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81화 (80/1,590)

# 81

회귀자 사용설명서 081화

세 번째 직업(7)

“…….”

“그냥 한 번만 자리를 만들어 주셨으면 좋, 좋겠어요. 사실 정말 이런 걸 바란 건 아닌데. 굳이 말씀해 보라고 하셔서….”

정말로 바라는 것처럼 보이는 건 분명 착각이 아니리라.

솔직한 심정으로는 두 사람의 연애사에 별로 관여하기 싫기는 했지만 말 한마디 하는 것으로 이 정도의 조수를 얻는다는 것은 무척 아름다운 이야기.

그렇지만 이유를 듣고 싶은 것이 당연. 박덕구가 걱정되는 것이 아닌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언제부터….”

“딱, 딱히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그저… 박덕구 님의 모습이 기억 속에서 떠나질 않아서요….”

가지고 있는 특성 때문은 아닐까.

“식당에서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무심한 듯 저를 쳐다보는 눈이… 이상하게… 뇌리에 박혀서….”

‘옴므파탈이야 뭐야.’

녀석이 가지고 있는 뜻밖의 성질에는 조금 당황스러울 지경. 아니, 이 여자는 애초에 덩치가 크고 푸근한 사람이 취향이라고 했으니 박덕구에게 꽂히는 것도 이해가 가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빛 한방에 무너졌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황정연은 미인인 편에 속한다. 뭔가 묘하게 차분한 분위기 같은 모습은 얌전한 현모양처 같은 느낌을 가지게 만든다.

한쪽으로 묶어 어깨로 넘긴 머리도 그렇고 엷은 미소가 어울리는 외모도 그렇다. 소중한 덕구를 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종 자체가 다르다고 느껴질 정도다.

90의 지력 능력치를 가지고 있는 여자를 함락시키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10초 남짓.

정하얀을 이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며칠을 허비했던 나와는 사뭇 다른 결과물이었다.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승낙하는 것이 당연한 선택이다.

“자리를 만들어 드리는 것 정도라면.”

“아… 추가로 정말로 좋은 사람이라든지… 아니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든지… 잘 맞을 것 같다… 이런 식으로 바람이라도 조금 잡아주시면….”

“…….”

“열심히 도와드릴게요. 하시는 연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네. 그 옵션도 넣기로 하지요. 대신 여러 가지로 할 일이 많으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몇 마디 하는 것 정도로 무척이나 유능한 조수를 얻었다.

둘이 연인이 되는지 아닌지에 대한 여부는 별로 이쪽과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어쩌면 확률이 조금 높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내가 저 여자에 대해서 어느 정도 좋은 평가를 쏟아 낸다면 나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덕구 녀석에게 점수를 먹고 들어가는 셈.

그렇게 생각하니 이 기묘한 거래가 합리적으로 느껴졌다.

어찌됐든 이쪽에 나쁜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어 더욱더 좋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럼 시작해 보죠, 박사님.”

“그렇게 합시다, 조수”

그렇게 나는 뜻밖의 조력자와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뒤로 시간이 아주 조금 흘렀다.

“조금 알아낸 건 있어요?”

“아직이요. 그렇지만 보이는 게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이쪽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정하얀의 연구 결과물을 재정립하는데 있다.

무언가 새로운 이론을 만들거나 혁명적인 뭔가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능력치의 상승 그리고 전직.

능력치 상승 같은 경우에는 연구 초반에는 쉽게 올라가기는 했지만 후반에 다다를수록 그 속도가 무척이나 더뎌졌다.

이전처럼 촉매를 쏟아 붙는 방식의 능력치 상승의 효율이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의미로 말씀하시는 건가요?”

“딱히 특정 지식을 콕 집어서 파고들었다기보다는 예전에 황정연 씨가 봤던 것 정도가 전부입니다. 저번에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주력하고 있는 것은 연금술로도 촉매에 들어 있는 마법을 압축하고 유지할 수 있는가. 그리고 유전 정보값을 활용하는 방안이 있는가. 이 정도니까요.”

“아아아아.”

“주문의 구성이나 설계가 보이기 시작했다는 게 맞는 표현이겠네요. 이쪽에 그렇게 쓸모 있는 정보는 아니지만요. 어째서 정연 씨가 하얀이를 천재라고 했는지도 이해가 갑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었을 때에는 말 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어째서 정하얀이 천재라고 불리는 건지, 나에게 걸려 있는 마법이 어째서 논문으로 쓸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건지, 촉매에 저장되어 있는 마법이 어째서 일대 학파를 만들 수 있을 정도의 가능성이 있는 건지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독특해.’

마력을 배열하는 방식, 마력의 탑을 쌓는 순서와 그 방식이 무척이나 세련됐다.

기억력을 발달시키고 있는 황정연의 지력과는 달리 정하얀의 지력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마법을 다루는 쪽으로 발달되어 있고 지금도 발달되고 있을 것이다.

단순히 완성된 마법을 자세히 보는 것만으로도 그걸 느낄 수 있다.

‘천재.’

어째서 김현성이 정하얀에게 집착했는지 그 이유를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당연하지만 연구는 계속됐다.

막히는 게 있으면 잠을 자지 않는 날이 잦아졌고 밥을 거르는 일도 많아졌다.

물론 이쪽의 실험을 돕는 황정연 역시 마찬가지. 사실상 그녀가 하는 일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내가 어려워하는 마법적인 방식에 대해 해설해 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 존재 이유가 충분했다.

[지력이 1 올라갑니다.]

[지력이 1 올라갑니다.]

아주 조금씩이지만 그래도 천천히 올라가고 있는 알람이 기분 좋게 들려온다.

지력 수치가 막 50대를 돌파했을 시점에는 지력이 올라가는 메커니즘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새로운 지식의 습득이나 이해.

두 번째는 심도 깊은 사고였다.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실험하며 이론을 재정립하고 책을 읽는다.

그 모든 과정이 지력을 올리는 것에 도움이 된다.

박덕구가 근력을 올리기 위해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는 것처럼, 나 역시 뇌를 살찌우기 위해 마구잡이로 양식을 집어넣은 것이다.

“오랜만에 방 청소 좀 할게요, 기영 씨.”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제 근처는 치우지 말아주세요. 아직 정리하지 않은 자료들이 있어서요.”

“물론이죠. 그보다 잠 좀 주무시는 게 어때요?”

“아뇨. 흐름이 끊기니까요.”

당연하지만 방도 무척이나 더러워졌다.

내가 정리한 자료들과 이론서가 계속해서 쌓이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움직일 공간이 조금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침대를 중심으로 모든 자료들이 나열해 있는 것은 제법 재미있는 장면이기는 했지만 공부하는 게 재미있지는 않았다.

‘지겨워.’

확실히 지겹다.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고는 있지만 도무지 열릴 것 같지 않은 느낌은 스트레스가 쌓일 정도.

그렇지만 이를 악물고 할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김현성과 함께 사냥을 나가고 있는 파티원들은 발전하고 있을 테니까.

도태되면 버려진다.

김현성이 나를 버린다는 의미가 아니다. 파티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게 되면 같이 다닐 수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단순한 포션 공장으로 전락하기 싫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억지로라도 침대에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저기요, 기영 씨. 마법을 어떻게 연성진으로 풀어나가시는 거예요?”

“아. 사람마다 주문을 외우는 방식이 다릅니다만 최소한 저는 탑을 만드는 방식으로 주문을 외우곤 합니다. 하얀이 같은 경우에는 정밀하게 돌아가는 시계를 만드는 것 같은 방식으로 설계하는 것 같은데… 부품들을 전부 빼내서 한 곳에 비치하는 느낌이라고 하면….”

“무슨 말씀인지 알겠네요.”

“제 마법을 푸는 것보다 사실 더 복잡합니다. 다른 건 몰라고 유전 정보값을 일치시키는 부분이 가장 어려운 부분인 것 같습니다.”

“주문을 해석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힘에 부치는데… 연성진으로 변환해야 한다는 것도 스트레스 받으시겠네요.”

“네. 그렇지만 단순한 작업이니만큼… 시간만 쓰면 되는 거니까요.”

이제 원을 그린 정도기는 했지만 확실히 차도가 있기는 있다.

성과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이 조급해 지는 것이 사실.

그렇게 한 달이 어영부영 지나갔지만 다행히 김현성 파티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고통 받고 있겠지.’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가져간 소모품도 쓸모없거나 부족했을 테고 떠날 때 분위기 자체가 엉망이었다.

정하얀은 매일 밤을 눈물로 지새울 것이고 김현성의 명령이 없는 김예리는 엉뚱한 화살을 날리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박덕구는 예전에 겁쟁이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선희영은 그나마 정상적으로 움직이겠지만 주도적으로 파티를 이끌어나가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만큼 전체적으로 파티가 길을 잃은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나만 힘든 시간을 보내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흘렀다.

아주 조금이었다. 이 즈음에 정하얀의 마법에 대해 대부분 이해할 수 있었고 지력 능력치가 60에 가까워졌다.

개인적으로는 무척 만족할 수밖에 없는 성과였다.

“성과가 있기는 있네요.”

“네. 실제로도 지력 능력치는 올랐으니까요. 사실상 목표로 했던 수치에는 거의 도달했습니다.”

“아. 축하드려요. 오늘은 조금 쉬시는 게 어때요?”

“아뇨. 최소한 마무리는 하고 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만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만큼 쉴 수 있을 리가 없는 게 당연하다.

밤낮을 구분하지 않고 생활하게 됐을 때는 조금 더 근본적인 질문을 나 자신에게 할 수 있었다.

마법 안에 숨겨진 진리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다.

내가 목표로 했던 전직에 대한 질문이었다.

정하얀은 어떻게 경험치를 쌓지 않고 다음 단계를 밟을 수 있었지?

이미 정답을 알고 있다.

‘이해한 거야.’

정하얀은 사냥을 한 번도 거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직업을 얻었다.

어떻게 얻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 정하얀에게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그녀가 마법이라는 것에 대해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이 학문을 이해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작은 진리에 도달한 셈.

나 역시 같다.

‘이해해야 돼.’

분석하고 서술하고 자료를 정리하는 것 이외에도 지금 내가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는 것을 전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길이 맞고 이 방향이 맞다.

이후에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던 걸로 기억.

‘어째서?’ 보다는 ‘왜?’에 조금 더 집착하기 시작했다.

보이는 결과보다는 보이지 않는 진리에 손을 뻗었다.

상상하고 실험에 옮기고 실패한 이유를 찾으려고 했다. 실험은 어렵지 않았다. 무척이나 유능한 조수가 곁에 있었으니까.

“살이 조금 빠졌네요.”

“그래도 나쁘지는 않은 기분입니다.”

한 꺼풀 벗었다느니 진리에 도달했다느니 그런 거창한 것은 없다.

집착하고 있는 것은 그저 왜.

거창한 정답을 원한 것도 아니다.

아주 작은 조각 하나면 족했다.

유전 형질의 변화, 정보값, 마력이라는 것은 개체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마력으로 변질된 개체는 완전한가 불완전한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실타래 같이 꼬인 DNA, 어떤 몬스터에게는 어떤 바이러스가 치명적인지, 어째서 이 유전자는 이 바이러스를 받아들이지 못하는지에 대한 실험을 멈추지 않았다.

연성진, 마력, 유전, 정보, 작은 조각들 중에 그 어떤 것도 제대로 이해되는 것은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발전하고 있다는 것.

“이번에는 어떤?”

“공포의 정원에서 가져온 촉매들로 부탁드립니다.”

뭔가 대단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나는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고 머리가 똑똑한 편도 아니었으니까.

사실 나는 과학자도 아니고 유전자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도 못한다.

그렇지만 이때 즈음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즐겁다고 느껴졌다.

“즐거우신가 봐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지력이 1 올라갑니다.]

“재미있으시잖아요? 저도 그랬어요.”

“아뇨. 솔직히 말하면 지겹습니다.”

[지력이 1 올라갑니다.]

“거짓말.”

[지력이 1 올라갑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을 것 같았던 작은 조각을 손으로 움켜쥐었을 때.

나는, 아주 조금 더 발전할 수 있었다.

[새로운 직업을 발견합니다.]

나름대로 만족할 수 있는 결과물을 가지고 말이다.

“푸핫.”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