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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80화 (79/1,590)

# 80

회귀자 사용설명서 080화

세 번째 직업(6)

사실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정하얀의 범죄 행위도 아니고 뭘 가져갔는지도 아니다.

물론 이대로 내버려 두고 상태가 더 심각해질 것을 고려해 본다면 어느 정도 브레이크를 걸어줘야겠다는 생각은 했다.

그러나 멀리 떨어져 있는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아직 성장 중인 그녀가 보여준 결과물이 이 정도.

만약 김현성의 그림대로 정하얀이 대륙을 떨칠 정도의 대마법사가 된다면 아마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 튀어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저 엿보기 구멍은 벽 전체로 확대될 것이고 이 침대는 타인에게 강력한 저주를 발휘하게 되는 아티팩트가 될지도 모른다.

그뿐만이 아니다.

아직 실용화되지 않고 있는 도청 마법이나 영상 녹화 마법 같은 것을 개발할지도 모른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떠오르기는 한다.

‘정신계열?’

내 정신을 조금씩 조종하는 마인드 컨트롤이라든지, 어쩌면 저런 촉매를 이용해 나에게만 해당되는 강력한 매혹 주문을 만들 수도 있다.

심지어 투명인간이 돼서 나에게 항상 붙어 있는 것도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물론 어느 방향으로든 나에게 해를 끼치기 싫어하기도 했고 아직까지는 순수한 옹호자라는 타이틀을 유지하고 있는 정하얀이 그런 짓을 저지를 확률은 적었지만 박혜영의 사지를 절단 내는 장면을 떠올리니 설득력이 생긴다.

잘못하면….

‘엿 될 수도 있어.’

함부로 몸을 굴리는 순간 그 시점에서는 이미 아웃.

정하얀이 주변에 있을 때만이 아니라 없을 때도 조심해야 한다.

황정연이 능력 있는 마법사라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가 눈치채지 못한 장치가 작동하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보험을 마련해야 하기는 하겠지만 일단은 조신하게 지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다.

지금은 한 가지 일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였으니까.

“대단하네요.”

“네?”

“2층 전체를 공방으로 활용하실 줄은 생각하지 못했어요.”

“아아아아.”

내가 봐도 조금 멋져 보이는 공간이다.

같은 마법사인 황정연에게도 이 공간은 마치 꿈의 공간처럼 느껴질 것이다.

길드원이 나간 틈을 타 내 방과 연금공방을 연결하니 작업 공간이 무척이나 넓어진 것.

층 하나를 실험실로 사용하는 이쪽의 배포에 놀라기보단 눈에 들어온 것들은 최고를 자랑하는 장비일 것이다.

‘검은백조한테도 많이 뜯어냈으니까.’

숙련된 모험가인 그녀가 봐도 박수를 보낼 만한 도구가 즐비해 있으니 저런 얼굴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제 공방과 방을 연결한 게 전부입니다. 아무래도 왔다 갔다 하기 조금 불편해서… 연구해야 할 최고의 교재가 이미 이곳에 있는데 시간을 들일 필요는 없으니까요.”

“아뇨. 주변에 깔린 물건들이 전부 대단해 보여서요.”

“다 선물 받은 것들이라… 그건 그렇고 2번 대는 할 일이 없는 겁니까?”

“지금은 휴식기예요. 혹시 제가 방해되나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것저것 도와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뭐, 할 일이 없기도 하고… 아무래도 저도 마법사인 만큼 호기심이 없는 건 아니니까요. 물론 하얀 씨의 마법이나 기영 씨의 연구 결과로 논문을 쓴다거나 추가적인 이득을 얻는다든가 할 생각은 없어요.”

“네. 알고 있습니다.”

슬쩍 마음의 눈으로 그녀를 들여다보니 여러 가지 정보가 눈에 들어왔다.

이미 한 번 봤지만 정확히 기억해 두고 싶다.

[플레이어 황정연의 상태창과 재능수치를 확인합니다.]

[이름-황정연]

[칭호-일일드라마 애청자]

[나이-34]

[성향-호들갑떠는 낙천주의자]

[직업-마도학자-영웅 등급]

[직업효과-기초 마법 지식 습득]

[직업효과-기초 마도 지식 습득]

[직업효과-중급 마법 지식 습득]

[직업효과-중급 마도 지식 습득]

[능력치]

[근력-30/성장한계치 희귀 이상]

[민첩-40/성장한계치 희귀 이상]

[체력-32/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지력-90/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내구-32/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행운-54/성장한계치 희귀 이상]

[마력-80/성장한계치 영웅 이하]

[특성-민감한 몸-희귀 등급]

[특성-초기억력-희귀 등급]

[총평-마력의 성장이 거의 멈춰 있습니다. 상위 마법사로 가는 길은 거의 닫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높은 지력 능력치로 자신의 단점을 감추고 있는 걸로 보입니다. 특성과 직업과의 궁합이 좋아 상위 레벨에 오를 수 있게 된 케이스라고 보는 게 맞겠군요. 만약 마력 재능이 영웅 이하가 아니라 영웅 이상이었다면 상황이 조금 달라졌을 겁니다. 플레이어 이기영과 비슷한 타입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동지라고 생각하진 말아주세요. 조금 아쉬운 걸로 끝나는 저분의 비해 플레이어 이기영은 마력에 대한 재능이 전무하니까요.]

‘나쁜 새끼.’

총평은 확실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녀의 능력치나 성장 정도는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물론 나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조금 그렇기는 했지만 그녀는 마력보다는 지력에 의지하는 마법사다.

마력 능력치 성장이 더디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머리를 굴렸을 것이 당연하다.

정하얀이 걸어준 마법뿐만 아니라 그녀의 존재 자체도 나에게는 큰 교재였다.

‘특성도 괜찮아.’

민감한 몸이라는 특성이 눈에 들어왔지만 성적인 의미가 아니다. 마력이나 주변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 특성.

사실 그것보다 눈에 들어온 것은 초기억력이라는 특성이었다.

[특성-초기억력-희귀 등급]

[완벽에 가까운 초기억력을 부여합니다.]

아직까지 희귀 등급이기 때문에 완벽하지 않겠지만 만약 등급이 진화한다고 가정한다면 저 능력은 내 마음에 눈보다 효율 좋은 능력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 테면 완전 기억 능력이라든가.’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다시 한번 슬쩍 고개를 돌렸을 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번 읽어봐도 되나요?”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정리해 놓으신 서책이요.”

“물론입니다. 안 그래도 자문을 구하고 싶었으니까요.”

“아뇨, 아뇨. 사실 자문이라고 할 것도 없어요. 말씀드린다고 해봤자 개인적인 견해에 불과하고 사실 이쪽은 기영 씨가 전문가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워낙 생소한 지식이다 보니… 저한테도 어렵게 느껴지네요.”

“고위 마법사의 지력으로도 말입니까?”

“네.”

“흠….”

“아. 그러고 보니 기영 씨는 지력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시고 계시겠군요. 스탯을 연구할 시간이 없으실 테니까요.”

“네. 사실 그렇기는 합니다.”

“흐음… 기영 씨는 혹시 지력 능력치에 대해서 의문을 느낀 적은 없나요?”

당연히 있다.

“물론 있습니다. 근력이나 체력, 마력같이 측정할 수 있는 수치와는 다르게 행운 능력치나 지력 능력치는 측정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으니까요. 사실 저도 지력 스탯이 오르기는 하지만 정확히 뭐가 변화하고 있는지는 체감하기 어렵습니다. 일단 연금 지식에 대한 이해력이 올라가고 있다는 건 확신할 수 있습니다만….”

“벌써 많이 알고 계시네요.”

“솔직히 그것 외에 다른 부분에서 뭔가가 달라졌다고 체감하기는 힘들기는 합니다.”

“저도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기영 씨 생각이 맞을 거예요. 지력이 올라간다고 해서 천재가 되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개인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사고력에 커다란 변화가 없다는 거죠. 없는 지식이 갑자기 생겨나는 건 아니니까요.”

“존재하는 이유가 불분명한 스탯이군요. 80대나 70대에 이른 지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까?”

“네. 조금 극단적으로 말씀드리면 지력이 90대에 다다른 사람이 구구단을 외우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건 너무 극단적이군요.”

“네. 정말로 극단적인 이야기죠. 그렇지만 그만큼 지력이라는 스탯이 개인이 가지고 있는 지능과 크게 상관이 없다는 거예요.”

“직업을 가지고 있는 마력이나 연금술에 대한 이해력의 상승이 전부라는 겁니까?”

만약에 정말로 그렇다고 한다면 계륵 같은 능력치라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아예 쓸모가 없진 않겠지만 다른 능력치와 비교하면 한숨이 나올 정도의 효율이라는 거다.

“물론 그것뿐만은 아니에요.”

“흐음.”

“인간 개인이 가지고 있는 지능 전체에 관여하고 있지는 않지만 어느 한쪽에 도움을 주는 건 확실해요. 특히 80을 넘어가는 순간 조금 더 확실하게 느껴지죠.”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느낌이 오기 시작했다.

“지력이 90을 넘어가는 이들은 대부분 한쪽으로 뇌가 발달되는 편이예요. 제 주변의 마법사나 린델 내에 지력 90 이상이 되는 능력자들은 대부분 비상하다고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어요. 계산력에 치우쳐져 있는 사람도 있었고 사고력 자체가 말도 안 되게 발달한 사람도 있었죠.”

“하.”

“창의력, 혹은 병법에 대한 이해력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저 같은 경우에는 암기력이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갔어요.”

“그렇군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기억력이 좋다는 소리는 많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지력 능력치가 90이 된 순간 제가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좋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물론 다른 부분에서는 크게 변화가 없었지만요. 우리끼리의 단순한 추측에 불과하지만 아마 뇌가 발달되어 있는 부분의 효율을 극대화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보고 있어요.”

“그거… 정말로 흥미로운 이야기군요.”

“네. 그렇죠?”

“제가 가지고 있는 특성 중, 초기억력이라는 특성은 능력치가 지력이 90을 넘은 이후에 얻은 특성이에요. 다른 분들도 다들 비슷한 상황이시고요. 제가 보기에는 기영 씨도 뭔가를 얻으실 수도 있겠네요. 연애에 뛰어나시니 연애 쪽으로 발달하시려나… 후후후.”

“그건 사양하겠습니다.”

아예 희망이 없는 편에 서 있는 나에게는 무척이나 반가운 소리였다.

지력 능력치에 뭔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뇌가 한쪽으로 발달하는 종류의 기능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만약 정말로 그녀의 말이 맞다면 90이란 지력이 가능한 나 역시 뭔가 한쪽으로 발달된 뇌를 갖게 된다는 말이 된다.

‘뭘까.’

개인에 따른 특성 차이는 있겠지만 어렸을 적부터 기억력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은 황정연이 얻은 특성은 초기억력.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가 무슨 소리를 들어왔는지 떠올려보자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잔머리 하나는 기가 막힌 놈이라니까.’

‘허, 꼬마가 영악하기도 하지.’

정도가 전부.

잔머리 같은 쪽으로도 발전 방향이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만약에 90을 넘은 뒤에 얻는 것이 이런 쪽이라면 조금은 씁쓸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미래를 생각하면 여러 가지 가능성을 시험해 보는 것이 맞으리라.

아니, 어쩌면 그게 나을 수도 있다.

황정연이 농담으로 던진 말처럼 연애 쪽으로 발달된 능력을 얻게 된다면 그거야말로 정말 최악의 상황이다.

‘그딴 걸 어디다가 써먹겠어.’

“특성이란 건 지력 90의 능력자 모두가 받는 겁니까?”

“그렇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본인이 가지고 있는 특성 외에 하나 더 얻는 것이나 다름없죠. 굳이 시스템 상으로 표현이 되어 있지 않을 뿐이지만요.”

“여러 가지 말씀 감사드립니다.”

“아뇨. 아뇨. 어차피 알게 되실 사실인데요. 먼저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을 테고요. 다만 높은 지능을 가지고 있는 이들도 생소한 지식에 대한 이해력은 부족할 수도 있다는 걸 말씀드린 거랍니다. 후후. 그보다 확실히 진전이 있는 게 느껴지는데요?”

“아직은 걸음마 수준입니다. 이 마법 자체를 이해하는 게 목적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매달리고 있으니까요.”

“시작이 반인 법이죠. 혹시나 제가 도와드릴 게 있으면 꼭 말씀해 주세요.”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거절할 명분도, 이유도 없다.

그렇지만 이유 없는 호의는 없다는 걸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답례라고 하기에는 뭣 하지만 혹시 저도 도와드릴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 도움을 바라고 하는 일은 아닌데….”

“사양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그렇다면….”

“네.”

꽤나 덥석 문다.

‘당연하겠지.’

같은 길드라고는 하지만 단순한 호의에서 비롯된 행동이라고 하기에는 그녀는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하고 도와줬다.

우연히 만난 것처럼 가장하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어느 정도 목적이 있었다는 이야기.

이쪽이 감당할 수 없는 부탁을 할 것 같은 느낌에 괜스레 테이블을 두드렸을 때 황정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네. 말씀하셔도 됩니다.”

“혹시 일이 끝난 이후에 박덕구라는 분 좀 소개시켜 주실 수 있을까요?”

감당할 수 없는 부탁처럼 들린 것은 분명 착각이 아니리라.

‘정말로 연애 박사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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