡히 보기도 했고, 이 모든 상황을 설계한 게 오빠라는 것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질문의 요지를 읽을 수 없다.

그렇지만 대놓고 내가 했다고 말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다.

다만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글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옆에 있던 정유라는 무척이나 황당한 표정이다. 자신은 아예 무시하고 진행되는 대화에 어처구니없는 눈치다.

나 역시 조금은 놀랄 수밖에 없는 상황. 이지혜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을 거라고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한때 검은백조에서 밀어주던 정유라를 아예 대화에서 배제할 줄은 몰랐다.

오히려 정유라가 이지혜의 눈치를 보고 있는 모습.

‘허.’

확실히 수완이 좋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 이상이다.

나와 커넥션이 있다는 것을 길드 내에 알렸다고는 해도 그 상황을 이용한 건 그녀였으니 말이다.

“어차피 그렇게 나올 거라고 이야기 했어요. 사실 제 입장에서도 뭐가 진실인지는 별로 상관없고…. 지금 중요한 건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지에 대한 거니까요. 흐음… 본격적인 대화에 들어가기 전에… 오랜만에 어때요?”

슬쩍 입고 있는 치마를 들추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당연하지만.

“관심 없어.”

응할 리가 없다.

“어머, 매정해라. 잠깐 예전 추억을 되새기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조건이나 제시해요, 누나. 피차 무슨 생각하는지 뻔히 보이는데 빙빙 말 돌리지 말고.”

“정말로 매정하네요. 옆에 있는 이 여자라면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오빠.”

“그 때문이 아니야.”

“이유는 대충 알 것 같기는 한데… 뭐,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일단은 사과부터 받으셔야겠네요. 아! 이제는 유라 씨 차례예요.”

살짝 정유라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이지혜가 눈에 들어왔다.

솔직히 말해서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그림이다.

이지혜를 이쪽으로 데려오지 못했다는 게 조금은 후회될 정도였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녀는 유능하다.

이지혜의 부름에 정유라는 슬쩍 이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당연하지만 사과하고 싶을 리가 없다.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나와 이지혜의 태도를 보고 있자면 더욱더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힘들게 한 글자 한 글자 떼기 시작한다.

전형적인 패배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올 정도다.

내가 원하는 방향은 아니기는 했지만 이런 방향도 나쁘지는 않다.

“…죄송합니다.”

“어머, 유라 씨. 조금 더 정중하게 사과하셔야죠. 우리 오빠 섭섭하시겠다.”

“죄… 죄… 송합니다.”

“…….”

그렇지만 여전히 성의 없어 보이는 모습.

이지혜가 정유라의 머리채를 쥔 것은 바로 그때였다.

‘허.’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정유라의 고개가 돌아간 것.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알 수 없다.

정유라가 그녀의 눈치를 보는 것을 보고 대충 예상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까지 추락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유라 씨, 제 말이 말 같지 않아요?”

성에 차지 않는지 한 번 더 손을 휘두르자 정유라의 고개가 그대로 돌아간다.

“똑바로 해주세요.”

솔직히 웃음이 나오는 상황이다.

지금 이지혜가 보여주는 태도로 정유라가 얼마나 망가졌는지 알 수 있다.

사실 정유라가 얼마나 몰락했는지 보다 이지혜가 보여주는 모습이 조금 더 흥미롭다.

지금 저런 행동에도 많은 계산이 들어가 있을 것이다.

상대에게 자신의 권위를 확인시켜주는 행동이기도 했고, 이쪽에 조금 알랑방귀를 끼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전투 능력이 전무한 몸으로 저런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는 부분.

정유라가 이지혜를 죽이는 것은 개미를 손가락으로 눌러 죽이는 것보다 쉽다.

그녀가 자신을 헤치지 못할 거라는 자신감에서 나타난 행동으로 보였으니 파란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위치보다 이지혜가 검은백조에서 챙긴 위치가 더욱 커 보이는 것은 착각이 아니리라.

“엎드려서 똑바로 사과해 주세요.”

“…….”

요란한 소리와 함께 다시 한번 정유라의 고개가 돌아간다.

당연하지만 동정심 같은 건 들지 않는다.

오히려 조금은 통쾌하게 느껴진다.

변태는 아니지만 나를 짜증 나게 했던 상대가 저렇게 고통 받는 모습은 무척이나 기분이 좋다.

정유라의 눈에서는 이미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최대한 울음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캬. 우리 지혜 잘하네.’

정유라의 머리를 끌어 잡은 뒤에 억지로 자리에서 일으켜 세우는 모습은 가관. 박수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이다.

“똑바로 사과하라고 말했어요. 유라 씨.”

이쪽을 선택해도 저쪽을 선택해도 굴욕을 당하는 것은 마찬가지.

결국 정유라가 천천히 엎드리기 시작했다.

“옳지. 이제야 말을 알아들으시네요.”

“죄….”

절이라도 올리는 것처럼 땅바닥에 몸을 납작 엎드린 것이 보였다.

“죄송합니다. 흐으윽… 정말로 죄송합니다. 함부로… 대해서… 죄송합니다.”

묘한 카타르시스가 있다.

나를 단번에 죽일 수 있는 여자가 이렇게 비참하게 엎드리고 있으니 정말 묘한 쾌감을 느꼈다.

살짝 허리를 떨자 곧바로 이지혜가 입을 열어왔다.

“뭐 원하시는 거라도 있어요. 나랑은 싫으면 이 여자랑은 어때요?”

“아니, 별로 관심 없다니까.”

“그러고 보니 뭔가 원하시는 게 있는 것 같은 느낌인데….”

“그러고 보니 신발이 조금 더러워 진 것 같기도 하고….”

이지혜가 살짝 웃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아깝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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