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회귀자 사용설명서 084화
세 번째 직업(10)
어째서 박덕구가 거짓말을 했는지는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원정 중에 하나둘씩 새로운 직업을 얻어가는 과정에서 김현성이나 선희영에게 상담 아닌 상담을 했을 것이고 모두가 영웅 등급의 직업을 얻었다고 말했을 가능성이 크다.
원정 중에 얼마나 형편없는 모습을 보여줬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나름대로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 분명.
특히나 천재로 분류할 수 있는 김예리의 존재는 박덕구에게 꽤나 충격적으로 다가왔을 거라고 생각했다.
‘잠재 능력 전설 이상.’
그건 단순히 능력치에서만 국한되지 않는다.
혹시라도 마음의 눈의 등급이 상승하면 더 자세히 알 수 있겠지만 굳이 보지 않아도 김예리가 가지고 있는 포텐이 엄청나다는 것 정도는 깨달을 수 있다.
공포의 정원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던 것을 생각해 보면 아마 이번 던전에서도 내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한 것이 당연. 아마 박덕구는 바로 옆에서 천재들을 봐왔으리라.
천재라는 것은 원래 인종이 다른 종류의 인간이다.
수십 년 동안 노력한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버리는 종류의 인간들.
긴 세월을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천재라고 불리는 종류의 인간들을 많이 봐왔다.
‘지구에서뿐만이 아니라….’
여기에서도 마찬가지.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당장 주변에 깔려 있다.
아무렇지도 않게 고위 마법을 쏟아내고 내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마법을 구사하는 정하얀.
아직까지 도드라진 모습은 보여주지 못했지만 신성 능력치 전설 이상의 잠재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 특유의 침착함으로 파티의 중심을 잡아주는 선희영.
김현성이 빈민촌에서 직접 가서 데리고 온 김예리와 천재라는 수식어마저도 부족한 것처럼 느껴지는 회귀자까지.
‘…….’
사실 말도 안 되는 라인업이라고 볼 수 있다.
파티원 한 명, 한 명의 구성원의 수준이 감히 천재라고 말할 수 있는 잠재 능력을 갖춘 파티가 바로 김현성 파티다.
물론 박덕구도 충분히 상위로 올라갈 수 있는 종류의 인간이라고 분류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원정 중에 느끼는 것이 많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괴물.’
실제로 황정연도 정하얀을 보고 자괴감을 느낀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녀석의 이런 선택은 꽤나 의외였다.
박덕구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뭔가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자신도 모르게 허겁지겁 거짓말을 했다고 예상하는 게 맞겠지만 거짓말보다는 놈의 멘탈이 조금 더 걱정됐다.
내가 고유 영웅 등급의 직업을 얻고 난 이후에 조금 측은해 보였던 것은 그런 연유이었으리라.
파티에서 자신만 뒤처지고 있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얻은 직업은 대마법사예요.”
“그래?”
“네. 마력도 많이 올려주고 모든 종류의 속성에 대한 친화력을 올려줘요. 원소 마법뿐만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마법도 전부 다요. 헤헤. 마법도 더 효율적으로 쓸 수 있고 고급 마법 지식도 들어왔어요. 아직은 그렇게 대단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잘됐네.”
“아, 또 마력 능력치는 69가 됐어요! 오빠.”
“대단하네, 우리 하얀이. 생각보다 많이 올랐는데.”
“지력도 62예요.”
“대단하네.”
“현성 씨가 그러는데 능력치가 70까지는 잘 오른다고 하더라고요. 희영 언니가 사냥을 많이 나가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능력치가 높았던 것처럼요.”
‘그건 아마 너희들 같은 사람들한테만 해당되는 이야기일 거다.’
실제로 나와 박덕구의 주요 능력치는 60대 초반에 안착해 있다.
자신이 얼마나 성장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내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오랫동안 고생한 자신에게 보상을 달라는 의미인 것 같아 조금 민망하기는 했지만, 확실히 고개를 끄덕일 만한 일이다.
그녀가 강해질수록 나는 더 안전해진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물론 그 반대의 상황이 올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성장 방향이 나쁘지 않다. 습관처럼 정하얀을 바라보니 직업에 대한 정보가 쏟아졌다.
[대마법사-영웅 등급]
[마력의 진리를 탐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을 갖춘 자들이 부여받는 직업입니다. 마력이 5 상승하고 모든 종류의 마력에 대한 친화력이 올라갑니다. 이후에 전직할 수 있는 직업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좋아.’
어떤 방향의 성장을 노리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뭔가 담백한 이름의 직업이기는 하지만 정하얀과 확실히 잘 어울린다.
혈액 마도사 혹은 살육 마도사, 광기의 대마도사 따위의 이름으로 전직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리라.
이를 테면 정하얀은 정석 루트를 타고 있는 셈.
물론 그건 정하얀뿐만이 아니었다.
김현성 녀석도 마찬가지.
이후의 성장 방향은 내가 알 수 없지만 최소한 김현성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검사를 지양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고위 검술 수련자-영웅 등급]
[검술의 극의를 깨닫기 위해 수련하는 이들을 위한 직업입니다. 근력이 3, 민첩이 2, 마력이 1 상승합니다.]
다른 설명은 더 읽어볼 필요도 없다. 영웅 등급의 직업을 거쳐 가는 직업으로 선택한 것만 봐도 답이 나오는 상황.
김현성에게는 저 등급의 직업도 그저 지나쳐야 할 통과문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이 세계에서 직업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다시 언급할 필요도 없다.
만약 그저 그런 모험가였다면 절대로 녀석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며 음식을 목구멍으로 꾸역꾸역 집어 넘기는 도중.
이번에는 김현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리는 추적자라는 직업을 얻었습니다.”
“추적자 말입니까?”
“예.”
“궁수계열의 한 종류로 활뿐만이 아니라 단검이나 검 같은 중소형의 무기들도 다룰 수 있어 괜찮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리 같은 경우에는 능력치가 두루 좋은 편이니까요. 민첩과 마력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선택지가 넓어질 겁니다.”
‘영웅 이하의 능력치가 하나도 없으니까.’
“길을 헤맬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예. 그렇습니다. 저희 파티의 고질적인 문제였으니까요. 아, 그밖에도 희영 씨는 대법관이라는 직업으로 전직했고… 신성력이 눈에 띄게 올랐습니다. 덕구 씨도 마찬가지로 탱킹 능력에 관련된 전위 직업을 얻었다고 하더군요.”
김현성의 말에 슬쩍 선희영을 보자 곧바로 직업명이 시야에 비쳤다.
[암흑사제 대법관-영웅 등급]
아무래도 김현성에게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은 모양. 살짝 고개를 끄덕이니 곧바로 선희영도 고개를 끄덕여왔다.
이전 직업이었던 암흑사제의 진화판 같은 직업이니 조금 나쁘지 않아 보였지만 일반 신성 주문 말고도 공격 주문에 대해서는 아직 언급한 게 없는 것 같았다.
이렇든 저렇든 파티는 무척이나 무난히 성장하고 있는 편.
조금 민망한 표정의 박덕구를 제외하면 사실 문제는 없다.
아니, 사실 박덕구 역시 문제가 있다고는 볼 수 없다. 주변 이들이 성장이 특출할 뿐, 박덕구의 성장치도 충분히 놀랄 만한 성과다.
녀석 역시 어느 곳을 가더라도 환영받을 수 있을 정도의 스펙과 잠재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한 번은 이야기를 해봐야겠는데….’
팀원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이 건에 대해 언급할 마음은 없는 것이 당연.
내가 능력치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팀원들에게 알리기는 싫기도 했고 이런 곳에서 박덕구의 열등감을 자극하는 건 안 될 일이다.
‘천재와 자신을 비교하는 것처럼 멍청한 짓은 없어.’
조금 잔인한 말일 수도 있지만 녀석도 이 사실을 깨달았으면 싶었다.
적당히 합의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조금은 무거운 분위기에서 대화가 계속되기는 했지만 조금씩 대화의 주제는 가벼워 졌다.
던전행에서의 웃지 못할 실수들이라든가, 그동안 방에만 처박혀 있었던 나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정하얀이 매일 훌쩍거렸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고 김현성이 위기에 빠진 파티를 구해줬다는 이야기에는 예상했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감정표현을 잘 안 하는 김예리도 슬그머니 미소 지었고, 그렇게 조금씩 목소리가 올라가고 있었던 그때였다.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길드의 문이 열린 것.
주인공은 미친 늙은이 이설호와 파란 길드의 부길드 마스터 이상희.
무척이나 무거운 표정으로 길드를 들어오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지금 당장 회의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길드에 남아 있는 모든 간부들을 소집해 주세요.”
“전부 말입니까?”
“네. 예외는 없습니다. 일단은 전부 소집해 주세요. 회의는 제 개인 집무실에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파티가 얼마나 되죠?”
“2번 대가 전부라고 알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7번 대도 귀환했습니다. 이상희 님, 이설호 님.”
“그렇다면 현성 씨와 기영 씨도 올려 보내도록 해주세요.”
“꼭 그들까지….”
“아니요. 전부 소집해 주세요. 길드의 일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도대체 뭐야?’
대충 봐도 심각한 분위기라는 것이 느껴진다.
항상 우리네 어머니 같은 표정으로 자애로운 모습을 보여줬던 이상희의 얼굴은 무척이나 창백해져 있었고 미친 늙은이의 얼굴에도 근심이 서려 있다.
정확히 왜 저러는지 알 수 없지만 길드의 중역들이 저런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태의 심각성을 예상할 수 있을 정도.
“먼저 올라가 계시지요. 제가 함께 올라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럼 부탁드립니다, 설호 씨.”
“예.”
파티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일반 길드원들은 허겁지겁 길드의 위로 올라가는 중.
아마 황정연을 부르러 가는 도중이리라.
파란의 2번 대는 사층에서 거주 하고 있으니까.
“무슨 일이 생긴 거 아닙니까?”
“기영 씨, 올라가시죠.”
“아… 네.”
“예.”
나름대로 즐거웠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개판이 됐다.
이설호가 슬쩍 이쪽을 향해 눈짓하는 것이 시야에 들어온다.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일단 무슨 일인지 듣는 것이 먼저다.
“다른 분들은 저와 기영 씨가 돌아오실 때까지 개인적인 시간을 가지시면 됩니다. 아니, 혹시 모르니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게 좋을 겁니다.”
“네.”
“알, 알겠소.”
‘뭐지?’
사실 머릿속으로는 별별 생각이 다 들기는 한다.
갑작스레 짐을 챙기는 이들을 바라보면 더욱더 그렇다.
일반 길드원들의 웅성거리는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말없이 무장을 챙기는 길드원도 많아졌다.
여러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기는 하지만 자세한 상황은 저들 역시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김현성 님, 이기영 님. 부길드 마스터께서 지금 회의….”
“알고 있습니다. 지금 올라가도록 하겠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아. 저, 저도 자세히는….”
뒤늦게 이쪽에 소식을 전하는 길드의 접수원도 급히 고개를 숙인 뒤 길드 밖으로 뛰어 나간다.
황급히 이상희의 집무실로 올라가자 무장한 경비가 문을 열어주는 게 보였고 나와 김현성은 조금은 서둘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전부 모였나요?”
“네. 그런 것 같습니다.”
눈앞에 자리한 것은 이상희.
그리고 황정연과 미친 늙은이와 그 똘마니 세 명이 전부다.
그동안 얼굴만 봐왔던 행정 간부 2명도 자리해 있는 모습이었지만….
‘이게 전부? 실화야?’
한때 자유 도시 린델을 대표하는 길드의 간부들이 다 모였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숫자였다.
“기영 씨, 현성 씨. 자리에 앉아주세요. 조금은 안 좋은 소식을 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제법 진지한 표정의 간부들을 눈앞에 두니 괜스레 위축되기는 했지만 왠지 모르게 침착한 김현성은 대충은 예상했다는 표정 같아 보였다.
‘알고 있는 건가.’
계산을 마친 것은 순식간, 우리가 어째서 파란으로 왔는지에 대해 떠올리니 금방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알고 있어.’
김현성은 어째서 이런 상황이 펼쳐졌는지 알고 있다.
많은 대형 길드의 오퍼를 거절한 이후에 김현성이 굳이 파란을 선택한 이유.
부 길드 마스터인 이상희가 그 이유에 대해 입을 열려고 하는 것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