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회귀자 사용설명서 079화
세 번째 직업(5)
“벽 그리고 침대에서 보여요.”
“…….”
“일단은 벽부터 말씀드려도 될까요?”
“네.”
“혹시 바로 옆방을 사용하시는 분이 하얀 씨…… 맞죠?”
“네. 그렇습니다만.”
“하얀 씨가 조금 음흉한 면이 있네요.”
대충 뭔지 예상이 가기 시작했다.
애초에 튜토리얼 때부터 정하얀이 환상 마법으로 벽을 만드는 걸 봐왔다.
그렇지만 내가 벽 하나가 통째로 바뀌어 있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는 건 너무 당황스럽다.
설마 하는 생각으로 벽을 손으로 매만져 봤지만 눈앞에 있는 것은 마법이 아닌 실제로 존재하는 벽이었다.
‘전부 바뀌지는 않은 건가?’
분명히 일반 벽이다. 조금은 의아한 표정으로 황정연을 바라보니 그녀가 즐겁다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벽이 통째로 바뀐 건 아니에요. 대신 작은 구멍이 있어요.”
“네?”
“여기 한 번 손가락을 넣어보시면 제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실 수 있으실 거예요.”
이쪽에 걸어둔 안전거리를 유지하려는 듯 천천히 손가락으로 인도하는 모습이 보였다.
자리한 곳에 슬쩍 손가락을 넣어보니 쑥 하고 벽면으로 손가락이 뚫고 들어가는 모습은 심히 당황스러울 정도다.
지금까지 이 구멍의 존재를 모르고 살았다는 게 황당했다. 손으로 직접 만지고 나서야 마력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모를 수가….”
“아주 미약한 마력이니까요. 그리고 이 방 자체가 이미 마력에 둘러싸여 있으니 눈치채기 힘드신 것도 무리가 아니죠. 기영 씨는 마력에 그렇게 민감한 체질도 아니실 것 같고… 무엇보다 이 구멍은 생긴 지 얼마 안 된 것 같네요.”
“아, 그렇습니까?”
“네. 한 달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어째서 하얀 씨가 기영 씨 방을 훔쳐보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예상은 가는데요. 후후후.”
“아… 네.”
불행 중에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리라.
물론 이 방에서 뭔가 엄한 짓을 한 기억은 없지만 그래도 정하얀이 내 모든 모습을 봤을 거라고 생각하니 찝찝한 기분이 든다.
심지어 샤워를 마친 뒤에 알몸으로 나온 적도 있고 그대로 침대에 누워버린 적도 있다.
조금 찝찝하기는 했지만 이것 역시 이해해 준다고 한다면 이해해 줄 수 있는 부분이다.
‘원인은 나니까.’
이 정도로 발전할지는 생각도 못했지만 어찌됐든 정하얀을 이쪽으로 끌어드린 것은 나.
이쪽에서 감내해야 될 부분이다.
어쩌면 겨우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 혼자 고개를 끄덕이기가 무섭게 곧바로 목소리가 들어와 꽂혔다.
“사실 정말로 놀라운 건 이 침대예요.”
“침대 말입니까?”
“이건 마법학의 새로운 혁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물건이에요.”
“아….”
남 일이라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씁쓸해졌다.
그렇지만 정말로 놀랍다는 눈빛을 보내고 있는 것을 보니 이 침대에는 내가 상상하기 힘든 뭔가가 숨겨져 있는 모양.
슬쩍 그녀를 바라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여는 황정연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피로 회복 마법이네요.”
“그렇군요.”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기영 씨의 상태를 체크하는 것은 물론, 여러 종류의 마법이 걸려 있어요. 하나하나 전부 다 설명을 드릴 수 없을 정도로 많네요. 활력을 돋우는 마법부터 두뇌 회전과 혈액 순환을 빠르게 해주는 마법까지. 방범 대책 마법과 더불어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에 기영 씨를 보호해 줄 수 있는 보호 마법까지 내장되어 있어요. 만약에 이 길드 하우스에 대형 마법이 떨어진다고 해도 아마 기영 씨는 무사하실 거예요. 걸려 있는 마법이 마법이다 보니 이 침대에서 주무셨다면 쥐 죽은 듯이 잠드셨을 것 같네요. 일어나신 후에 피곤하신 적이 없으셨을 것 같은데… 맞나요?”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조금 개운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만.”
“그야 이런 침대에서 주무셨다면 피로가 싹 가시는 게 당연하겠네요. 로맨틱해라….”
조금이지만 괜스레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내가 생각하기 힘든 종류의 마법이 걸려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종류일 줄은 몰랐다.
조금 당황스러웠던 건 정하얀이 걸었던 마법의 종류가 인챈트라는 것.
“그럼 침대 자체에 마법이 걸려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건….”
“네. 불가능하죠. 만약에 가능하다고 해도 효율이 좋을 리가 없고요. 주문을 인간이 아닌 물건 같은 대상에 우겨 넣는다는 건 이미 여러 학파에서도 포기한 부분이니까요.”
“네. 아이템 효과가 들어 있는 아이템은 고작해야 이 대륙에서 나온 완공품이 대부분일 텐데요. 저도 여러 가지에 개인적으로 조사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혁명적이라는 말씀을 드린 거예요. 기영 씨에게 걸려 있는 위치 추적 마법의 은폐기술이 논문급이라고 표현하자면 이 침대에 걸려 있는 마법은 마법 학계를 뒤흔드는 것은 물론, 새로운 학파를 만들 수도 있을 정도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요. 일대 종사가 할 수 있는 일을 이곳에 들어온 지 겨우 1년도 안 된 신입이 해버린 거라고요. 같이 마법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자괴감이 느껴질 지경이네요.”
“…….”
“물론 제한 조건이 없는 건 아니지만요.”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정하얀이라고는 해도 인챈트 기술을 완벽하게 실용화시켰을 리가 없다.
이미 이곳에 있던 모든 마법사가 도전하고 손을 놓아버린 연구다.
“이 마법은 기영 씨에게만 발동되는 마법입니다.”
“이해했습니다.”
“네. 아마 이번 마법도 촉매를 활용했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기영 씨의 신체 일부를 촉매로 활용해 마법을 압축하고 압축하고 또 압축해서 기영 씨 개인에게만 효과가 발동되는 마법을 꾸렸어요. 아마 모든 대상에게 마법이 발동되게 한다면 이 정도의 마법을 담을 수는 없었겠죠? 효율도 무척 떨어질 거고요. 어디까지나 기영 씨만을 위한 침대라는 뜻이 되겠네요.”
“그렇군요.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기영 씨가 가지고 있는 유전적인 정보 그리고 촉매가 가지고 있는 유전적인 정보가 일치하기 때문에 가능했던 마법이라고 설명하는 게 이해하기 편하시겠네요.”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된다.
“두 번째는 충전해줘야 한다는 거예요.”
“네.”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주문을 외운 당사자가 마력을 넣어야 돼요. 지금까지도 마법이 유지되는 것을 보니 침대에서 함께 있을 일이 많으셨나 봐요. 후후후.”
“…….”
“또 하나.”
“말씀해 주세요.”
“정확히 말하면 이 마법은 침대에 걸려 있는 마법이 아닙니다. 방금 말씀드린 대로 촉매를 활용한 마법이니까요. 흐음. 혹시 매트 좀 뒤집어 주시겠어요? 아니면 어딘가에 분명 공간이 있을 텐데….”
“네. 물론입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침대에 마력을 유지하고 있는 장치가 있다는 소리가 된다.
확실히 침대를 뒤진 지 얼마 되지 않아. 하얀색으로 된 뭔가가 매트리스 안쪽에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이빨?’
“역시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진짜였네요. 혹시 기영 씨 이빨이 맞나요?”
“네.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저 촉매에 저장되어 있는 기영 씨의 정보가 기영 씨에게 마법을 유지시켜주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이해할 수 있으시겠어요?”
“물론입니다. 이건… 비슷하니까요.”
“아. 이런 쪽으로는 전문가시죠?”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닙니다.”
‘이 방식은 틀림없이 연금술과도 비슷하다.’
단순한 마법이라고 볼 수 없다.
아무리 나 개인에게 유지되는 아티팩트라고 한들, 단순히 마력 파장만 맞춘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다.
이기영이라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전체적인 정보와 촉매로 쓰인 저 이빨이 가지고 있는 정보가 일치하기 때문에 발동할 수 있는 마법.
이런 종류의 방법을 발견하기 위해 얼마나 힘을 쏟았는지 상상하기 힘들었다.
‘허….’
조금만 더 생각해 보니 지금 이 방식은 내가 성장하려는 방향과 완벽하게 일치.
촉매에 여러 가지 마법을 섞는다는 발상도 그렇고 유전자 정보를 활용한다는 것도 그렇다.
호문클루스 연구나 키메라 연구, 심지어 마법 물약 연구까지.
어느 쪽으로 가더라도 대차게 활용할 수 있는 최고의 교재다.
‘대박인데….’
물론 방식은 다를 것이다.
정하얀은 어디까지나 마법적으로 접근한 경우고 나 같은 경우에는 연금술로 접근해야 하니 말이다.
그렇지만 촉매의 활용이나 유전자 조양 배합은 이쪽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 더 많다.
말하자면 방식은 같되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연구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이 모든 게 정하얀이 내린 안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건 된다.’
확실히 된다.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 헤딩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수많은 실험과 노력의 결과물이 눈앞에 있다.
온전히 연구에 집중한다고 한들,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완벽에 가까운 교과서다.
흥분하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리라.
“역시나 기쁘신가 봐요. 어머 어머.”
“아… 네. 솔직히 기분이 좋기는… 합니다.”
“아직 좋아하시긴 일러요. 이 침대의 놀라운 기능이 또 한 가지 숨겨져 있거든요.”
“또 있습니까?”
“네. 리버스라고 불리는 마법이에요.”
“아.”
“이 수많은 버프를 뒤집는 디버프가 내장되어 있어요. 대상은 물론….”
“…….”
“기영 씨를 제외한 인간이고요. 아마 침대에 가까이 가거나 누웠을 때 발동될 거예요. 물론 타인의 경우에는 촉매와 정보 값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효과가 그리 대단하지는 않지만 하급 저주도 일단은 저주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저도 앉았으면 큰일 날 뻔했지 뭐예요. 만약에 이 침대에 걸려 있는 마법을 약 10년간 연구한다고 가정한 뒤에 발전시킨다면… 어쩌면 기영 씨 이외의 여자가 침대에 눕는 순간 상급 저주에 걸려 즉사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서 저한테 침대를 들어달라고 하셨군요.”
“네. 그러니까 다른 여자를 이 침대로 끌어들이면 안 된다는 하얀 씨의 귀여운 메시지 아니겠어요? 로맨틱해라.”
하나도 로맨틱하지 않다.
아니 조금은 무섭다.
“다른 건 없는 겁니까?”
“네. 제 눈으로 찾을 수 있는 건 이 정도. 기영 씨가 본격적으로 연구를 하신다고 한다면 결과물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제가 말씀드린 것 이외에 마법적 지식은 거의 없다고 확신할 수 있어요. 이래 보여도 조금 능력 있는 마법사니까.”
“감사합니다.”
뭔가 엉뚱하고 이상한 시간이기는 했지만 성과는 나쁘지 않았다.
정하얀이 이쪽에 여러 가지 안배를 해두었다는 것보다 사실 성장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게 기쁜 부분.
물론 이 일에 대해서는 조속히 조치를 취해야 하기는 했지만 당장은 성장하는 것이 더욱더 급했다.
내 방이 진리가 숨겨져 있는 던전이나 유적지로 보일 정도.
내 몸에 걸려 있는 마법은 물론, 침대 역시 최고의 연구물품이다.
이런 최고의 상황에서 연구를 할 수 있다는 게 조금은 행복했다.
적절하지 않은 예일 수도 있지만 정하얀이 내게 준 선물은 물을 마시려는 나에게 물이 담긴 컵을 준 것과 다름이 없다.
조금 복잡하고 비좁은 모양의 물컵이기 때문에 마시기 쉽지 않겠지만 그 문제만 해결하면 마실 일만 남은 거다.
기분 좋게 싱글 벙글 웃으며 침대를 바라보니 한쪽 구석에 박혀 있는 이빨이 괜스레 사랑스러워 보였다.
‘이빨?’
잠깐이지만 머릿속에서 의문이 생겨난 것은 바로 그때.
“저, 혹시 말입니다.”
“네.”
“지금 제 위치가 하얀이에게 전송되고 있다는 건 그녀가 제 신체 부위 중에 어딘가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 맞습니까?”
“네.”
‘뭐야….’
틀림없이 저 빠진 이빨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만약 저게 아니라면 지금 정하얀이 뭘 가지고 있는지 상상하기 힘들었다.
머리카락은 그대로, 혈액을 뽑힌 기억도 없다.
아니, 그전에 정하얀이 내 몸에 상처를 낼 리가 없는 것이 당연하다.
어딘가에서 살점이 떨어진 것도 아니고 이빨이 또 떨어진 것도 아니다.
‘뭘 가지고 있는 거지?’
보통 몬스터의 경우에는 촉매로 사용되는 부위가 무척이나 다양하다.
이빨이나 머리카락 뭉치는 물론, 마력을 담고 있는 혈액이나 눈알 같은 것도 가능.
심장은 가장 효과가 좋은 편이었고 심지어는 뼈나 장기도 도움이 된다.
특정 몬스터의 경우에는 타액 그리고 수컷에 한해서는 몸에서 생성되는 액체 역시 효과가 있는 편이기는 하지만 도대체 정하얀이 뭘 가져갔는지 추측하기 힘들었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몇 가지를 떠올리기는 했지만 그다지 상상하고 싶지는 않다.
상상하기 좋은 장면은 아니었으니까.
‘설마… 아니겠지?’
내 신체에서 나오는 것들 중에 무엇을 촉매로 가지고 있을지가 궁금해졌지만 당연하게도 이쪽이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뭐가 됐든 불안하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으리라.
‘그건 아닐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