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회귀자 사용설명서 073화
야망 있는 남자(2)
“아! 일단 저희의 요구사항부터 말씀드려도 될까요?”
“물론.”
“일단 공식 입장을 발표해 주시면 돼요.”
“예를 들면?”
“검은백조의 정유라로부터 진심어린 사과를 받았고 서로 오해를 풀었다는 이야기요. 육체적으로 위협을 받은 적은 없다는 말도… 같이 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네요. 그밖에는 오빠가 알아서 생각해 주시면 될 텐데… 뭐, 지금 이 사태를 진정시켜주는 발언이라면 어떤 말이라도 상관없어요.”
“흐음…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쉽진 않을 거야.”
“추가로 검은백조의 달라진 모습에 대해서도 언급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나를 홍보 수단으로 쓰겠다, 이거야?”
“그야 당연하죠. 일부에서는 저항의 상징 이기영이니 하는 소리가 들리고 있는데… 아마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칭호까지 생길걸요. 아무래도 오빠가 추구하는 이미지가 있을 테니 추가 사항에 대해서 언급하는 건 필수 사항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제 얼굴을 봐서라도 한 번쯤은 언급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여러분들이 한 대형 길드를 변화시켰습니다. 여러분이 승리했습니다. 저 혼자만의 승리가 아닙니다! 뭐, 이 정도가 좋겠네요.”
“승리는 무슨….”
꽤나 앙큼한 생각을 하는 것을 보니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검은백조의 권력 체계가 바뀐 것은 어디까지나 여러 가지 정치적 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도화선이 된 것이 지금의 사태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검은백조가 가지고 있는 내부적인 문제가 아니었다면 아마 바뀌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대중의 승리에 초점을 맞춰 발표해 달라는 이야기에 웃음이 나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할 것이다.
“진실이 뭔지는 상관없잖아요? 대중이 승리했다고 생각하도록 하는 게 중요한 거라는 건 알고 있으실 텐데….”
“그래서 웃음이 나오는 거야.”
“뭐, 저희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니까 이쪽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여러 가지 발언으로 기름만 붓지 않으시면 된다고요. 여러분을 이해한다든가 패악질이라든가 이런 말을 조심해 주시는 걸 바라는 거예요.”
“이해했어. 고려해 보도록 하지.”
“옛정을 생각해서라도요. 네?”
살살 눈웃음을 치는 게 시야에 들어오지만 굳이 신경 쓰지는 않았다.
“또 있나?”
“물론이죠. 오빠의 권한에서는 조금 벗어날 수도 있는 이야기이긴 한데… 붉은용병과 검은백조 그리고 파란의 삼권 동맹을 추진하는 중이에요. 이것도 공식적으로 발표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오빠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거예요.”
“길드 내에서 영향력을 넓힐 수 있다는 소리지?”
“네. 물론 이건 당장 발표해 달라고는 말하지 않을게요. 아무래도 시국이 어수선하니까. 다만 친근한 분위기에 대해서 언급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달라진 검은백조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정도가 괜찮아 보이네요.”
“원하는 게 조금 많아 보이는데… 보상은 제대로 준비되어 있는 거지?”
“네. 일단 공포의 정원에서 얻은 아이템과 자재, 재화는 모두 오빠 개인에게 들어갈 거예요. 공략이 완료된 던전의 지분이나 토지문서도 마찬가지로.”
“여론을 생각하면 그렇게 반가운 소리는 아닌데.”
“공식적으로는 기부에 들어갈 겁니다.”
“아아아아. 이해가 되네.”
“오빠가 저희 길드에서 무엇을 받았다는 건 절대 알려지지 않을 거예요.”
사실 완전히 믿을 수는 없다.
눈앞에 있는 이지혜라면 충분히 이쪽의 뒤통수를 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아마 이쪽이 어떤 식으로라도 커다란 이득을 받았다는 사실이 외부로 알려진다면 언론을 이용해 개인의 이득을 꾀 했다는 비난 여론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에 알려진다고 해도 충분히 수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고요.”
‘그 말은 맞아.’
이미 여러 언론이 내 편에 서 있다.
만약에 그런 일이 터졌다고는 해도 수습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이미 린델 내에 대부분의 언론은 파란과 붉은용병에 편에 서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검은백조가 이쪽에 러브콜을 하고 있는 것도 무척이나 당연하다.
만약 이지혜를 비롯한 검은백조의 인사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면 말이다.
“또 길드 차원에서 김현성 파티에 대한 지원이 있을 거예요.”
“너무 후한 거 아닌가?”
“그만큼 오빠한테 잘 보이고 싶은 거 아니겠어요?”
“이런 식의 주목은 반갑지만은 않은데….”
말은 안하고 있지만 사실 검은백조 내에서 내 이미지를 꽤나 부풀려서 이야기했을 것이다.
내 가치가 올라가야 나와 연줄을 가지고 있는 이지혜의 위치도 함께 올라간다.
말하자면 상생관계인 셈.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나쁘지는 않다.
결과적으로만 본다면 내가 받을 수 있는 것들이 무척 많았다는 소리였으니까.
“또 원하시는 것들이 있으시면 최대한 이쪽에서 맞춰드릴 수….”
“그건 네가 알아서 하도록 해. 뭘 얼마나 줄지에 대해서는 길드가 생각하는 방향이 있을 테니 뭘 해주든지 이제는 상관없어.”
“조금 부담되네요. 시험하겠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그렇지는 않아. 아니 솔직히 이야기하면 어째서 이 정도로까지 해주는 건지 이해가 안 되네. 물론 검은백조의 행동이 당위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조금 과해. 챙길 건 나뿐만이 아니잖아? 붉은용병까지 함께 케어해야 되는 상황에서 수지가 맞는 장사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거야.”
“제 입으로 이런 말 드리기는 부끄럽지만 제 입김이 아예 들어가지 않은 건 아니에요.”
“그래서 더 궁금한 거야. 옛정에 얽매여 있다고 하기에는 누나는 너무 이성적이야. 정말로 원하는 게 뭔지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지혜의 표정은 변함이 없다. 당황한 것 같지도 않다.
그녀는 무척이나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당연하지만 내가 예상하고 있었던 대답과는 거리가 꽤나 멀었다.
“저번에 말하지 않았어요?”
“뭐.”
“난 야망 있는 남자가 취향이라고.”
“농담하지 말….”
그녀의 눈을 바라본 순간 입 안에 있던 말을 끝까지 내뱉을 수 없었다.
이쪽을 똑바로 보는 표정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실실 웃으며 눈웃음을 치고 있는 표정이 아니다.
“제가 농담하는 것 같아요?”
“…….”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줄게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왠지 모르게 그래야 할 것 같았으니까.
“미 전 대통령 클린턴 부부의 일화 들어본 적 있어요? 픽션이지만 조금 흥미로운 이야기인데….”
“없어.”
그녀는 잠깐 숨을 내쉰 뒤 말을 잇기 시작했다. 조금은 뜬금없는 이야기였지만 흥미로운 이야기이기도 했다.
“빌 클린턴과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 시절 당시 주유소에 주유를 하러 간 적이 있었어요. 그 주유소에서 힐러리 클린턴이 낯선 남자와 뜨거운 포옹을 했다지 뭐예요.”
“재미있는 이야기네.”
“알고 보니, 그 주유소에 있었던 남자는 힐러리의 전 남자친구였고… 돌아가는 길에 그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던 중에 빌 클린턴이 조금 짓궂게 말했다고 해요. 만약 아직까지 저 사람과 사귀고 있었다면 당신은 주유소에서 함께 일하고 있었을 거야… 라고 말이에요.”
“…….”
“그 말에 대한 힐러리의 대답이 뭐였을 것 같아요?”
“…….”
“아니. 당신이 아닌 저 사람이 미합중국 대통령이 되어 있겠지.”
재미있는 이야기다.
확실히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빌 클린턴과 힐러리 클린턴의 일화를 나와 이지혜에게 대입해 보자면 그녀는 나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줄 수 있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공감이 아예 안 되는 일화는 아니에요.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저 이야기에 전제 조건 하나를 더 붙이고 싶거든요.”
“그건.”
“남자가 얼마만큼 야망을 가지고 있는가.”
‘허….’
“남자란 여자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동물이라고는 하지만 행동할 수 있는 야망이 없는 남자는 그다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거든요.”
“지금 내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 이해하고 있는 거지?”
“그럼요. 무려 용병여왕의 정부이신데… 그뿐이겠어요? 정하얀이라는 폭탄도 옆에서 애지중지 키우고 있잖아요. 그렇지만 여자의 매력이라는 건 가지고 있는 외모나 힘만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랍니다.”
“하….”
“지금 당장 만나달라고 구질구질하게 달라붙고 있는 건 아니에요, 오빠. 그런 여자가 인기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거든. 피에 미친 용병이나 눈깔이 맛탱이 간 이상한 마법사와 물고 빨고 뒹굴든 나는 하나도 상관없어. 그게 전부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과정이라면 오히려 환영하고 싶어질 정도고. 결정적으로 최후의 선택받는 건 나 같은 여자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
“오빠 같은 종류의 남자를 왕으로 만들 수 있는 여자.”
‘허….’
당황스러워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기적인 야심가라는 성향을 봤을 때부터 그리고 튜토리얼에서부터 그녀를 이해하고 있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쪽에 관심이 있다는 이야기 때문에 놀란 것이 아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묘한 자신감 때문이다.
이지혜의 능력치는 확실히 형편없다. 재능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이지혜는 자신의 재능 한계치를 모르고 있는 상태겠지만 아마도 조금씩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직업을 지휘관으로 고른 것 역시 그녀가 자신의 한계를 눈치채고 있다는 증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닮은 이 여자는 자신감이 있다.
능력치나 이곳에서 통용되는 무력을 제외하고 자신이 고른 남자를 왕으로 만들어줄 수 있다는 자신감.
‘뭐…….’
언제부터 이 여자가 이런 생각을 했는지는 당연히 알 수 없다.
그녀의 성향을 생각했다면 아마 처음부터였을 가능성이 높으리라.
이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여러 생각을 하던 도중에도 살짝 몸을 일으키고 있는 이지혜가 시야에 비쳤다.
조심스럽게 내 얼굴을 쓰다듬고 있는 모습 역시 눈에 보인다.
“어째서 나야?”
“글쎄. 굳이 이유를 만들어 보자면….”
“…….”
“그때 오빠가 다시 보자고 말해줘서?”
살짝 입을 맞춰오는 걸 굳이 피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이용할 가치가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 길드 차원에서 만들어준 것뿐만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말씀드린 것도 잘 생각해 주세요, 오빠.”
“생각해 볼게요, 누나.”
‘전부 다 좋은 이야기였으니까.’
살짝 구겨진 인상.
그렇지만 입가에 걸린 미소를 보니 오늘 있었던 대화가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렇게 몸을 일으킨 그녀가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을 때였다.
‘아.’
응접실에 문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정하얀이 시야에 비친 것.
잠깐 깜짝 놀란 나와는 다르게 이지혜는 놀라는 기색 없이 정하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네요, 하얀 씨.”
“네…. 오랜… 만… 이네요. 지혜 씨.”
‘시발.’
“기영 오빠랑 사귀기로 하셨다면서요? 현성 씨나 덕구 씨도 잘 지내죠?”
“네….”
“어머 축하드려요. 예쁜 사랑하는 걸 보니까 제가 다 기분이 좋네요. 앞으로도 종종 보게 될 것 같은데… 잘 부탁드려요.”
“네….”
“그럼 이만.”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정하얀의 상태가 묘하게 다르다.
물론, 안에서 무슨 이야기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장소는 다른 사람에게 방해받지 않는 마법 처리가 되어 있는 방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묘한 분위기를 느낀 것 때문인지 이전에 박혜영을 바라보던 눈빛으로 이지혜를 보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지금의 정하얀은 눈이 맛이 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제기랄.’
심지어 이쪽을 추궁하는 듯한 표정으로 빤히 바라보는 상황.
이지혜는 슬슬 입꼬리를 올리며 나에게 미소를 보낸다.
세상은 넓고 여자는 많다.
그렇지만.
어째서 나는 이렇게 정신이 나간 여자들만 꼬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