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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86화 (85/1,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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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 086화

미친 늙은이(2)

“그게 좋아 보입니다.”

“이렇게 길드를 생각하는 마음이 강하신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하.”

“…….”

“아암. 그래야지.”

‘미친놈들.’

나는 저 늙은이들이 과거에 파란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모른다.

이상희가 저들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면 최소한 과거에는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길드 마스터와 깊은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모두 과거의 이야기다.

‘미친 늙은이.’

이를 갈 지경.

우리 파티의 뜻과 저 늙은이들의 뜻이 일치하는 게 무척이나 원망스러웠다.

“벌써 세 번째 전직을 했다면 확실히 도움이 되겠군요.”

“정말로 대단합니다. 돈을 들인 보람이 있어요.”

“전부 길드의 지원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하하하하.”

황정연 역시 기가 차다는 듯이 이설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내게 보여준 모습과는 조금 다르다. 낙천주의자라는 성향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찌푸려져 있는 얼굴.

저런 표정을 보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이설호의 지금 태도는 강 건너 불구경하는 사람의 행동과 굉장히 유사했으니까.

“이제 막 들어온 이들도 원정에 끼워 달라는데 지금까지 길드를 지켜오셨다고 말하시는 분들은 조용하군요. 다른 사람을 떠밀기 전에 자신이 먼저 나설 생각은 하지 않는 건가요?”

이설호뿐만이 아니다.

몇몇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겁을 집어먹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조금은 민망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자신들도 찔리는 것이 있는지 흑색이 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큼….”

“아무래도 일선에 서기에는 힘든 몸이라.”

“방금은 아주 작은 힘이라도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길드를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이 모두 다르지 않습니까. 애초에 비전투직인 저희도 그렇지만… 이설호 님 역시 은퇴하신 지 한참이나 되었습니다. 여기 다른 간부님들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지금 와서 전선에 서기에는 좀… 방해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글쎄요. 제 눈에는 책임을 회피하는 것으로 보이네요.”

“말씀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제 말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가기 싫다고.”

“허… 보자보자 하니까 말씀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지금 누가 정말 심한지는 당신들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감정의 골이 깊어진 것이 눈에 보인다.

만일 나였다고 하더라도 황정연과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쪽이 뭘 할 수 있을 리가 만무.

저들은 틀림없이 비전투직군으로 분류되어 있다.

애초에 함께 데려간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부끄럽습니다. 당신들 정말로 부끄러운 사람들이에요.”

조금 과한 생각.

내 뇌내망상이지만 이설호를 비롯한 똘마니들은 이쪽이 죽어서 돌아오는 것을 바라고 있을 수도 있다.

내가 그렇게 생각했던 것처럼 말이다.

시나리오는 완벽하다고도 볼 수 있다.

모든 전투직군이 영웅 등급의 던전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한 뒤 그동안 키워왔던 영향력을 바탕으로 길드를 잠식, 이설호를 중심으로 새로운 체제를 유지한다.

마침 세상이 변하는 참이니 놈에게도 좋은 기회일 것이다.

가능성은 낮지만 어쩌면 파란을 통째로 팔아넘길 수도 있다.

‘돈이 될 거야.’

전투직군이 없다고는 하지만 파란이 보유하고 있는 재산이나 길드 하우스, 지금까지 쌓아올린 인프라는 결코 만만하지 않다.

애초에 김현성이 노리고 있는 것 역시 같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나쁘지는 않은 추론이다.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은 이설호를 중심으로 똘똘 뭉친 저들의 행동이었다.

‘뒤가 있나?’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보통 저런 종류의 늙은이들은 뒷배 없이는 도박을 하지 않는 편이니까.

도박은 젊은이들에게 강요하고 자신들은 안정된 삶을 살기를 바란다.

아마 저들이 지금 위치에 앉아 있는 이유 역시 수많은 이들의 희생위에 쌓아 올린 자리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도 상관은 없다.

어차피 저들이 고인 물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까.

조금 분위기가 과열되고 있었을 때 이상희가 다시 한번 입을 열어왔다.

“그만하세요. 아마 다른 분들도 많이 답답하실 겁니다. 정연 씨도 평소답지 않게 너무 흥분하신 것 같네요.”

“마스터, 그렇지만….”

“행정 간부들을 던전에 데려 갈 수는 없습니다. 이설호 님 역시 마찬가집니다. 이미 은퇴하신 몸이기도 하고 최근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고려해 본다면 함께 가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이 아닙니다. 물론 정연 씨가 어떤 마음인지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같은 심정이니까요. 솔직히 지금 여러분이 보여주는 행동이 달갑진 않습니다.”

“아….”

“그게….”

“크흠.”

“어쩔 수 없지 않…. 큼.”

“예전에는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솔직히 현성 씨나 기영 씨에게 굉장히 부끄러운 심정입니다. 제가 그렸던 파란의 모습은 이런 게 아니었습니다. 물론 여러분들의 행동은 합리적입니다. 비전투직군과 함께 던전을 떠날 수 없는 것은 맞습니다. 여러분들의 몸 상태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이설호 님을 비롯한 다른 분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정말로 실망스럽습니다. 아니, 사실은 무능력한 제 자신에게 가장 실망스럽습니다.”

제대로 입을 닥치고 있는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최소한 자기들도 함께 가겠다는 액션을 취하기만 해도 섭섭함이 절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그러기는커녕 도리어 김현성과 나를 떠미는 행동을 보였으니 이상희가 얼마나 실망이 클지 가늠할 수 없었다.

이상희는 천천히 이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뭐라고 입을 털어야 이쪽을 데려가 줄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던 찰나, 곧바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성 씨 그리고 기영 씨.”

“네.”

“예.”

“아까의 말씀을 번복해 정말로 죄송합니다. 염치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이번 원정에 합류해 주시겠습니까?”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

심지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상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고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마음이 바뀔 만하지.’

아마 한 달 전이었다면 이상희도 우리를 데려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였네.’

어찌됐든 60 이상의 능력치와 세 번째 전직이 영웅 등급의 던전에서 비빌 수는 있는 모양.

아마 그래서 그녀 역시 마음을 바꿨을 것이다.

사실 파란 길드가 지금 겪고 있는 상황은 최악이라고 볼 수 있다. 주요 전력이 없는 상태에서 던전에 들어가야 되는 상황이고 심지어 던전 안에 있는 이들의 생사조차 알 수 없다.

우리라는 지푸라기를 잡고 싶은 마음도 이해가 간다.

김현성 파티가 지금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다분히 비상식적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길드의 어머니 포지션에 있는 이상희의 진심 어린 부탁을 들었던 김현성의 대답은 뻔할 뻔자.

“물론입니다.”

너무나도 뻔한 대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감사합니다.”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곧바로 구조대를 구성해 원정을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네.”

“구성원은 저와 2번 대 파티와 칠 번대 파티가 함께 갑니다. 30분 이 후에 곧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원정 준비는 최대한 서둘러 주세요.”

“네.”

“길드에 남아계시는 여러분들은 붉은용병을 비롯한 다른 길드와 접선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연락이 닿는 즉시 던전으로 지원을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네.”

“설호 씨.”

“네. 이상희 님.”

“부디 저를 실망시키지 않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믿겠습니다.”

“믿음에 보답하겠습니다, 이상희 님. 타 길드와 연락이 되는 즉시, 함께 향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듯 바깥을 박차고 나가는 이상희의 모습이 보였다.

이쪽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이던 황정연도 황급히 집무실을 빠져나갔고, 행정팀 녀석들도 제법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 같다.

나와 김현성 역시 마찬가지.

1층으로 내려온 이후에 파티원들을 향해 곧바로 입을 열자 다른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선희영의 지휘 아래 빠르게 정리가 되고 있는 것을 보니, 이번 원정에 대한 준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원정 준비 말고도 해야 할 일이 있는 내게는 딱 알맞은 타이밍이다.

‘믿기는 개뿔.’

이상희는 좋은 사람이다.

그렇지만 이상적인 지도자라고는 볼 수 없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바보 같은 지도자다.

믿음이라는 건 물론 훌륭한 사람을 다룰 때는 좋은 수단이다.

예를 들면 덕구나 하얀이처럼.

이상희가 이설호와 똘마니들을 바라보는 심정도 아마 같을 것이다.

그렇지만 미친 늙은이 같은 종류의 사람들을 다루는 데는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이상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정체가 뭔지는 알 수 없다.

지금까지 함께 했던 이들에 대한 믿음, 길드가 위태로워져도 끝까지 함께 할 거라는 믿음.

뭐,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다.

그렇지만.

저런 종류의 믿음은 굉장히 쉽게 배신당한다. 내가 보기에 저 위에 있는 늙은이들은 빈민촌에 있는 선희영의 봉사 대상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곳에 있는 이들 보다 여기 있는 이들이 운이 조금 좋았다는 정도.

그리고 타인을 밟고 올라왔다는 것 정도.

물론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 역시 능력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정말 그것 외에는 없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믿음이란 건….’

서로가 서로에게 받을 수 있는 것들이 있을 때 유지되는 감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늙은이들은 이상희에게 받을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믿음이 유지될 리가 없다.

“30분 뒤에 출발….”

“네?”

“아무것도 아니야, 하얀아.”

“네. 오빠 또 챙길 거 없나요?”

“아, 하얀아. 그것보다는 잠깐 예리 좀 불러다 줄래?”

“네?”

“잠깐 심부름시킬 게 있는데… 시간이 얼마 없어서.”

“네.”

정하얀이 허겁지겁 뛰어간 뒤에 조금 미심쩍은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김예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빠르네.’

“잠깐 심부름 좀 해줄 수 있을까?”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현성 씨에게도 좋은 일이 될 거야.”

“응.”

“검은백조에 있는 이지혜라는 사람한테 편지 좀 전해줄 수 있겠어?”

“이지혜?”

“응, 이지혜. 기왕이면 다른 사람들한테 들키지 않게… 물론 중간에 읽는 것도 금지.”

“응….”

“내가 보냈다고 하면 환영해 줄 거야. 빠르게 다녀와야 한다.”

“응.”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괜스레 생각이 많아지기는 한다.

내가 하는 일이 옳은 일인지 판단하기는 사실 어렵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는 정답일 거라고 생각한다.

‘왜?’

믿음이 사라진 관계는 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청소하기 딱 좋은 날씨네.”

썩은 피를 뽑아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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