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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76화 (75/1,590)

# 76

회귀자 사용설명서 076화

세 번째 직업(2)

회귀자의 신뢰를 받는다는 건 물론 행복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런 종류의 신뢰는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를 어느 정도로 평가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나는 아직도 김현성의 따뜻한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시기에 있는 어린아이다.

특히나 이런 성장 방향에 대해서는 더욱더 그렇다.

물론, 전직과 능력치를 올리는 게 뭐가 대수냐고 물으면 마땅히 대답할거리가 없지만 이 정도의 과대평가는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조금은 불신해라, 이 새끼야.’

그동안 혼자서도 잘한다는 이미지를 심어주기는 했지만 이번 사태는 마음에 안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현성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번 원정은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클 겁니다.’

기존의 파티원들이 내가 주는 심리적 안정감에서 안전하게 사냥해 왔다는 말을 조금은 실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저도 가지 않을 거예요. 가기 싫어요. 절대로 안가요.”

“…….”

문제는 정하얀이었다.

원정 날짜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여러 가지 변명을 들며 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게 황당하게 느껴지는 부분.

말이 나왔던 첫날에는 김현성이 목표라고 말한 능력치와 전직을 하기 위해 움직였다.

원정을 준비하는 며칠 안 되는 시간 동안 전직을 하거나 능력치를 달성한다면 원정을 떠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정하얀이 목표치에 다다른다고 한들 원정을 떠나는 것은 이미 확정된 사실이었지만 그걸 빌미로 어떻게 비벼볼 생각이었을 거다.

‘당연하지만.’

전설급의 재능도 단기간 내에 눈에 띄는 성과를 보여주는 것은 불가능 했다.

물론, 짧은 시간에 폭발적으로 상승한 능력치 자체로도 경악할 만했지만 목표치에는 다다르지 못했다.

결국 정하얀은 무척이나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주곤 했는데 그 상태가 마치 시한부 환자가 죽음을 인정하기까지의 단계와 굉장히 흡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으로 이루어지는 다섯 단계였다.

첫 번째 단계가 찾아오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 달 동안 떨어져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설마 정말로 그렇게 될 리가 없다든가 농담이 분명하다든가.

그렇게 떨어지는 것 자체를 상상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열심히 짐을 챙기는 박덕구나 선희영을 마치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것처럼 멀리서 바라봤고, 그때의 회의가 없기라도 했던 것처럼 행동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고 원정일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

그 후에 찾아온 단계가 바로 분노였다.

‘…….’

갑작스레 원정 스케줄을 만들어 버린 김현성을 미워하게 된 것이다.

다행이라고 하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살기나 살의는 품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생사를 함께한 동료라는 의식은 있는 모양이다.

방 안에서 혼자 소리를 지르는 시간이 많아졌고 실제로 굉장히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를 제외하고 최약체라고 할 수 있는 김예리에게 분노를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런 원정을 떠난 나름의 이유를 찾는 것이다.

활을 쏘는 궁수 꼬맹이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런 숙제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직접적으로 김예리에게 신경질을 내거나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다.

정하얀은 순수했으니까.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 하지만 어딘가를 향해 바보라든가 멍청이라든가 귀여운 욕을 쏟아내곤 했다.

박덕구 오피셜에 따르면 박덕구에게 다가가 김예리의 대한 뒷담화를 한 적이 있단다.

정하얀의 인성을 생각해 보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 다음 단계에 들어갔을 때는 말이 무척이나 많아졌다.

‘타협?’

마치 나로 빙의라도 한 것처럼 여러 가지 조건을 제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말로 열심히 할 수 있어요. 원정에 가지 않고 여기 있는 걸로도 능력치를 더 많이 올릴 수 있고, 더 열심히 할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요. 흐으윽.’

라든가.

‘그러면 일주일만 함께 가는 게 어떨까요? 그게 더 효과가 좋을 거예요.’

라든가.

‘오빠도 함께 출발하되 현성 씨처럼 지켜보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같은 소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목표와 수치가 제법 구체적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이곳에 남는 게 더 효과적인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볼 정도.

사냥을 떠났을 때와 이곳에 남아 있을 때의 능력치의 변화에 대한 통계적인 분석을 내놓았을 때는 솔직히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물론 김현성에게도 여러 조건을 제시한 것으로 알고 있다.

박덕구와 선희영에게도 마찬가지다.

정식으로 항의해야 된다고 이상한 선동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런 종류의 선동은 박덕구가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단순한 추측에 불과했지만 아마 박덕구도 타협 단계에 들어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실제로 나에게 찾아온 적도 있었으니까.

정하얀을 보고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 본 것이다.

사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다음 단계인 우울이었다.

‘우울….’

눈에 띄게 살이 빠지기 시작했고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일이 많아졌다.

본인의 몸 상태를 본인이 인지했는지 아프다고 말하며 갈 수 없겠다고 종종 말해오기도 했고 마치 중증의 우울증 환자가 된 것 같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멍하니 하늘을 보는 일이 많아졌고.

‘정말 싫어요. 정말로….’

혼자 중얼거리는 주기도 짧아졌다.

정하얀뿐만이 아니라 나도 함께 힘들었던 시기다.

그녀를 어르고 달래는 시간이 많아진 것이다.

물론 보상에 대해서 언급한다든가, 그동안 밀린 보상을 한 번에 해주는 방식으로 그녀를 진정시키기는 했지만 한 달 이상을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그 모든 행복한 시간을 날려버릴 정도로 충격적이었던 것 같았다.

물론 정하얀도 내가 위로해 주는 상황을 즐기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우울한 감정이 더 커진 것 같다.

함께 있는 시간이 달콤하면 달콤할수록 멀어지는 시간이 무섭다는 걸 실감하는 것이다.

결국에는 스킨십을 하는 동안에도 눈물을 쏟아내는 것으로 네 번째 단계가 마무리됐다.

가장 큰 문제는 마지막 단계인 수용이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

앞선 네 단계를 전부 눈으로 지켜봐왔기 때문에 마지막은 결국 수용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안타깝게도 정하얀은 이별에 초탈한 상태가 되지는 않았다.

억지수용이라고 하는 것이 맞으리라.

끝까지 현실을 부정했고 심지어는 가기 전 날까지 믿고 싶지 않아 했다.

울고불고 했지만 효과가 있을 리가 만무.

그렇지만 파티의 결정이기도 했고 내가 내린 결정이기도 했다.

정하얀의 입장에서는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억지수용의 단계로 한 달 동안의 헤어짐을 준비한 것.

만약에 1년 이상 혹은 평생 보지 않는다고 했을 때의 그 파장이 어떻게 올지 상상하기 무척 힘들었다.

나를 만나며 이상한 성향을 가지게 된 것과는 별개로 그녀는 헤어짐에 익숙하지 않다.

아마 언니들을 포함한 가족에게 버림받은 이후 오랜 기간 혼자 생활했던 것이 저런 성격을 만들어 내는 데 일조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정하얀이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과는 별개로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 원정 날짜는 계속해서 다가오고 있었다.

솔직히 원정 준비가 잘 되었을 리가 없다.

정하얀은 자기 멘탈을 지키는 것도 힘들어 보였고 이해는 되지 않지만 박덕구 역시 상태가 조금 이상했으니까.

선희영 같은 경우에는 그저 담담하게 이후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 거 같았지만 봉사를 한동안 가지 못했던 걸로 스트레스가 조금 쌓여 있는 상태였다.

솔직히 김예리는 뭘 생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를 제외한 파티원의 원정 준비를 바라보는 일은 솔직히 무척 힘들었다.

당연하지만 버림받을까 봐 불안해진 상태가 아니었다.

‘이렇게 개판이었나?’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물론 뭔가 이상한 박덕구와 정하얀 그리고 원정이 익숙하지 않은 선희영.

꼬맹이까지 끼어 있었기 때문에 준비가 미흡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김현성 역시 이런 과정에서 손을 놓아버리자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내가 걱정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정말로 저 상태로 출발할 겁니까?”

“네. 아무것도 도와주지 않는 게 맞습니다. 저희 파티원들은 명령 받는 것에 무척이나 익숙해져 있습니다. 아마 기영 씨도 느끼고 계실 겁니다.”

“네….”

“원정 중에 깨닫는 게 있을 겁니다.”

“…….”

“그동안 심리적으로 편한 상태에서 원정을 임했다는 건 지금과 같은 뜻이었습니다. 물론 사냥 중에는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겠지만… 덕구 씨나 희영 씨는 틀림없이 그 성장치가 높습니다. 하얀 씨는 두말할 것도 없지만 솔직히 모두가 문제가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저와 기영 씨가 함께 다니면 사고는 없을 테지만 만약에 둘 다 없다고 가정 했을 때에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김현성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단순히 사냥 같은 요인만이 아니다. 김현성 파티의 지휘체계 자체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파티의 리더인 김현성이 있고 차선책으로는 내가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 파티에는 그 뒤가 없다.

선희영이든 정하얀이든 박덕구든 간에 누구 하나가 나서서 원정에 대한 방향을 찾는다면 준비하는 과정이 수월해지는 것은 당연지사.

그러나 누구하나 제대로 된 질문이나 답을 찾는 사람이 없다.

이렇게 하면 되겠지.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조금 더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 원정은 훈련을 하는 것과 동시에 집단 내에서 우리의 차선책을 찾는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잘될까?’

솔직히 조금은 회의적으로 느껴지긴 한다.

지금 같은 모습을 보인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한 달이나 되는 원정을 준비한다고 하기에는 소비 물품이 턱없이 부족했고 개인이 필요한 장비나 도구도 제대로 챙기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극단적으로 예를 들자면 어린아이들끼리 여행을 준비하는 것 같은 느낌.

김예리가 챙긴 것이라고는 화살과 활이 전부.

정하얀은 멀리 나가는 의미를 아예 모르는지 나와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 물건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게….’

까놓고 말해서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다.

우리 파티에게 투자를 했던 많은 길드나 집단이 지금 이 꼴을 본다면 당장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발버둥 치리라.

“아무리 그래도… 기본적인 건 준비하고….”

“정말 기본적인 것은 어느 정도 챙겨놨습니다. 그나마 덕구 씨나 희영 씨가 준비한 것들이 있으니까요. 저도 불안한 건 똑같습니다만 이렇게 하는 게 맞습니다. 자신들이 피부로 느끼는 것과 느끼지 않는 건 분명히 차이가 있을 겁니다.”

“그렇군요.”

“그럼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김현성과 함께 밖으로 나가자 나와 녀석을 기다리고 있는 파티원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름대로 커다란 가방을 들고 있기는 했지만 실속 없는 물건이 전부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원정 준비를 완벽히 마친 줄 알고 있는 박덕구를 바라보니 절로 한숨이 나올 지경.

답답한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 명씩 이쪽에 말을 걸어온다.

“너무 걱정하지 마쇼, 형님. 뭐, 한 달이나 걸리지도 않을 거요!”

한 달 이상이 걸릴 가능성도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제가 없는 동안 잘 부탁드려요, 기영 씨. 아무래도 봉사 활동을 가지 못하는 게 마음에 걸려서….”

밖으로 나간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봉사 활동을 받아야 될 처지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빠… 오빠아….”

눈에 눈물을 머금고 이쪽에 푹 안겨오는 정하얀을 봐도 가슴이 찡해지지 않을 지경.

“그, 그동안 몸 조심히 계셔야 해요. 그, 그리고….”

“응. 걱정하지 마, 하얀아.”

너희가 더 걱정되니까.

혹시라도 자신이 없는 타이밍에 이쪽이 다른 사람을 만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것 같지만 일단은 이별의 아픔이 더 큰 모양.

출발하자는 김현성의 목소리가 들려와 살짝 정하얀을 밀어내기는 했지만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힘으로 어떻게든 붙들고 있는 모습.

결국에는 툭하고 떨어지기는 했지만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는 얼굴을 보는 게 쉽지가 않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거, 걱정하지 마쇼.”

‘고행길.’

이번 원정은 김현성과 함께하는 버스여행이 아니다.

장담컨대 그 어떤 수도승이 걸었던 길보다 더욱 고통에 찬 고행길이 될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같이 안 간 게 다행일 수도 있어.’

반 정도는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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