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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89화 (88/1,590)

# 89

회귀자 사용설명서 089화

우린 영원히 함께예요(3)

사실 정하얀뿐만이 아니다.

나는 그나마 낫다고 할 수 있었지만 불안 증세를 보이고 있는 이들이 대충 봐도 눈에 보인다.

예를 들면 김예리가 그렇다.

김현성에게 매미처럼 달라붙어 있는 모습은 항상 담담한 표정을 보내왔던 꼬마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아직 어리다 보니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게 이해가 간다.

뭘 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러 정황상 그녀가 본 것은 끔찍한 트라우마였을 것이다.

정하얀 역시 마찬가지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정하얀이 본 그림은 나에게 버림받는 상황일 터.

이 저주가 사람의 약한 부분을 파고든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튼 간에 조금씩 정신을 차리고 있는 이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미 대부분이 저주의 영향에서 벗어난 상황. 그렇지만 누구하나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나를 꽉 껴안고 있는 정하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시간을 보내자 이윽고 정돈된 장내에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상희였다.

“피, 피해 상황 보고해 주세요.”

“전무합니다. 저주의 종류는 정신계의 일종으로 보이며 그 외에 다른 효과는 없는 걸로 생각됩니다. 환청과 환각을 보이게 하는 것 같습니다.”

“움직일 수 없는 분이 있나요?”

“외상을 입은 사람은 없습니다.”

육체적인 대미지는 없다. 그렇지만 대미지가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정신적으로는 많이 피폐해지고 있는 상황을 겪었을 테니까.

어째서 파란의 파티가 이곳에서 전멸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이 던전이 저주받은 신단이라는 그 이름처럼 이런 저주가 중첩되거나 심각해진다고 가정한다면….

‘심각해질 거야.’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상희가 머리를 매만지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혹시 환청이 들리는 분이 있습니까?”

모두들 대답이 없다.

아마 조금씩 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녀의 질문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들리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아마 다른 분도 마찬가지 일거라고 생각합니다.”

“신성 정화 주문으로도 해주되지 않는 것 같군요. 아마도 던전 자체에 내장되어 있는 저주일 것 같습니다. 일정 구역에 진입할 때나 일정 시간이 지날 때마다 저주가 한 번씩 내리는 던전일 가능성이 큽니다.”

‘괜찮은 추론이야.’

그녀 역시 나와 생각이 같다.

슬쩍 김현성을 바라보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인다. 완벽한 정답은 아닐지언정 어느 정도 답을 찾은 것이다.

“혹은 지금과 같은 증상이 조금씩 심해질 수도 있겠군요. 만약에 언데드들이 함께 있는 상황에서 이런 종류의 저주가 쏟아진다면….”

큰 피해를 입을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

그렇지만 정말로 위험한 것은 지금 내리고 있는 저주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

언데드나 망령 따위는 어떻게 생각해도 에피타이저.

던전의 이름이 말해주는 것처럼 이 저주받은 신단의 공략법은 저주의 해주에 있다.

-결국 넌 혼자 남게 될 거야.

‘입 닫아.’

단언컨대 이 저주를 해주하지 못하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이상희나 2번 대 경우에는 지금 들리는 목소리에 저항할 수 있겠지만 김현성을 제외한 우리 7번 대는 상황이 다르다.

내 입으로 말하기에는 뭣 하지만 확실히 김현성 파티의 성장은 빠르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당장 나조차도 수많은 자원과 라무스 터커의 연금학개론으로 인해 파티의 성장을 따라가고 있는 상황.

본래 전설 이상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두말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스펙이 높다고 해서 파티가 강한 것은 아니다.

우리 파티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이들이 많다. 이를 테면 육체의 성장을 정신의 성장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노린 건가.’

내가 생각한 것을 고려한 김현성이 일부로 우리를 이 던전 안으로 데려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가능성은 희박하다.

놈은 최소한 남의 목숨을 저울질 하지는 않는다. 만약 일반적인 던전이었다면 고개를 끄덕였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심각해.’

말 그대로다.

우리 파티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비슷한 상황이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원정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세 가지.

첫 번째는 귀환하는 것이다.

던전 자체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아무리 생존자 구출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위험요소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만약 원정대장이 조금 신중한 성격이었다면 틀림없이 첫 번째 선택지를 골랐을 것이다.

두 번째는 계속해서 진입하는 것.

사실상 추천하고 싶지는 않지만 생존자의 상태를 모르는 지금, 한시가 급한 것을 고려하면 이런 선택지도 나쁘지는 않다.

마지막 세 번째는….

“일단은 이곳에 캠프를 차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근접직군 여러분들은 조를 짜서 주변 수색과 함께 공략에 힌트가 될 만할 정보를 찾아주세요. 나머지 인원은 이곳에 캠프를 만들겠습니다. 식사를 준비해 주세요. 지금은 휴식을 취해야 될 것 같습니다. 일단은 2번 대 여러분을 중심으로….”

“저도 함께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몸은 괜찮으신 건가요?”

“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주의 크게 영향을 받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목소리가 들리긴 하지만…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니군요.”

“아. 그렇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현성 씨.”

내가 생각해도 지금은 이게 가장 베스트다.

저주를 받았다는 것 이전에 원정대가 전체적으로 지쳐 있다.

반나절이 넘게 행군했고 신단에 들어온 뒤로도 약 6시간 정도가 지났다.

아마 이런 상태로 무리하게 수색 작업에 진행하면 어느 순간 한계를 맞이할 것이다.

특히나 사제나 마법사 직군들은 이미 육체적으로도 한계에 가까운 만큼 몸을 쉬는 시간은 꼭 필요하다.

“이곳에서 수면을 취한 뒤에 내일 아침 곧바로 작업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정확히 3일을 머물고 차도가 없다고 판단되면 던전에서 벗어나겠습니다. 그리고.”

“예.”

“만약에 지금 걸려 있는 저주가 해주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따로 방도를 찾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까?”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보통 저주라는 건 반 영구적이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예. 일단은 몸을 회복하는 데 전념해 주세요. 대응책은 수색대가 돌아온 이후에 찾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이상희가 말을 마치자 김현성과 김예리를 포함한 민첩 수치가 높은 몇몇이 차출되어 밖으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움직임이 느린 전위들은 캠프를 만드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는 상황.

굳이 자신도 나가겠다고 하는 것을 보니 김현성 나름대로 이 신단을 제어할 수 있는 묘안이 있는 모양.

‘어쩌면 다른 힌트를 주워올지도 모르고.’

바깥사람이 밖으로 나간다면 안사람으로서 해야 할 임무는 뻔하다.

우리 자식들의 멘탈을 제어해 주는 게 할당된 임무일 터.

굳이 나에게 다른 이들을 부탁하지는 않았지만 나를 믿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금방 안정을 찾은 성희영과는 반대로 아직까지 멍한 표정을 하고 있는 덕구 녀석이 첫 번째 카운셀링 상대.

정하얀은 이쪽에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자연치유가 된다.

나뿐만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들을 보니 확실히 사람과의 대화가 해결책이라는 걸 깨닫고 있는 것 같았다.

“덕구야.”

“아, 형님.”

눈에 띄게 초췌한 얼굴, 내 옆에 붙어 있는 정하얀에게도 인사를 건네는 놈의 모습이 비쳤다.

“조금 괜찮아?”

“물, 물론이요.”

“진지하게 물어보는 거다.”

“거,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형님. 누님이나 잘 챙겨주쇼. 나는 끄떡없으니까.”

‘이 돼지가….’

“뭘 봤는데.”

“별거 아니요.”

말을 아끼는 느낌.

자신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짐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조용히 녀석을 응시하자 조금은 불안해하는 얼굴이 눈에 보인다.

“나는 내가 죽인 이들이나 내 앞에서 죽은 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유석우 그리고 구해주지 못했던 여자나 박혜영의 시체도 봤어. 물론 정진호와 그 똘마니들의 얼굴도 보였고. 나보고 곧 죽을 거라고 말하더구나. 지금도 욕하고 있어. 자신들의 죽음을 합리화하지 말라고 외치기도 했다.”

“…….”

“너는?”

무척 고민하고 있는 얼굴이다.

말하는 게 맞는 건지 아니면 말하지 않아도 되는 건지 우물쭈물거리고 있다.

어쩌면 자신의 약점이나 트라우마에 관련된 이야기일 수도 있으니 조심스러운 게 당연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쪽이 먼저 입을 연 것이 큰 도움이 된 모양. 결국에는 슬쩍 입을 열어오는 얼굴이 보였다.

“저, 저는… 형, 형님이랑 다른 파티원들이 죽는 걸 봤소. 거대한 괴물이랑 싸우고 있는 도중이었는데…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서 그,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잠깐 움찔한 사이에 형님이 다치고 누님도 다쳐서, 뭐라고 말해야 될지 모르겠는데… 그게, 그러니까… 끄으으윽….”

어지간히 충격이었던 것 같다.

입을 열면서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고 있었고 목이 메는지 말을 더듬는다.

사실 덕구 녀석이 마음이 약하다는 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미처 생각 못 했다.

‘유석우를 죽였을 때도….’

박덕구는 그 장면을 굳이 쳐다보지 않았다.

“그, 다음에는 형님이랑 누님들이 나를 비난하는 걸 봤소. 너 때문에 죽었다고… 다 나 때문이라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벌벌 떨고만 있었는데… 또다시 같은 상황이 찾아왔는데도 움직이지 못했소. 계속 움직이지 못해서….”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도 마찬가지였… 한 번도 구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목소리는 지금도 들려?”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이 보였다.

“뭐라고.”

“겁쟁이, 너 때문이라고 계속 그렇게 말합디다.”

“누가?”

“형님이랑 누님 목소리요. 현성 형씨 목소리도 들리고 희형 누님 목소리랑 꼬맹이 목소리도 조금씩 들리는 것 같소. 형님도 마찬가지요?”

“물론이다. 나도 똑같이 들려. 아까 말했던 것처럼 지금도. 그래도 별로 아무렇지도 않아.”

“역시 형님은….”

“역시 형님은… 같은 소리 마. 네가 본 건 단순한 환각이나 환청이야.”

이건 박덕구에게 하는 소리지만 옆에 있는 선희영이나 정하얀에게 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굳이 흔들릴 이유도 없고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어차피 개소리니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지금 네가 실제로 보는 것에 집중해라.”

“아….”

“내가 하면 너는 더 잘할 수 있다, 덕구야.”

“아, 알겠소.”

“계속 생각해. 내가 하면 너는 더 잘할 수 있는 거야.”

당연하지만 이걸로 됐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놈은 내 목소리에 잘 흔들리는 편이니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으리라.

조금은 기분이 좋아진 것 같은 얼굴이 보이는 것을 보니 확실할 것이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선희영과도 짧은 이야기를 나눴고 이상희와 황정연, 김현성과 함께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 시간을 가졌다.

물론, 그 외에 시간에는 모조리 정하얀에게 투자한 것이 당연지사.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정신을 붙잡아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하얀의 경우에도 박덕구처럼 이야기해 보는 게 어떨까 생각해 봤지만 이쪽에 제대로 호응해 주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사실 자신이 봤던 최악의 상황을 입 밖으로 꺼내기도 싫은 것이리라.

‘…….’

뭘 봤냐고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입술이 터질 정도로 깨무는 모습을 보고서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무리하게 괜찮은 척을 했던 박덕구와는 사정이 달랐다.

모두가 예민해져 있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버틸 수 있는 상황.

기껏해야 환청이 들리는 것 정도가 전부였고 상황이 악화되고 있는 사람은 일단은 없었다.

신성력으로 저주를 해주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그래도 현 상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 것이다.

‘잠깐 휴식을 취한 것은….’

최고의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 불침번을 제외한 이들은 모두 잠깐 눈을 붙였고 그건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잠을 제대로 자기 힘든 상황이기는 했지만 오랜 여정에 지쳤기 때문에 금방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물론, 계속해서 눈을 붙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

어느 순간부터 정하얀이 커다랗게 눈을 뜨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원히 함께인 거야. 으응… 아니야. 오빠가 그럴 리가 없어. 네 말은 바보 같아. 오빠가 네 말은 무시하라고 했어. 그러니까 넌 없는 거야.”

누구와 대화를 나누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이쪽의 귀에 속삭이고 있는 소리가 들려온다.

“네 말은 안 들어. 바보 멍청아. 오빠가 죽으면 안 된다니까. 나는 오빠랑 영원히 함께 살 거야.”

‘제기랄….’

“우리는 영원히 함께예요. 함께 살 수 있어요. 여기서 쭉 함께 지내요. 오빠. 히히히.”

소름이 끼칠 정도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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