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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02화 (101/1,590)

# 102

회귀자 사용설명서 102화

구태세력(3)

“다수가 진짜라고 믿으면… 그게 진짜가 되는 거야.”

‘중얼거리지 마….’

걷는 와중에도 암기하듯 중얼거리는 정하얀이 시야에 비쳤다.

무슨 일을 할지 벌써부터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아마도 큰일은 벌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직 던전에서의 일이 기억 속에 남아 있을 테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다.

기껏해야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가 연인이라는 사실을 몰래 알리는 것이 고작이리라.

내가 지금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지만 오랜만에 함께하는 데이트 같은 상황에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기면 옮길수록 정하얀의 표정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밖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할 때만 해도 분명 저런 표정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

아무 말 없이 내 소매를 잡고 최대한 발걸음을 늦추려고 하는 것을 보면 역시나 이런 면에서는 자기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내 소매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 게 눈에 보일 정도.

광장을 지나 주변에 있는 많은 잡화점들을 역시 지나치고 나니 커다란 규모의 길드 하우스가 한 눈에 들어왔다.

‘검은백조.’

자유 도시 린델을 대표하는 대형 길드 중의 하나, 검은백조 길드였다.

“아….”

역시나 금세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모습, 머리를 쓰다듬으며 살짝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할 일이 있어서 온 거야.”

“네….”

“데이트는 나중에도 시간이 있으니까. 지금은 바쁜 상황이라는 거 이해하고 있지?”

“네, 오빠.”

그래도 자신 몰래 이곳에 오지 않은 것은 기분이 좋은 모양. 물론 이지혜와 대화할 때는 정하얀을 데리고 갈 수는 없지만 같은 건물 안에 있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심리적으로 위안을 느낄 것이다.

‘방문한 적은 처음인가.’

검은백조와는 많은 접전을 가지고 있는 나였지만 실제로 내부를 구경하는 것은 처음이다.

살짝 발걸음을 옮기자 눈앞에 있는 문이 스르륵 열리는 것이 보였다.

‘마법?’

아마도 확실할 것이다.

파란보다 상태가 좋은 건 규모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주위를 둘러보기가 무섭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길드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기영 님 그리고… 정하얀 님.”

“아… 네.”

“제가 직접 안쪽으로 모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검은백조에 오신 것은 처음이신지요.”

“그렇습니다.”

“응접실로.”

살짝 고개를 끄덕이니 곧바로 분주해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작은 목소리로 이쪽을 안내해 주고 있는 안내인은 무척이나 차분했지만 표정 곳곳에 긴장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였다.

이쪽이 지나갈 때마다 사방에서 인사를 해오는 것은 물론, 어딘가 불편한 점이 있지 않을까 눈치를 보는 듯한 모습은 확실히 파란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귀빈 대우.

‘허.’

어째서 나와 정하얀에게 이렇게 극진한 대접을 하는지 대충은 알 수 있었지만, 솔직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혹시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 오는 길에 하고 왔습니다.”

“그럼 차를 준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무언가 불편하시다면….”

“바로 말씀드리도록 하지요. 그보다 지혜 씨는 안에 있습니까?”

“네. 이미 안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정하얀 님은 따로 안내를 해드려도 되겠는지요.”

“네.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하얀 님께서는 이쪽으로….”

“아… 네. 가, 감사합니다.”

당장 정하얀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다. 잠깐 동안 나에게 애원의 표정을 보내는 것도 잠시, 바로 옆방으로 간다는 걸 확인하고서는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안내인 한 명이 고개를 숙이며 방문을 여니 시야에 비치는 것은 단정한 옷을 입고 이쪽을 기다리고 있는 이지혜.

이쪽을 확인하자마자 슬그머니 입을 열어오는 게 보였다.

“그래도 같이 들어오지는 않았네요. 나 참, 하얀 씨까지 데리고 올 줄은 몰랐는데… 어떻게 여자 마음을 그렇게 모를 수가 있담?”

“이쪽도 이쪽 나름대로 사정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보다 오는 걸 미리 알고 있었나 봐?”

“네. 이미 몇 차례 보고도 받았고 파란에서의 일이 마무리되면 이쪽에 올 거라고 말해 뒀으니까요.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검은백조로 올 생각은 없는 거죠?”

“뭐, 미안하지만 그래.”

“이럴 줄 알았다니까.”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내자 곧바로 말을 잇는 것이 보였다.

“오빠랑 정하얀 그 여자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길드가 난리가 났었거든요. 현재 파란의 상황은 망해가기 일보 직전이라고 볼 수 있는 상황이고… 어디로 이적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요. 저랑 친분이 있다는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생각해 보면 검은백조로 이적할 가능성이 없지만은 않으니 지레 설레발 친 거죠, 뭐. 안내인들 바짝 긴장한 표정 봤죠?”

“사실 이 정도로 대우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대우받을 만해요. 한 명은 최고의 마법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천재고, 나머지 한 명은 정치와 연금술에 능한 것은 물론, 전설 등급의 아이템을 가지고 있는 인재니까요.”

‘개판이네.’

파란이 개판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내가 율리에나를 얻었다는 것을 이미 이지혜가 알고 있었다는 것은 파란에 있는 놈 중 한 명이 검은백조에 정보를 흘렸다는 소리일 터, 아무리 지금 파란이 망해가기 일보직전의 길드라고는 하지만 보안 상황이 이토록 형편없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제기랄.’

“그런 표정 하지 마세요, 오빠. 다음부터 조심하면 되니까. 솔직히 오빠라면 이적도 고려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래도 아득바득 파란에 남아 있겠다는 소리는 역시나 현성 씨 때문인 거네요.”

“반은 맞아.”

“저기요, 오빠.”

“왜.”

“이거 조금은 진지하게 물어보는 건데요.”

“응.”

“내가 김현성도 라이벌에 포함시켜야 할까?”

“…….”

“혹시나 정말로 제가 생각하는 게 맞다면 미리 말씀해 주셔야 해요. 아무리 오빠가 취향이라고 한들, 개인이 가지고 있는 성정체성을 뒤집을 자신은 없으니까요.”

“…….”

“농담.”

“그거 다행이네. 솔직히 지금 자리를 박차고 나갈 뻔했거든.”

“그냥 분위기가 너무 딱딱한 것 같아서 농담 한번 해봤어요. 이적하러 온 게 아니면 찾아온 이유는 뻔하겠네요?”

“맞아.”

“아마 만족하실 거예요. 그럼 일단 자료부터 받으시고… 그건 길드로 가서 천천히 검토해 보시면 되겠네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뒤가 구리지 않은 건 아니더라고요. 주제도 모르고 너무 나대는 건 아닌지 생각하기는 했는데 커넥션이 있는 곳이 확실히 있어요.”

“어디?”

“일본.”

“기대하지도 못했던 게 걸려들었네.”

“정확히 말하면 자유 도시 실리아에 있는 대형 길드 야마토예요.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구조대가 린델을 떠난 이후에 1차 접촉, 그 뒤로도 몇 번 이나 접촉했던 것 같았는데 저희가 확인한 건 3차례 정도. 물론 전부 확인할 수는 없었어요. 내용도 정확히는 알지 못하고… 그래도 찾아 놓은 게 있으니 보고서를 보시고 판단하시면 될 것 같네요. 어떻게 써먹을 지는 우리 오빠 재량이니까.”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이설호 같은 종류의 인간들은 보통 뒷배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으니까.

이미 자신들이 빠져나갈 구멍을 모두 마련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일을 벌인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면 구조대가 편성되기 전에 아득바득 가지 않으려고 애쓰던 모습도 이해가 된다.

“그림이 뻔하기는 하네. 스스로 활동할 수 없을 지경까지 망가진 파란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린델까지 영향력을 확대시킨다는 건가. 아니면 경제적 원조라고 봐도 되겠네. 늙은이는 그 대가로 꽤나 달콤한 것들을 많이 받아 처먹었을 테고….”

“아마 오빠가 생각하시는 게 맞을 거예요. 실리아랑은 교류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직접적으로 이곳에 뿌리를 내리는 게 더 편할 테니까요.”

물론 그렇게 심각한 상황이라고는 할 수 없다. 애초에 자유 도시 실리아와 자유 도시 린델은 동맹이라고 할 수 있는 관계였으니까.

두 도시 모두 신성제국 베니고어에서 관리하고 있는 도시, 당연하지만 전력 하락을 고려한 베니고어에서는 린델과 실리아와의 전투를 반가워하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면 종종 부딪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서로를 물어뜯는 앙숙은 아니라는 거다.

실제로 실리아와의 교역은 무척이나 활발해지고 있는 상황.

이런 배경을 생각해 보면 침략이나 침탈 같은 거창한 상황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이 정보는 써먹을 수 있다.

단순한 협력관계나 원조, 혹은 보호라고는 해도 입을 털기에 따라서는 조금 더 심각한 상황으로 포장할 수 있다.

“기껏해야 린델 안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러니까요. 생각보다 스케일이 더 큰 거죠. 욕심만 많아가지고 지금에서야 말하는 건데 이쪽을 보는 시선이 얼마나 소름끼쳤는지 알아요? 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았다고요. 오빠, 오빠 해주니까 얼마나 좋아하던지….”

“고생했겠네.”

“단순히 고생이라는 말로 끝나는 정도가 아니라니까. 앞에서는 온갖 아양을 떨어야 되고 뒤에 가서는 뭔 짓을 하는지 알아봐야 하고… 오빠 부탁 아니었으면 더러워서 안 했을 거예요. 정말로요.”

확실히 그녀가 얼마나 열심히 해줬는지 알 수 있었다.

당장 들고 있는 보고서의 두께만 봐도 눈치챌 수 있다.

대충 넘겨보기만 해도 빼곡하게 적혀 있는 정보들은 이설호를 제외한 다른 늙은이들의 일상에 대한 부분까지 서술하고 있었다.

파란에 이지혜 같은 인물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아마 지금 같은 상황으로는 치닫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라고 할 수 있지만 고마운 것이 당연하다.

슬그머니 눈을 맞춘 뒤에 천천히 입을 여니 평소답지 않게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고마워, 누나.”

“…….”

황급하게 말을 돌리는 것은 물론 이지혜답지 않았다.

“뭐, 별거 아니에요. 그리고 지원군 편성 부분에서도 확실히 문제가 있기는 있었어요. 검은백조에 원조 요청이 들어온 것도 원정대가 길을 떠나고 이틀이 지나서야 정식으로 이루어졌죠. 계속해서 준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던 것도 그쪽이었어요. 뭐,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겠지만 열심히 하지 않았던 것만은 확실해요.”

“으으음….”

“광장에도 많이 돌아다니기는 했어요. 실속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물어본다면 고개를 젓겠지만 일단 액션은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 보였죠. 만약에 정말로 지원군 편성이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늦어진 거였다면 그 인간들이 무능의 끝을 달리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네요.”

“관련 내용도 전부 적혀 있는 거지?”

“물론이죠.”

“길드 마스터 쪽은 조금 어떤 것 같아?”

“아아. 역시 오빠도 타살 쪽으로 생각하시고 계시는구나.”

“보통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으니까.”

“글쎄요.”

“흐음… 뭘 따로 발견하지 못한 거야?”

“제가 어떻게 발견할 수 있겠어요. 저는 엄연히 외부인인데. 노력해 보지 않은 건 아닌데… 깨끗해요.”

“음….”

“정말로 깨끗. 그때 당시에 파란에 들어간 인원들이나 이설호의 행적을 봐도 트집 잡을 게 없다니까요. 어쩌면 정말로 자연사일 확률도 생각해 봐야 될 정도로 말이에요. 어차피 파란의 길드 마스터야 오늘 내일 하던 사람이라고 들었으니까 자연사해도 이상하지 않기도 하고… 타이밍이 조금 귀신같기는 하지만, 가능성은 열어둬야 해요.”

“끄응.”

실제로 자연사했을 가능성을 떠올리자 조금 머리가 아파왔다.

어차피 뭐가 됐든 이쪽이 일을 꾸며야 하는 것은 변함없다.

그래도 이설호가 실제로 길드 마스터를 죽였다고 가정하는 게 조금 더 편한 것은 당연지사.

물론 지금까지 얻은 정보로도 충분히 이설호를 조질 수 있지만 더욱더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한방이 길드 마스터였고….’

아쉽지만 증거야 만들면 그만, 슬쩍 이지혜를 바라보자 조용히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이 들어왔다.

마치 칭찬해 달라는 것만 같은 표정을 본 순간, 이지혜가 무슨 안배를 해놨는지 깨닫는 것은 순식간.

내가 입을 떼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어왔다.

“이게 뭘까요?”

손 안에 든 것은 아주 작은 물약.

“아주 어렵게 구한 물약이에요. 독은 아니랍니다. 오히려 신경안정제라고 볼 수 있겠네요. 조금은 복합적이라 제가 전부 알지는 못했지만 어떤 종류의 환자에게는 꽤나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확인해 봐도 되지?”

“아. 이쪽은 전문분야였죠.”

이지혜에게 물약을 건네받은 이후에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하니 그녀의 말 그대로라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푸핫.”

“이설호의 그 아저씨가 매일 입고 다니는 옷에 조금 발라뒀어요. 구하고 있었던 증거로는 어때요? 시간이 없어서 준비한 건 이것뿐인데….”

“아냐. 충분해, 누나”

“그것 참 다행이네요, 오빠.”

어떻게 이렇게 가려운 곳을 제대로 긁어줄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마치 이쪽의 생각을 전부 꿰뚫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조금이지만 소름이 끼칠 지경.

‘개 유능해.’

어째서 자꾸만 상태창이 이지혜와 나를 영혼의 단짝이라고 부르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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