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회귀자 사용설명서 090화
우린 영원히 함께예요(4)
“우리는 영원히 함께예요. 함께 살 수 있어요. 여기서 쭉 함께 지내요, 오빠. 히히히.”
소름이 끼칠 정도의 목소리였다.
계속해서 귓가로 속삭이는 것을 보니 이쪽이 잠에서 깰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 애초에 지금은….
‘정상적인 판단이 가능한 상태가 아닌가?’
애초에 정하얀의 정신은 그다지 건강하지가 않다.
선희영 역시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녀 같은 경우에는 이미 확고한 가치관이 자리 잡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쪽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정하얀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조금 더 정확히 하자면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가 제어하지 못하는 가의 차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정하얀에게 들리는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네 말은 안 들을 거라니까. 그러니까 나한테 말 걸지 마. 어차피 안 들을 거야.”
어쩌면 자기 자신 일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정황상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다. 죽여서 소유하는 것이 옳다고 말해오고 있는 것이다.
“오빠는 죽으면 안 된다니까. 다리만? 도망칠 거라고? 그럴 리가 없잖아. 오빠는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줬으니까. 절대로 안 도망쳐…. 그리고 그렇게 하면 오빠가 아프잖아. 그건 싫은데….”
순간적으로 이쪽의 다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별것 아닌 손길임에도 불구하고 비명을 내지르고 싶은 심정, 뿌리치고 싶지만 뿌리칠 수도 없는 게 문제였다.
지금 나는 자고 있는 상태여야 했으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안 된다니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팔도 안 되지 그럼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이 없어지는 거니까, 바보야. 꽉 껴안아 주지도 못할 거라고…. 넌 멍청이야.”
“…….”
‘제기랄.’
상태가 더 심각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왜 저러고 있는 건지 이해는 간다.
당장 내 귓가로도 정하얀의 목소리 이외에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온다.
빌어먹을 정진호와 박혜영의 목소리 때문에 짜증이 치솟을 지경.
본래 불안정한 정신에 저주까지 겹치니 어느 한 쪽이 마모된 것이 틀림없다.
다른 사람들 보다 저주가 정신을 침식하는 속도가 빠른 것이다.
본인은 계속해서 영향이 없다고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틀림없이 정하얀은 목소리에 흔들리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 완전히 미친 건 아니야.’
최소한 남들에게는 이런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 첫 번째 증거.
누군가 뒤척일 때마다 조용히 입을 닫고 있다. 아직 제 정신을 유지하고 있기는 한 것이다.
입을 꾹 담고 최대한 눈을 뜨지 않으려고 했던 그때였다.
“깨어 있는 것 같다고?”
“…….”
“아니야. 지금까지도 한 번도 깬 적 없었어. 오빠는 한 번 자면 쉽게 일어나지 않으니까. 마법도….”
“…….”
“…….”
“아. 여기는 집이 아니었지. 깜빡했다.”
‘개….’
눈을 감고 있지만 정하얀의 얼굴이 이쪽의 얼굴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거친 호흡이 그대로 이쪽으로 전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정말로 잠을 자고 있는 건지 확인이라고 하려고 하는 모양새였다.
한참이나 시간이 지난 뒤에서야 이쪽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고 돌아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계속해서 내 옆에 있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한 모양.
정하얀의 숨소리도 느껴지지 않았고 이쪽을 만지는 손길도 없다.
이미 자신의 자리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직후 살짝 눈을 떠볼까 고민하던 바로 그때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말이 맞지? 아직 자고 있잖아. 히히히.”
다시 한번 몸을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번에는 정말로 멀어진 것이다.
최대한 잠을 자려고 해봤지만 졸음이 쏟아질 리가 만무, 그나마 앞전에 숙면을 취했기 때문에 그렇게 피곤하다는 느낌은 없기는 했지만 던전 공략보다 더 큰 숙제를 받은 것 같아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까놓고 말해서 내게 있어서는 더 이상 던전이 문제가 아니다.
‘정리해 보자.’
이 사태를 해결하는 게 더 중요하다.
사실 정하얀의 이상 행동은 하루 이틀 일이라고는 볼 수 없다 애초에 내 방과 나에게 마법을 걸었던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그건 나에게 위해를 끼치기 위함이 아니었다.
오히려 보호의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으리라.
연적으로부터의 보호이기도 했고 보이지 않는 위협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함이기도 했다.
침대에 걸려 있었던 수많은 마법 역시 이쪽을 최대한 배려해준 나름의 착한 짓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정하얀은 내 쪽에는 최대한 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지금의 상황과는 완전히 딴판이다.
‘지금은….’
이쪽에 해를 끼치는 걸로 범위를 확대시키려고 하고 있다. 방금을 생각해 보면 거의 확실할 것이다. 계획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평생 둘이서만 이 던전에서 영원히 함께 지내는 것.’
기가 차서 제대로 말도 나오지 않는다.
애초에 이곳에서 식수나 먹을 것들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발상 자체가 우습다.
식수는 마법으로 어떻게든 구할 수 있겠지만 이곳은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물론 아직까지 정하얀이 움직인다는 확신은 없지만 일어날 수 있는 일에는 최대한 대응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정하얀이 정말로 마음을 먹었다고 가정했을 때, 그녀의 선택지는 두 가지.
하나는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죽이고 숨는 것. 나머지 하나는 나만 데리고 간 이후에 사라지는 것.
두 번째 선택지를 더 염두에 두고 있기는 한 것 같기는 했지만 지금보다 더 사태가 심각해진다면 첫 번째를 선택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물론.’
정하얀이 이 원정대를 전부 죽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가능할 수도 있어.’
정하얀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똑똑하고 용의주도하다.
이전에 박혜영을 처리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지금 우리가 있는 장소는 파란의 다섯 파티를 집어 삼켜 버린 던전이고 모두들 환청과 환각을 듣고 있는 상태, 아무리 김현성이 있다고는 하지만 회귀자가 그리고 있는 그림에 정하얀이라는 변수는 들어가 있지 않을 것이다.
만약 정하얀의 계획이 실행에 옮겨지고 성공적으로 마무리 된다고 한다면 지금 우리가 있는 던전은 영웅 등급의 던전, 저주받은 신단이 아니라 전설 등급의 던전 미친 마법사와 저주받은 신단으로 네이밍이 바뀔 지도 모른다.
‘미친 마법사와 저주받은 신단….’
다시 한번 생각해도 그럴 듯하다.
정하얀의 입장에서 이 던전을 공략하러 들어온 이들은 사랑의 보금자리를 파괴하려는 이들로 보일 테니 말이다.
배드 엔딩 중에서도 최고의 배드 엔딩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
당연하지만 이런 곳에서 평생을 썩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이곳이 안전하고 안락한 곳이 될 지도 모르겠지만 자유가 억압되는 것은 취향이라고 할 수 없다.
‘어떻게 해야 되지….’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지만 일단은 정하얀의 멘탈을 최대한 잡아두는 것이 첫 번째.
던전 공략 말고도 해결해야 되는 숙제를 한 가지 더 떠안게 되어버렸다.
계속해서 앞으로의 행동 방향에 대해 떠올리고 있었을 때 어느 순간 날이 밝았는지 주변이 분주해 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들려온 목소리는 역시나 정하얀의 목소리였다.
“오빠 일어날 시간이에요.”
“아… 응.”
고개를 끄덕이며 정하얀을 바라보자 그녀의 상태창이 시야에 비친다.
[플레이어 정하얀의 상태창과 잠재능력을 확인합니다.]
[이름 - 정하얀]
[칭호 - 없습니다. 조금 더 노력하셔야겠네요.]
[나이 - 21]
[성향 - ??]
[직업 - 대마법사 - 영웅 등급]
[능력치]
[근력 - 17/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민첩 - 15/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체력 - 29/성장한계치 영웅 이하]
[지력 - 61/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내구 - 22/성장한계치 희귀 이하]
[행운 - 52/성장한계치 영웅 이상]
[마력 - 70/성장한계치 전설 이상]
[장비 - 신성한 보호]
[특성 - 마법사가 되는 방법 - 영웅 등급]
[총평 - 무척 빠른 성장 속도가 눈에 띕니다. 플레이어 정하야은 마력과 마법에 대해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지력이 낮아 상위 단계로 발 돋음 하기 힘들어 보입니다만 얼마 걸리지 않아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입니다. 플레이어 이기영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죄송할 지경입니다. 재미있는 것이 보입니다. 성향이 변화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는군요. 저주받은 신단을 새로운 형태의 던전으로 탈바꿈시키고 싶지 않으시다면 노력해야겠네요. 그동안 정이 들었었는데 부디 살아남으시길 빌겠습니다.]
‘이럴 것 같더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직까지 성향의 변화가 완전하지 않다는 점.
저 물음표가 뭘 뜻하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총평의 말 그대로라면 정하얀은 지금 기로에 서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계속해서 순수한 옹호자라는 성향을 이어갈지, 아니면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바뀔지 말이다.
뒤바뀔 성향이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긍정적인 영향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시 한번 정하얀을 바라보자 눈에 보이는 것은 평소와 같은 얼굴, 너무 아무렇지도 않아하는 것 같아 내가 다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헤헤헤.”
그렇지만 곧바로 연기에 돌입한 것은 당연지사.
웃으며 얼굴을 쓰다듬으니 무척이나 기뻐하는 것 같은 모습이 보인다.
“아직도 목소리가 들려? 하얀아?”
“네. 조금씩은 들려요. 그래도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냥 환청이니까요.”
“정확히 뭐라고 말하고 있는데?”
“잘 모르겠어요. 이제는 잘 들리지도 않아서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거짓말.
“그래. 다행이네. 일단은 출발할 준비부터 해야지 다른 사람들은?”
“30분 뒤에 출발한다고 들었어요. 다들 짐 정리하는 것 같은데….”
손을 꼬옥 잡아오는 모습.
나 역시 살짝 웃으며 정하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말이다.
이게 웬 떡이냐는 듯 정하얀이 내 목을 감싸 앉았지만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그 이상으로는 나아가지 않았다.
마치 오래된 연인이 아침 인사를 나누는 것 같은 느낌.
잠깐이었지만 얼굴을 붉히고 있는 정하얀이 눈에 들어왔다.
‘좋아.’
나쁘지 않은 반응이다. 내 쪽에서 조금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은 느낌에 시도해 보기는 했지만 일단은 괜찮아 보인다.
몸을 조금 더 밀착시키는 것은 물론 계속해서 듣기 좋은 말을 해주는 것은 당연지사.
지금 정하얀에게 필요한 건 더 큰 애정이라고 생각했다.
혼잣말을 하고 있지도 않고 눈이 이상해 보이지도 않는다.
최소한 나와 함께 있을 때면 상태가 심각해 보이지는 않는다.
“떠날 준비는?”
“제가 다 해놨어요. 헤헤.”
“아. 고마워. 그럼 나갈까?”
“네.”
“아. 오빠 잠깐… 할 말이 있는데요.”
“응?”
“저번에…. 저번에 말이에요.”
“응. 저번에?”
“저희가 그러니까… 첫… 첫, 첫키스했을 때 있잖아요?”
기억 난다.
차희라에게 가기 전에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입을 맞췄던 적이 있다.
“그때.”
“…….”
“사, 사랑한다고 말해주셨잖아요? 저밖에 없다고 말씀해 주셨잖아요?”
“응. 그랬지.”
“지금도… 똑같으시죠? 저 사랑하는 거 맞죠?”
‘이거….’
뭐라고 답하는 것이 정답인 건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대답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니 현재 내가 어떤 선택지에 당도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한다면 당연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정답.
그렇지만 정말로 이게 정답인 건지 구분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말 한마디로 그녀의 성향이 바뀌거나 하지 않을지 걱정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계산을 하고 있었을 때, 다시 한번 대답을 강요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랑하는 거 맞죠?”
급해 보이는 눈.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물론, 지금도 사랑하고 앞으로도 계속 사랑할 거야.”
“아… 다행이다.”
“그런데… 갑자기 왜?”
“아무것도 아니에요.”
무척이나 기뻐하는 얼굴, 그렇지만 내가 선택한 것이 정답인지에 대한 여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아직까지 성향에 변화가 없었으니까.
“저도 사랑해요, 오빠.”
“나도….”
정하얀의 상태창에 변화가 생긴 것은 바로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