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회귀자 사용설명서 091화
우린 영원히 함께예요(5)
정하얀의 상태창에 변화가 생긴 것은 바로 그때였다.
[성향 - 타락한 옹호자]
‘이렇게 갑자기 타락하지 마….’라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튀어나왔다.
‘정답이 아니었어.’
사랑한다는 말이 정답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렇지만 다른 선택지를 선택할 수 없었다는 것이 문제.
이제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 순간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둘 다 정답이 아니라고 한다면 차라리 예상 가능하게 행동하는 편이 조금 더 낫다.
그나마 지금 같은 경우에는 행동방향을 예측할 수 있었으니까.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며 웃으니 마찬가지로 이쪽으로 웃음을 보낸다.
‘대책을 마련해야 돼.’
앞서 말했던 것처럼 던전의 공략 이외에도 정하얀을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내야 한다.
여러 가지 선택지가 떠오르기는 했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떠올리는 것은 순식간.
정하얀을 아예 떨어뜨리거나 배제하는 것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최후의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잠깐 회의 좀 하고 올게, 하얀아. 덕구랑 희영 씨랑 같이 준비하고 있어.”
“네! 오빠.”
그나마 떨어질 수 있는 시간은 간부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내가 가장 마지막에 나온 것이 맞는지 벌써부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황정연과 김현성, 이상희가 시야에 들어왔다.
“작은 조각상 말인가요?”
“네. 조각상입니다.”
“일정 구역마다 설치되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고 잠깐 동안이지만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가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저주를 해주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잠깐 동안 억제 시켜준 것에 불과합니다만….”
“그렇군요. 그렇다면 일정 구역마다 세이프티 존이 있다고 봐도 되는 건가요?”
“아직 다른 구역에도 같은 효과를 가지고 있는 조각상들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피폐해진 정신을 부여잡는 것에는 도움이 될 겁니다. 저주에 걸린 이후로는 신성력도 커다란 효과를 발휘하기 힘든 상황이니 최대한 활용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사실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던 참인데….”
“여기서는 조금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니 마찬가지로 인사를 해오는 이들이 눈에 보인다.
흘러나오는 이야기의 분위기로 봐서는 김현성이 뭔가를 찾아낸 모양.
대충 정리해 보자면 저주의 침식을 막아주는 세이프티 존을 찾아낸 것 같았다.
‘나쁘지 않네.’
세이프티 존의 같은 경우에는 어차피 던전 공략을 하던 도중에 밝혀질 일이기는 했지만, 조금 이른 이 시점에 발견했다는 것은 확실히 박수를 보낼 만한 일이다.
“7번대 분들은 조금 어떠신가요?”
슬쩍 내 쪽을 바라보는 김현성이 보였다.
지금까지 밖에서 고생하다 돌아왔으니 우리 파티원들의 상태를 모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조금은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 같지만 아직까지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희영 씨 같은 경우에는 별로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지 않고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목소리가 아예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렇군요.”
“자세하게는 알 수 없지만 아마 가지고 있는 지력 스탯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더군요.”
“아.”
“2번대는 어떻습니까?”
“네. 저희 파티도 후위보다는 지력 스탯이 상대적으로 낮은 전위 분들이 더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았어요. 침식 속도도 조금 빠른 것 같고요. 당장은 심각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이 상태가 길게는 삼 일, 혹은 일주일이 더 지속된다고 가정한다면 어떻게 될지는….”
“그래도 다행입니다. 일단은 일정 구역마다 안전하게 몸을 쉴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요. 각 파티의 사제 분들에게 후위보다는 전위에 신성력을 몰아 줄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효과가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도움이 될 겁니다. 혹시 그 외에도 다른 정보들이 모이면 곧바로 말씀해 주세요.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정리를 마친 이후에 곧바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포지션은 어제처럼, 현성 씨를 선두로 수색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이상희는 입을 열었고 우리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희의 용무는 대충 끝난 것 같았지만 사실 상 내 용무는 지금부터 시작.
“현성 씨, 저는 잠깐 정연 씨와 이야기 좀 하고 돌아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김현성 녀석도 조금 의아한 표정이기는 했지만 눈앞에 있는 황정연도 조금은 놀란 표정.
이쪽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니 무슨 이야기를 할지 기대되는 모양이다.
이윽고 김현성이 발걸음을 옮겼고 황정연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향해 입을 열었다.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네. 괜찮습니다. 정연 씨는 좀 어떻습니까?”
“저도 괜찮아요. 지력 스탯이 높은 게 확실히 영향이 있기는 있었던 것 같네요. 기영 씨를 보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지만요.”
“겉으로 보기에만 아무렇지도 않게 보일 뿐입니다.”
“아뇨. 저주가 내렸을 때에도 일찍 깨어나셨잖아요. 개인마다 보이는 게 다르다고는 하지만 조금 자존심 상한다니까요. 후후.”
“혹시 뭐 따로 알아내신 건 있으십니까.”
“아… 네. 아직은 딱히 이야기 할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기다리고 있기는 하지만 일단 데이터를 모으고는 있어요.”
“예를 들면?”
“예를 들면 목소리가 들려오는 시기라든가…. 정확히 말하면 10분 46초 주기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어요. 1시간이 지날 때마다 38초 정도 짧아지고 있고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경우에는 침식 속도가 느려요. 물론 개인차가 있기 때문에 어떻게 정의를 내릴 수는 없지만 일단 제 몸 상태는 이래요.”
“아. 확실히 기억력이 좋다는 건 도움이 되는군요.”
“네. 물론 그 개자식들의 목소리가 더욱더 생생히 들려오는 건 반갑지 않지만요.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이예요? 혹시 저번에 약속을 지키려고 하시는 건가요?”
“아뇨. 지금은 시기가 적절하지 않아서 말입니다. 덕구도 많이 힘들어하고 있고… 아무래도 던전 안이니까요.”
“후후후. 그런 것 치고는 하얀 씨랑 서로를 의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로맨틱해라.”
“사실 별로 로맨틱한 상황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저주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없어 보이죠.”
“함께 오래 지냈기 때문에 미묘하게 달라진 차이도 알 수 있다는 건가요?”
“그렇다고 해두죠.”
“흐음…. 굳이 이상희 님이나 현성 씨에게 알리지 않은 건….”
“혼자 해결해야 되는 일입니다.”
“그래도 알리는 게 좋을 거예요. 특히나 아주 작은 변수로도 달라질 수 있는 게 던전 공략이니까요. 하얀 씨의 상태가 좋지 않다면 차라리 두 분이서 먼저 던전을 나가는 선택지도 있으니까요.”
“아뇨, 어차피 던전 안에서 나가도 이 저주가 해주될 거라는 보장도 없고….”
나가면 더욱더 위험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차라리 모두와 함께 있는 것이 더 나은 선택지다.
“그리고 최소한 정연 씨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대비 할 수 있는 보험이 하나 생긴 셈이니까요.”
“믿어주시는 건 좋지만 자신 있다고 말씀드리기는 힘드네요. 말은 안하고 있지만 저도 상당히 스트레스 받고 있는 상황이라, 그래서 뭘 해드리면 되는 거예요?”
굳이 질질 끌 이유는 없다. 나는 곧바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환상 마법이나, 환각 마법, 혹은 정신계 마법을 사용하실 수 있으십니까?”
“흐음….”
“…….”
“정신계 마법은 불가능해요.”
‘아….’
“환각이나 환상 마법 정도는 가능해요. 정신계도 사실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여러모로 복잡해요. 기영 씨도 알고 계시잖아요?”
“네. 어려운 일이라는 건 대충은 인지하고 있습니다.”
“뭘 생각하시는 지는 대충 알 것 같은데… 그렇게 쉽게 되는 일이 아녜요. 환상이나 환각 마법도 지력이 높은 사람들에게는 별 효과가 없고 심지어 지력이 낮은 이들도 마력이 높다면 저항하기 일쑤니까요. 정신계 마법은 더욱더 그렇죠. 아무리 받아들이는 사람이 마법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 정신에 침입해 오는 걸 밀어내려고 하는 성향이 있어요.”
어려울 거라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시작부터 불가능 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조금은 맥이 빠질 정도.
그렇지만 불가능으로 가능으로 만드는 것에 흥미를 느끼는 게 황정연 같은 종류의 인간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다.
“본래는 불가능한 게 맞아요. 틀림없이 불가능하지만….”
“저주가 걸려 있는 대상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힘들 거예요.”
“그렇다면 약물의 도움이 있다면 어떻습니까? 혹은 촉매라든가….”
“기영 씨가 마법을 사용하는 방식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그것 외에도 연구하고 있던 물약이 있었습니다. 사람의 감정을 건드린다는 목적으로 실험하고 있던 물약이었죠. 물론 커다란 성과를 내지는 못했습니다만… 나쁘지는 않습니다. 물론 정말로 감정을 건드리는 건 아닙니다만 최소한 비슷한 효과를 내게 할 수는 있을 겁니다.”
“…….”
“가능하시겠습니까?”
“잘 모르겠어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물약 치료와 환상 마법으로 인한 치료를 병행하는 게 되는 거네요. 동시에 들어가는 것도 효과가 좋을 수 있을 것 같고요. 인간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장벽을 물약으로 제거하고… 안 그래도 저주로 정신력이 약해졌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니까….”
계속해서 중얼거리고 있는 황정연의 모습이 보였다.
머릿속으로 이론에 대해서 떠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조금 흥미로워 보인다는 얼굴이었다.
“만약에 이게 성공적으로 된다고 한다면 던전의 공략이 쉬워질 수도 있겠네요. 물론 여러 가지 실험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아무리 빨라도 최소 한 달은….”
“자질구레한 것들은 모두 건너뛰고 곧바로 실험에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쓸 만한 실험체가 있으니까요.”
“네?”
“제가 직접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몸에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고… 일단 제가 만든 물약에 대해서는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아….”
“가능하시겠습니까?”
“확답은 드릴 수는 없어요. 그래도 재미있을 것 같기는 하네요. 이론에 대한 이야기는 가는 길에, 잠깐 쉴 때마다 임상실험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정신에 이상이 생긴다면….”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아예 장담할 수는 없지만 일단은 맞다.
어차피 어느 정도 도박을 해야 되는 상황.
정하얀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이번 일은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내가 황정연과 붙어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정하얀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계획의 일부야.’
큰 그림을 생각한다면 이것 역시 나쁘지는 않은 선택지처럼 보였다.
“현성 씨한테 잠깐 말씀드리고 오겠습니다.”
“네?”
“당분간 2번대와 함께 움직인다고 말입니다.”
“네. 그러는 것이 좋겠네요. 아니, 저희 파티원을 보내는 게 좋겠어요.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던전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도 좋겠어요. 몬스터가 언제 나오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전까지 만이라도 여유 있게 실험에 임할 수 있을 거예요.”
“네.”
“촉매들은 챙겨오셨나요?”
“물론입니다. 연금키트들도 챙겨왔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삼 일. 삼 일 안에 해결하도록 하죠.”
“기왕이면 더 빨리 부탁드립니다.”
“끄응…. 주문이 어렵기는 하지만 준비물은 갖춰져 있는 상황이네요. 만약에 결과물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마도학자라는 직업명이 울 거예요. 그럼 이번이 두 번째 실험이 되는 거네요?”
“이번에는 정연 씨가 박사님입니다.”
“그래요. 조수. 잘 부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