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회귀자 사용설명서 096화
율리에나(1)
기분 나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아아….
이유는 모르겠지만 괜스레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온다.
사실 희귀 등급의 던전, 공포의 정원의 던전 보스는 제대로 된 던전 보스라고 하기에는 힘들었다.
정원의 주인은 덩치가 큰 것이 고작이었고 그나마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회복력도 파티원의 공격력을 감당하기에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눈앞에 있는 여자는 다르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봐도 뭔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전해져 온다.
사제복을 입고 있는 모습은 확실히 성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 외관이었지만 풍겨져 오는 분위기는 딴판.
본능적으로 압도당하는 느낌.
저 여자는 포식자고 나는 피식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괜스레 김현성의 따뜻한 등 뒤가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현성아… 괜찮은 거 맞지?’
-아아아… 게드릭… 나의 게드릭! 드디어 나를 만나러 와주었구나….
‘무슨 개소리야.’
-드디어 나를 찾아주었어. 사랑스러운 나의 게드릭!
목이 이상할 정도로 꺾여서 돌아간 이후에 이쪽을 향해 손을 뻗는다.
잠깐 동안 게드릭인 척을 해볼까 생각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이런 곳에서 먼저 나서는 것은 위험할 것이다. 조용히 후위에 섞여 전위들의 품 안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이 가장 베스트다.
‘눈이 안 보이는 건가?’
김현성이 한 발자국을 더 내디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아아아아.
‘…….’
-너희는 그가 아니구나. 그가 아니야.
미간을 잔뜩 찡그린 이후에 감긴 눈을 치켜뜬다.
눈동자가 정상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눈꺼풀 안에 있는 것은 새까만 어둠이었다.
뽑혔는지 아니면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생리적인 거부감 때문인지 등 뒤로 소름이 돋아났다.
‘개….’
-그가 아니야. 그가!
밟고 있는 바닥이 울리고 후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던전의 내부가 흔들린다.
마력이라고 할 수 없는 이상한 기운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것은 물론 계속해서 울리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울컥 하고 목구멍으로 피가 튀어나오려고 했을 때 원정대 전체를 감싸는 막이 보였다.
선희영이 신성 마법으로 기운을 막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아니야!
“전투 준비합니다. 마법사들은 주문을, 사제님들을 계속해서 신성력을 유지해 주세요. 어그로를 끌 수 없는 몬스터라고 판단, 최대한 수비적으로 운영하겠습니다. 장기전이 될 겁니다.”
“네.”
생각보다 침착한 이상희는 커다란 방패를 들고 후위를 가렸다.
든든한 느낌이다.
곧바로 주문을 외우자 여기저기서 마력이 일어나기 시작.
캐스팅이 끝날 때까지 시간을 벌어주는 것은 전위의 몫이다.
물론 우리 쪽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김현성을 필두로 몇몇이 율리에나를 향해 쏘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힘내라, 김현성.’
마법도 신성력도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기운들이 사방으로 터져 나온다. 누구의 것인지는 아마도 뻔할 것이다.
‘율리에나.’
“방어 마법 준비해 주세요.”
-더러운 놈들이… 더러운 놈들이 감히! 이곳을 침범하다니… 이곳을!
콰드드드드득!
검은색 구체가 바닥을 긁으며 이쪽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은 가관.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운이 나를 집어삼킬 것처럼 가까이 다가오는 것은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다.
어느새 길을 막는 이상희가 방패를 들어 묵직한 공격을 막아내는 장면이 보였다.
공격을 막아내기는 했지만 쉽지 않은 느낌. 표정이 일그러진 이상희에게로 신성 마법이 들어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쉽지 않은데….’
본래의 몬스터를 사냥하는 방법과는 조금 다르다.
정원 군주 같은 경우에는 가장 앞쪽에 있었던 전위들에게 어그로가 쏠렸다고 한다면 지금 눈앞에 있는 율리에나의 경우에는 딱히 특정 목표를 설정하고 있지가 않다.
그야말로 미친년처럼 날뛰는 상황.
상대적으로 방어력이 낮은 후위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전위가 이쪽에 달라 붙어 있을 수밖에 없으니 저 여자를 상대하는 게 쉽지 않았다.
마법을 캐스팅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장기전인 만큼 혹시라도 사제단이 피해가 가면 안 되었기에 그 상황을 대비해 탱커들은 조금 더 긴장해야 했다.
민첩이 높은 궁수들은 다른 도움을 받는 것을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정하얀과 황정연의 입을 여니 곧바로 튀어나오는 것은 거대한 마력을 담은 마법.
순식간에 미친 여자를 감싸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윽고 검은색 구체가 또다시 그녀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나 역시 외우고 있었던 주문을 입 밖으로 내뱉은 것은 바로 그때.
“……!”
허공에서 생겨난 거대한 팔이 검은색 구체에 감싸져 있는 율리에나를 통째로 뭉개버릴 기세로 떨어졌다.
콰드드드득!
파티원들의 표정이 조금은 깜짝 놀랐다는 감정이 생겨난 것도 잠시.
흙먼지가 가라앉고 율리에나가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보인다.
-감히… 감히!
내 마법은 엄연히 물리계로 분류되어 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은 대미지가 들어간 것 같은 느낌. 그렇지만 그 소식이 그렇게 반갑지 만은 않았다.
‘망했다.’
우연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검은색의 구체가 내가 있는 지역을 향해서 떨어지는 듯한 느낌.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운이 계속해서 떨어졌다.
김현성 역시 혹시나 이쪽이 피해를 입을까 쉽사리 접근하지 못하고 검으로 공격을 막아내는 상황.
차라리 이쪽이 없었다면 조금 더 편하게 사냥을 이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영웅 등급의 던전은 원래 이런 건가?’
쉬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빡세다.
여기저기에서 굉음이 들리고 땅이 파이고 던전 전체가 흔들린다.
‘덕구로는 무리야.’
아마 그것이 김현성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이리라.
이상희는 틀림없이 1인분을 해주고 있지만 마력이 낮아 저항력이 딸리는 박덕구는 이쪽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열심히 해주고는 있지만 작은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 고작이리라.
그나마 버틸 만한 건, 아직까지 저주를 쏟아붓지 않다는 것.
애초에 신성력이나 마력으로도 해주할 수 없는 규격 외의 기술이라 제한 조건이나 쿨타임이 있으리라고 생각은 했지만 내가 생각한 것보다 자주 쓸 수 있는 기술은 아닌 것 같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환각마저 보게 된다면 조금 더 위험해질 수 있으리라.
어떻게든 뭔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
조금이라도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을 멀리하고 싶다. 결국에는 슬쩍 입을 여는 게 조금 더 합리적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아아아아. 나의 율리에나!”
우습게도 움찔 하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게, 게드릭?
한참 전투가 진행되고 있는 도중 터져나온 내 목소리에 잠깐 동안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뭐하냐는 듯이 나를 쳐다보는 원정대원들의 시선이 날아들었지만 굳이 대답할 의무는 없다.
곧 모두가 알게 될 테니까.
“율리에나! 나의 율리에나!”
-게드릭! 아아, 와주었구나. 게드릭! 네가 와주었어.
“율리에나! 기나긴 영겁의 시간동안 당신을 찾아다녔소. 이 신단을!”
-게드릭, 드디어 네가 드디어….
“율리에나!”
-아, 아니야. 너는 게드릭이 아니야.
‘제길.’
“수많은 세월이 흘렀소, 율리에나. 이 신단에 묶여 있는 그대와는 반대로 나는 여러 번의 변화를 겪었지. 헤아릴 수조차 없는 시간이요. 내 말투와 내 존재, 내 모든 것이 그때와는 많이 달라졌소.”
-아니야. 너는 게드릭이 아니야.
“율리에나! 나의 사랑 율리에나!”
-너는 게드릭이 아니야!
“율리에나, 나는 달라졌지만 나는 여전히 그 날을 기억하고 있소. 율리에나 그대와의 추억을 항상 이 몸 안에 간직하고 있소.”
-아….
“그 소중했던 기억을 말이오….”
-게드… 릭?
그날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생각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눈동자에서 검은색 눈물이 흘러나왔다.
보기만 해도 괴기스럽다.
그로테스크한 느낌에 잠깐 동안 인상을 찌푸렸지만 구태여 목소리로 티를 낼 수는 없는 노릇.
일단은 저 여자에게 작업을 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여기서 설명을 더 요구한다면 밑천이 바닥나는 것은 당연지사.
-그날이라면….
한 번 더 물어올 것 같아 괜스레 불안해졌다.
“우리가 서로… 아아아아악! 율리에나!”
-게드릭!
“이들이 나를 억압하고 있소, 율리에나! 아아아아악!”
뭐 하냐는 듯이 나를 바라보는 이상희와 박덕구, 선희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고 정하얀은 질투를 보내고 있었다.
‘다들 눈치가….’
없어.
지금쯤 열심히 시킨 일을 하고 있을 이지혜가 그리워질 지경.
그나마 머리가 잘 돌아가는 황정연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눈짓하자 고개를 끄덕이는 황정연의 얼굴이 보였다.
그렇지만….
“어리석은 율리에나! 어리석은 율리에나야! 네, 네, 네가 사랑하는 게드릭은 우리 손에 있다!”
‘미친 발연기.’
일일 드라마에 미쳐 있다는 것을 보고 조금은 기대하고 있었던 내가 다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혹시나 율리에나가 황정연의 연기를 보고 마음을 바꿔 먹진 않을까 걱정될 정도의 수준.
본인도 민망했는지 얼굴이 붉어져 있었지만 다행히 율리에나는 황정연의 연기에 의구심을 갖지 않았다.
“율리에나! 나를 구하지 마시오. 율리에나! 지금 당장 도망치시… 크흑 이들은….”
-게드릭!
“크흑… 도망치시오! 율리에나!”
-네놈들이 감히! 감히! 게드릭을!
게드릭인지 개드립인지 내 알 바 아니다.
그러나 생각보다 효과가 있다.
물론 아직까지는 의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평생 동안을 기다리던 게드릭이 죽게 생긴 상황이다.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할 것이다.
‘미친 듯이 폭주하는 게 문제지만….’
후위를 향해 기운을 날리는 미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게드릭이 붙잡혀 있는 곳이었으니까.
조금 멍한 표정으로 사태를 파악하고 있는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김현성은 곧바로 율리에나를 향해 쇄도하기 시작, 곧바로 검을 휘둘러 오는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
김현성은 아직 영웅 등급의 던전에서 활개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사실상 녀석도 아직까지 성장 단계라고 말하는 편이 맞으리라.
그렇지만 계속해서 이쪽을 향해 달려오려는 율리에나와 그녀를 막으려는 김현성의 싸움은 내가 보기에도 놀라워 보였다.
사방에서 뻗어 나오는 검은 기운을 검 한 자루에 의지한 채로 막아내고 있는 김현성.
공격 범위가 한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김현성에게 수많은 공격을 뿌려대고 있는 율리에나.
콰드득 콰직!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은 물론, 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공방을 주고받고 있었다.
‘허….’
김현성이 검을 뻗지만 검은색 기운에 틀어 막힌다.
마치 촉수처럼 보이는 율리에나의 검은색 기운이 김현성을 후려치지만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는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막아낸다.
대충 보기에도 화려한 공방에 우리 파티원뿐만이 아니라 남은 파란의 파티원들 역시 커다랗게 입을 벌릴 정도.
애초에 어떻게 끼어들어야 할지 타이밍을 잡기가 힘들어 보였다.
-이 버러지 같은 놈이… 당장 비키지 못해?
“…….”
-게드릭! 게드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