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
회귀자 사용설명서 101화
구태세력(2)
“무슨 이야기를 나누십니까?”
슬쩍 고개를 돌리니 보기 싫은 상판대기가 시야에 비쳤다.
이설호와 그를 따르는 똘마니들이었다.
“이상희 님은 아직도….”
“네. 지하에서 마스터와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다. 상심이 무척이나 크신 것 같더군요.”
“가족 같은 분이 돌아가셨으니 그럴 만할 겁니다. 마스터는 이상희 님께 특별한 사람이었으니까요. 물론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네. 사실 처음에 저도 잠을 설쳤습니다. 다른 분들이 모두 자리에 없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도 너무나도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그보다 황정연 님, 무사 생환하신 것을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다른 파티원에 대해서는… 참 유감입니다.”
꽤나 호의가 가득한 목소리.
물론 나에게 보내는 호의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2번 대의 파티장인 황정연에게 보내는 것이다.
원정을 떠나기 전에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부라리던 것이 거짓말 같다.
황정연도 갑작스러운 할배의 태세전환에 놀랐는지 눈이 조금 동그랗게 변하고 있다.
‘푸핫.’
당연히 웃음이 나오는 상황.
저 늙은이의 개수작이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우리가 돌아올 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정말로 이설호가 파란의 길드 마스터를 죽였는지 않았는지에 대한 여부와는 상관없다.
그는 일단 길드 마스터가 죽은 사실에 쾌재를 불렀으리라.
밖으로 나가 있었던 떨거지들만 돌아오지 않는다면 파란은 저 늙은이들의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로 지원군을 보내는 시기를 늦췄고 어물쩡거리며 시간을 끌어댔다.
그런 상황에서 갑작스레 원정대가 돌아온 것이다.
‘황당하겠지.’
내가 저들이라도 꼬리를 흔들었음이 틀림없다.
그나마 나에게 비비지 않으려는 것은 마지막 자존심이었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자존심을 챙기는 일이 웃기는 일.
다시 한번 황정연에게 이야기를 말을 거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정말 다행입니다.”
“아.”
“사실 지원군 편성이 많이 늦어 걱정하고 있었던 차였습니다. 갑작스레 길드 마스터도 돌아가시고… 이상희 님까지 잃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여기저기 도움을 청했지만 모두 여건이 되지 않더군요. 불안했지만… 이렇게 직접 뵈니 새삼 반갑습니다. 정말로… 정말 살아오게 돼서 다행입니다.”
심지어 눈시울이 붉어진 모습은 가관이었다.
진심이 아니었다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도 부럽지 않을 정도의 연기력이다.
방금 내가 한 이야기 때문에 생각이 많아진 황정연도 굳이 반갑지만은 않다는 표정이다. 조금은 입을 여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보였다.
‘반응을 볼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늦은 게 아니신지… 혹시나 무슨 다른 이유가 없었는지는 궁금합니다, 설호 씨.”
“무슨 뜻으로 말씀을 하시는 건지 알 수 없군요.”
“아뇨. 그냥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직 희라 누나가 도착하지 않은 붉은용병이야 그렇다고 쳐도 검은백조에서는 여력이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광장에만 나가도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이 수십인데… 부대를 편성하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단기간에 해내기에는 불가능하지만… 짧은 시간은 아니었으니까요.”
“그, 그건….”
“아아아. 뭐, 이미 지나간 이야기니까 여기까지만 하고 넘어간다고 쳐도… 흠…. 그것보다 길드 마스터께서 정확히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말한 그대로입니다. 3일 전에 조용히 숨을 거두셨습니다. 편하게 가신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지요.”
“조용히 돌아가셨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혹시 길드 내에서는 타살에 대한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으신 겁니까?”
“무슨 말을….”
“이것도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분명히 방금 전에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말은 돌아가셨을 당시에 길드 마스터의 방에 아무도 없었다는 소리가 아닙니까.”
“그… 렇습니다만.”
“반응을 보니 타살에 대한 가능성은 아예 생각도 않으신 모양이군요.”
자꾸만 비릿한 미소를 보내는 것도 잊지 않는 것이 당연.
누가 봐도 내가 지금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것이다.
그만큼 얄미운 표정을 짓고 있으니까.
‘네가 죽였지?’
미친 늙은이의 얼굴이 붉어진 것은 당연지사.
애초에 이설호의 성격은 다혈질이다. 이런 상황에서 화를 내지 않으면 꼰대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금 무슨 소리를!”
“아니, 또 왜 이렇게 흥분하고 그러십니까? 우리 존경하는 이설호 님.”
“네가 뭘 안다고 지껄여! 우리가 길드 마스터를 죽이기라도 했다는 말이냐! 어디서 그런 되도 않는 생각을!”
“이렇게 흥분하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이설호 님. 저는 길드원분들이 마스터를 살해했다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외부의 침입자가 있었는지에 대해서 물어본 것뿐이었는데… 이거 지나치게 흥분하신 것 같습니다. 도무지 이렇게 흥분하시는 이유를 알 수가 없군요. 풉.”
“네… 네놈이… 그래도….”
“아니면 뭔가 찔리는 게 있는 것은 아닌지?”
“감히 내게 그런 소리를 지껄여? 지금까지 파란을 지켜온 내게!”
“우리 이설호 씨가 몇 년이나 길드를 지켜왔든 저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아니 근데….”
“…….”
“보자보자 하니까 왜 이렇게 자꾸 반말을 하십니까? 이제는 같은 간부인데 말입니다. 충분히 할 수 있는 말 아닙니까?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사과를 해야 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뭘 믿고 계시기에 그렇게 큰소리를 치십니까아… 네에에에?”
“네가….”
“말 조심하셔야 합니다, 설호 씨. 길드 마스터가 죽으면 그걸로 끝입니까? 운명하셨습니다. 하면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무능한 것도 정도가 있지…. 기껏 사지로 들어가려고 한 걸 열외해 줬더니 집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게 무슨 간부라고… 지랄 똥을 싸고 자빠졌는지.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오네 거참….”
“…….”
“외부의 침입은 없었는지, 아니면 내부에 길드 마스터의 침실로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이 있었는지 파악하고 분류하는 게 먼저 아닙니까? 우리 설호 씨 열심히는 하는 것 같은데… 능력이 없으면 자리에서 내려올 생각을 해야지 아득 바득 붙어 있다고 사랑하는 길드에 도움이 되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뭐? 지원군 편성이 늦어서 어쩔 수 없었다? 사회에서는 그런 걸 보고 무능하다고 합니다. 그런 걸 변명이라고 하는 거예요. 어쩔 수 없었다고 하면, 아 예! 그랬습니까. 그것 참 아쉽습니다. 하고 받아줄 것 같았습니까? 이봐요. 알 만한 양반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
“있잖습니까. 여기는 학교가 아니에요. 못 했다면 못 했다고 죄송합니다 하고 끝나는 곳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파란을 지켜주신 기둥 여러분, 제가 만약에 윗대가리였으면 당신들은 전부 모가지였어요. 모가지.”
“네놈… 네놈이 감히!”
이설호의 손에서 마력이 응집되는 것은 순식간.
아마 정말로 나를 후려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사리분별 못 하는 늙은이는 아니니까.
그렇지만 일단은 자신의 화를 풀어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맞으면.’
꽤나 아플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연약한 연금술사였으니까.
정하얀의 깜짝 놀란 얼굴이 보였다. 순식간에 주문을 외우는 것이 보였지만 녀석의 주먹이 더 빠르게 이쪽으로 다가오는 상황.
그렇지만 굳이 피하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내게 마조히스트 감성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게다가 지금 건 맞아도 별로 의미가 없는 공격, 몸을 사리지 않는 이유는 굳이 피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왜?
“사랑스러운 율리에나? 흥분하지 않아도 돼.”
우우우웅….
늙은이의 목을 겨누고 있는 새로운 빽의 존재 때문이다.
‘뒷배가 있다는 건 좋네. 아주 좋아.’
“이… 이건….”
“아. 이번 던전행에서 우연하게 인연이 닿게 된 아이템입니다. 여러 기능이 있는 것 같더군요. 예를 들면 분노 조절 장애를 분노 조절 잘해로 바꿔주는 기능이라든가. 일단 손 좀 치워주시겠습니까, 이설호 님? 우리 율리에나가 조금 성격이 드셉니다.”
멍한 표정으로 천천히 손을 빼내는 이설호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물론 그와 동시에 나의 사랑스러운 율리에나 역시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
입술을 꽉 깨문 정하얀의 얼굴이 시야에 비친 것은 덤이다.
‘칼한테 질투하지 마….’
어째서 검을 질투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자신이 할 수 없었던 일을 율리에나가 해냈기 때문이리라.
결정적인 순간, 위협에서 나를 구출한 게 자신이 아니라는 자괴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럼 저도 약속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설호 씨.”
“…….”
“최소한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한 경위에 대해서라도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하세요. 마스터가 숨을 거두실 때 보안 상황은 어땠는지 길드에 출입한 사람들은 있는지 일반 길드원들은 어땠는지 말입니다. 아, 추가로 구조대 편성이 어떻게 늦어졌는지에 대한 경위서도 보내주셔야 합니다. 하는 꼴을 보니 조사를 해도 다시 하긴 해야겠지만… 최소한 뒤처리라도 해야 조금이라도 덜 무능해 보일 테니까요. 그게 다른 평길드원들이 보기에도 덜 부끄러운 장면이 아니겠습니까. 하얀아, 가자.”
“네… 네!”
그리 나쁘지는 않은 기분이다.
아니, 사실은 꽤나 통쾌할 정도.
허겁지겁 나를 따라오는 정하얀의 뒤로 보이는 늙은이들의 얼굴을 보니 괜스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무척이나 분해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만 있는 장소였다면 아마 그나마 괜찮았을 것이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소란에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온 평길드원이 많았다는 것이 문제.
체면을 중요시하는 저런 사람에게는 무척이나 충격적인 일인 게 당연할 터, 기다렸다는 듯이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봤어?”
“저… 무기… 뭐지?”
대부분이 감탄하거나 영감을 지탄하는 목소리들이다.
모든 게 잘 짜인 각본이다.
‘어떻게 나오려나.’
이쪽을 견제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 내가 뭔가 냄새를 맡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찔리는 게 있다면 조금 더 급히 움직일 것이고 아니라면 차분히 웅크릴지도 모른다.
뭐가 됐든 간에 저들이 정리될 거라는 건 이미 확정된 이야기.
이쪽은 조용한 호수에 돌을 던지기만 하면 된다.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을 때 정하얀이 살짝 질문을 던져왔다.
“오빠.”
“응?”
“그, 그런데 말이에요.”
“응.”
“그… 저 사람들이 길드 마스터를 죽인 게 맞다면 그… 알려주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뭘?”
“아까 전에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하셨잖아요.”
“아아아. 아니야. 오히려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단서가 있는 쪽에서 움직이는 게 더 편하거든.”
뭔가 이해를 못 하겠다는 얼굴.
그 천재 마법사가 어째서 이런 쪽으로는 이해력이 떨어지는지 알 수 없어 조금은 신기했다.
어쩌면 이해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부로 이런 태도를 취하고 있을 수도 있으리라.
뭐가 됐든 상관없다.
이쪽도 마침 심심하던 차였으니까.
“아마 조금씩 개인차가 있을 거야. 나는 이쪽 방법이 더 편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아….”
“인간이란 건 뭘 완벽하게 할 수 있는 동물이 아니야. 이설호가 얼마나 열심히 그때의 상황을 기술하든 간에….”
“네. 네.”
“분명히 잘못된 정보가 나올 거야. 무려 3일 전에 일어난 일인데 자기가 어떻게 기억할 수 있겠어? 만약에 주승준이 정말로 자연사한 거라 해도 상관없어. 털어보면 분명히 일치하지 않는 내용이 나올 테니까. 그걸 비집고 들어가서 꼬투리를 잡는 게 더 편하지. 반대로 우리 길드 마스터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고 생각해도 마찬가지야. 어차피 그날 있었던 보고서는 모두 거짓일 테니까.”
“아… 이해했어요. 그… 그러면 제대로 된 증거를….”
“사실 중요한 건 증거가 아니야.”
“네?”
“우리가 저쪽을 합리적으로 의심하고 있는가? 가 더 중요해.”
“…….”
“심증만 있으면 물증 같은 건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거든. 다수가 진짜라고 믿으면 그게 진짜가 되는 거야.”
순수하다면 순수하다고 할 수 있는 정하얀에게 너무 많은 소리를 한 게 아닌가, 살짝 후회한 것도 잠시.
뭔가 깨달을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정하얀을 보고서는 방금의 대화가 실수라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용의주도한 정하얀이 한 단계 성장하는 것은 아닐까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진화하는 건 아니겠지.’
분명 그러진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