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회귀자 사용설명서 097화
율리에나(2)
싸움의 스케일이 커지는 게 눈에 보인다.
본래 영웅 등급 던전의 주인인 율리에나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김현성이 현재 보여주고 있는 무위는 입이 벌어질 수준.
우리가 자리한 이 방이 조금씩 그 형태가 바뀌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당장 비키지 못해?
쾅!
콰드드드득!
얼핏 보면 호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 그렇지만 사실상 이 전투는 김현성이 가져갈 수밖에 없는 전투다.
-저주가!
“아아아아아악!”
-게드릭!
진심으로 싸울 수 있는 김현성과는 다르게 율리에나는 게드릭이라는 약점을 노출시킨 채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게드릭이라는 녀석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위험한 곳에 자신의 목숨을 던질 정도로 소중한 사람이라는 정보는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소중한 사람이 인질로 잡혀 있으니 본 실력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내가 비명을 지르거나 율리에나의 이름을 외칠 때마다 동요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사실 지금보다 싸움을 쉽게 끝낼 수도 있다.
소중한 게드릭을 억압하는 이 괴한들이 협박을 하는 순간부터 율리에나가 힘을 못 쓰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
그렇지만 싸움의 여파를 바라보는 이들은 그런 생각을 못 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꼭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 김현성은 파란의 남은 인원들을 향해 무력을 선보이고 싶어 하는 타이밍이었으니 말이다.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김현성은 어디까지나 진심이다.
율리에나는 그만큼 강하다. 그녀를 둘러싼 검은색 촉수들은 사방으로 뻗어나가 어떻게든 김현성을 옭아매려고 한다.
마치 곡예를 보이는 것처럼 한 끝 차이로 촉수를 피하거나 잘라내는 모습은 이미 사전에 합을 맞춰본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길 정도다.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촉수가 뭉텅이로 잘려나가고 김현성이 몸을 피한 자리에는 어김없이 공격들이 쏟아진다.
물론 율리에나 역시 만만치 않은 것은 당연지사.
상위의 싸움을 바로 앞에서 바라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마 저런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는 차희라 정도가 고작이리라.
그나마 이곳에서 가장 강하다고 할 수 있는 이상희도 뭔가에 홀린 듯 김현성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사실 무척이나 필사적인 율리에나의 모습을 보고 그녀를 어떻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는 했지만….
‘너무 위험해.’
만약에 들키면 그곳에서 아웃.
나뿐만이 아니라 내 주변에 있는 이들도 전부 피해를 입을 것이다. 도박을 하는 건 싫어하는 편.
지금은 굳이 주사위를 던져야 하는 타이밍이 아니다.
-조금만 기다려, 게드릭. 조금만!
돌아가는 상황은 무척이나 만족스러웠지만 한 가지 찜찜했던 것은 어느새 악역의 포지션에 자리 잡은 것이 우리처럼 보였다는 것.
눈이 없는 율리에나가 얼마나 절박한지 느껴졌다.
내가 찜찜하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그녀의 모습은 필사적이다. 악한에게 붙잡혀 있는 게드릭을 어떻게든 구출하기 위한 성녀의 발버둥.
물론 저 여자를 동정하진 않는다.
광기에 집어 삼켜진 것처럼 보이는 율리에나는 수많은 희생자를 낸 던전의 주인이었고 실제로 우리 파티도 죽을 위기를 겪었으니 말이다.
아마 이 던전의 존재가 아직 알려지지 않았을 뿐, 우리가 모르는 사상자를 냈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던전에 먼저 침입한 불청객도 우리라는 걸 생각해 보면 변명의 여지는 없지만… 김현성과 호각으로 맞붙을 수 있는 괴물과 드잡이를 하고 싶지는 않다.
-이 귀찮은 파리가!
“…….”
-어둠에 집어 삼켜지리라.
하늘을 수놓은 어두운 색의 역십자가. 그것이 김현성을 향해 떨어지지만 김현성은 제자리에서 검을 휘둘렀다.
쾅!
콰직!
콰드드득!
‘강해.’
자신의 몸보다 더 큰 검은색 십자가들을 전부 잘라내고 있는 모습은 경외감을 불러일으킬 정도.
나도 모르게 멍하니 입을 벌리고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에 집어 삼켜지리라!
콰직! 콰앙!
‘허….’
조금 당황스러웠던 것은 김현성의 얼굴이었다.
입가에 걸려 있는 미소는 누가 봐도 지금 이 상황을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콰직!
어쩌면 자신의 힘을 시험하고 있는 과정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스펙의 차이는 어쩔 수 없는지 몸에 상처가 쌓이지만 김현성은 현재의 자신의 상태에 만족스러워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직 평균 80에 도달하지 않은 능력치로도 저 정도라니….’
-당장 비키지 못해!? 오라! 저주를 내리는 검이여!
얼굴이 일그러진 저주받은 성녀의 위로 하늘에서 검이 떨어진다.
김현성의 검이 아니다.
‘저게 무슨 성녀야.’
아니 애초에….
‘이게 무슨 싸움이야.’
지금 저들이 보여주고 있는 싸움은 규격 외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표현은 아니지만 그것 말고는 이 싸움을 정의할 수 있는 단어가 없다.
2페이즈에 돌입한 것처럼 보이는 율리에나가 검을 들고 김현성과 다시금 맞부딪치고 있는 모습.
정면승부로는 힘들다고 생각했는지 김현성은 율리에나의 검을 흘리기 시작했고 그 여파가 고스란히 우리에게 전해져 온다.
박덕구나 이상희는 방패를 들고 최대한 이쪽을 막아서고 있었고 김현성을 보조해 주는 마법이 아닌 우리를 보호해 주는 마법이 계속해서 덧 씌어졌다.
‘이길 수 있나?’
그 와중에도 걱정되는 것은 승패 여부. 김현성이 이길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점점 늘어나는 김현성의 상처에 조금 걱정이 들었다.
이쪽에서 계속해서 신성력을 넣어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모양이라면 어쩌면 최악의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믿어야 되나?’
저게 김현성의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분명히 뭔가 하나나 둘 정도는 숨기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기 자신을 과신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둠에 짓밟히리라!
율리에나가 들고 있는 검을 들어 올리고 김현성 역시 마력을 검에 집중시킨다.
‘아마도 마지막.’
싸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분위기라는 것이 있다. 전력을 담은 검이 부딪치려고 할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율리에나!”
검을 휘두르는 와중에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그녀.
김현성은 막대한 기운이 담긴 율리에나의 검을 흘려낸다.
허공을 가르는 저주를 내리는 검.
사태를 파악하려고 자세히 그녀를 지켜봤을 때는 이미 김현성의 검이 그녀의 복부에 꽂힌 이후였다.
-게드… 릭
‘너무 쓰레기 같은데….’
지금까지도 쓰레기 짓을 많이 해왔다고 생각하지만 던전의 보스 몬스터에게 이런 감정을 느낀 것은 또 처음.
쓰러진 이후에 이쪽을 향해 손을 뻗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게드릭…….
천천히 흩어지는 그녀의 모습을 뒤로 멍하게 김현성을 바라보는 원정대원들이 시야에 비쳤다.
찜찜한 마음을 뒤로했을 때는 사방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운이 퍼져나갔다.
잠깐 움찔 하기는 했지만 머리가 맑아진다.
이후에는 던전 공략을 성공적으로 완료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영웅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영웅 등급 퀘스트-율리에나 처치(1/1)]
[보상으로 랜덤 스탯 포인트 4를 부여합니다.]
‘끝났어.’
조용히 숨을 헐떡거리며 반쯤 쓰러져 있는 녀석에게 모두가 달려간 것은 당연지사.
그 와중에도 굉장히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현성 씨 괜찮으십니까?”
“어… 어떻게 그렇게….”
“현성 씨!”
“아, 저는 괜찮습니다.”
처음에는 물론 김현성의 몸 상태를 확인하는 말이 대부분이었지만 계속해서 그 웅성거림이 커지기 시작했다.
“허….”
“말도… 안 돼….”
“난이도가 있었다고 생각은 했지만 조금 당황스럽군요.”
“아마 승급을 앞두고 있는 던전 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본래 등급에서 강등당했을 가능성도 있고요. 저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뭐라고 설명해야 될지 모르겠군요.”
“무슨 일이 됐든 길드에게는 복이 되겠네요.”
도무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도 잠시, 바닥에 꽂혀 있는 검을 보자 저들의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주를 내리는 검-전설 등급]
‘허….’
희미하지만 계속해서 주황색 빛이 번뜩이고 있다.
‘대박….’
어째서 김현성이 이 던전에 오고 싶어 했는지 알 것 같다.
‘이걸 위해서였나?’
전설 등급의 아이템.
아직까지 대륙 전체에서도 매우 적게 풀린 무구다.
확인되는 전설 등급의 아이템은 총 6개, 아마 실질적인 사용자가 몇 명 더 있겠지만 그래봤자 10개가 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는 전설 등급의 던전에서도 드랍되지 않을 확률이 크다는 무구가 난데없이 이곳에 떨어진 것이다.
이 던전에서 얻을 수 있는 사실을 김현성이 알고 있었다면 무리하게라도 나선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애초에 이 대륙에서 전설이라는 단어는 그 정도의 무게감을 가진다.
전설 등급의 던전, 전설 등급의 직업, 전설 등급의 아이템, 전설 등급의 퀘스트, 전설 등급의 레이드 몬스터.
대륙에 사는 누구나 머릿속으로 이것 중 하나라도 가지거나 발견하길 바란다. 갑작스레 이곳이 소란스러워진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소유권 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하지만.
주인은 정해져 있다.
아마 모두가 속으로 이 아이템을 가져가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바람 정도는 잡아주는 게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율리에나를 일 대 일로 쓰러뜨리실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아마 기영 씨가 없었다면 당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녀석 역시 스리슬쩍 자신의 역할이 컸다는 것을 어필하는 것을 보니 확실히 이 검이 탐나기는 하는 모양.
탐을 내는 것이 당연하다.
내가 좋은 연금 키트를 원하듯 녀석 역시 좋은 검을 원할 것이다.
누가 주인인지에 대해서는 굳이 시시비비를 가릴 필요도 없다.
어디까지나 율리에나를 잡은 것은 김현성, 물론 다른 사람들의 외적인 도움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녀와 대치한 것은 우리의 사랑스러운 회귀자다.
이상희 역시 자신이 지금 어떤 발언을 해야 하는지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 일단은 영웅 등급의 던전 저주받은 신단의 공략 완료를 선언하겠습니다. 이 주변을 정리하고 다른 아이템이나 타 길드의 시신이 없는지 탐색해 주세요. 3인 1조로 주변을 둘러보시고 특이사항을 발견하면 곧바로 보고해 주셨으면 합니다. 정산은 길드에 돌아간 이후에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가현 씨는 지금 곧장 길드로 돌아가 원정대의 상황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
“아직 말씀드리기는 이릅니다만 저주를 내리는 검의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대충 이해하고 계실 겁니다. 혹시라도… 이 저주를 내리는 검을….”
이상희가 말을 잇는 순간이었다.
우웅…….
“어?”
우웅!
‘뭐야.’
가만히 바닥에 꽂혀 있던 검이 저 혼자 천천히 공중으로 떠오른 것.
모두가 경계를 보내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난생 처음 보는 상황에 모두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을 때, 저주를 내리는 검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조금 이상했던 것은 적의가 느껴지지는 않았다는 것.
“주인 의식?”
누군가 중얼거린 목소리에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파악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희미한 빛을 내며 다가온 검이 계속해서 떨리는 소리를 내며 나를 바라보는 듯했다.
‘이게 뭐야…….’
무슨 일이 벌어지려고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을 지경.
‘이러지 마.’
우웅!
‘나 검사 아니야, 이 새끼야.’
굉장히 당황한 김현성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이게 아닌데… 슈바… 이거 아니야. 현성아, 믿어줘. 이러려고 한 게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