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
회귀자 사용설명서 108화
나는 너를 기억할 것이다(2)
“잘 뒤졌지. 이런 천벌 받은 놈들….”
“죽어 마땅한 놈들 아니었나.”
“이곳에서 살아오면서 쓰레기 같은 놈들을 많이 봐오기는 했지만 이런 쓰레기는 또 처음이라니까. 도시 한복판에서 테러를 일으킨 것도 신입 길드원을 죽이기 위해서였다고 하는데… 죄 없이 휘말린 사람들도 불쌍하지만 이 길드원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그건 알고 있나? 이 습격당한 길드원이 그, 용병여왕의 정부라는 소리가 있던데… 붉은용병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한테 들었는데 길드 분위기가 말이 아니라고….”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되는 거 아닌가. 아! 저기 오는구만… 어이, 김씨! 오늘 올라온 신문 읽었어?”
“거, 파란에 있는 친일파 자식이 뒈졌다는 소식이라면 당연히 읽었지. 덕분에 어젯밤에는 팔다리 쭉 뻗고 잘 수 있었다니까.”
“자네 가게는 괜찮나?”
“물론, 보험금 말고도 파란에서 따로 보상금까지 챙겨줘서 복구하는 데는 별 무리가 없을 것 같다네…. 사실 파란에서 이렇게까지 해줄 필요는 없었는데… 나 같은 사람이야 뭐 고맙게 넙죽넙죽 잘 받아먹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미안했다는 거 아닌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대충 던져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보상금이 두둑하기도 하고 새로운 가게 차리는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푸하하핫.”
“이 친구 얼굴에 웃음꽃 핀 거 보게. 한턱 쏴야 되는 거 아닌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귓가에 꽂혀왔다.
뭐, 내용이야 이설호를 욕하는 내용이나 파란을 걱정하는 내용들이 대부분.
사실 도시의 수복 비용이 가장 큰 문제였다.
언론이 확대됨에 따라 이미지를 챙기는 수많은 길드와 클랜의 기부가 없었더라면 파란이 혼자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 분명.
검은백조와 붉은용병에게는 다시 한번 빚을 졌다.
광장을 돌아다니며 아직까지 온전한 건물을 바라보니 여기저기에서 자극적인 신문 타이틀이 시야에 비쳤다.
[파란의 배신자 이설호, 실리아 근처 라마델 산맥에서 숨진 채 발견.]
[어째서 그는 그런 선택을 했는가-김성경의 썰전]
[이설호가 내통하고 있었던 일본의 길드. 자유 도시 실리아와 린델의 관계의 향후 관계에 끼칠 영향에 대해]
모든 게 예상했던 대로였다.
검은백조의 국민비호감 사건 이후로 조금은 심심했던 린델을 한바탕 뒤집어 놓은 사건이었으니 린델 내의 모든 언론사가 이 사건에 군침을 흘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린델 전체가 떠들썩해졌고 주점이나 광장에서 이번 사건에 대해 의견을 쏟아내는 이들이 무척이나 많아졌다.
현재 린델에서 이뤄지는 대화의 90퍼센트를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느낌. 대형 길드에 속해 있는 길드원이나 간부나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는 일반 모험가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길을 걸어가며 살짝 눈을 돌리자 손에 쥔 신문이 들어왔다.
[커다란 시련에 놓인 파란의 향후 행보는?]
[도시 내 테러사건이 일어난 이후에 탈출했던 범죄자들을 추적한 지 수일 째, 붉은용병의 수색대가 라마델 산맥 근처에서 수십 구의 시신을 발견했다. 시신의 정체는 범죄자 이설호와 그를 따랐었던 파란의 간부들로 추정.
정확한 감식 결과 파란에서는 그들이 이설호를 비롯한 간부들이라는 판단을 내려, 오는 15일 공식적인 수색 작업이 종료됐다.
시신은 무척이나 심하게 훼손되어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던 걸로 보아 전문 고문 기술자에게 모진 고문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붉은용병의 관계자는 이들을 죽인 범인으로 일본 길드를 지목. 이유로는 증거의 인멸 혹은 일이 틀어진 것에 대한 단순한 화풀이라는 입장의 소견을 내놓았다.
파란의 부길드 마스터 이상희가 아직까지 공식석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가운데, 린델 내 귀추가 파란에 주목되고 있다.
한때는 자유 도시 린델을 대표하는 길드 중의 하나였던 파란은 길드 마스터 주승준과 많은 파티를 잃어 재기가 불가능해 보인다.
아직까지는 붉은용병과 검은백조와의 동맹관계가 원활하게 유지되어 있기는 하지만 많은 중견 길드에서도 파란의 파티에게 많은 러브콜을 하고 있는 상황.
파란의 간부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에 대해서도 린델의 많은 스카우터들이 주목하고 있다.
많은 전문가들이 이대로 파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지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는 가운데 용병여왕 차희라(28)는 붉은용병은 어디까지나 파란의 우방이며 어떤 선택을 하든 최선을 다해 도울 거라 발언했고 검은백조의 대변인 이지혜 역시 파란은 다시 일어설 거라며 여러 가지 떠돌아다니고 있는 소문을 일축시켰다.
수많은 상처를 입은 파란이 앞으로는 어떤 행보를 보일지에 대해서는 본 기자 역시 정확히 판단을 할 수 없지만 그동안 파란이 보여줬던 모습을 생각해 본다면 이번의 위기 역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린델일보 김성경 기자]
‘나쁘지 않네.’
잘 정리된 기사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파란의 긍정적인 입장을 취해주고 있다는 것, 물론 언론사의 입장에서는 이럴 수밖에 없겠지만 스물스물 침몰하는 배에서 내리려고 하는 다른 언론사들의 비해 이 린델일보는 꽤나 믿음직스럽다.
‘김성경이라는 놈도 그렇고….’
항상 이쪽에 우호적인 기사를 써주는 것을 보니 한번 탄 노선을 바꾸고 싶지는 않은 모양.
단순히 감이 좋은 건지 아니면 의리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후에 조금이라도 챙겨주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혼자 고개를 끄덕였을 때 들려오는 것은 어젯밤 하루 종일 들었던 목소리, 선희영이었다.
“뭘 읽고 계신가요.”
“기사입니다. 아무래도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걷다 보니 잠이 쏟아져서 말입니다. 희영 씨는 별로 피곤하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오히려 조금 상쾌해요. 오랜만에 신께 봉사하는 시간을 가졌으니까요. 이곳에서 지내시는 시민 여러분들의 반응만 봐도 저희가 함께 한 일이 얼마나 뿌듯한 시간이었는지 알 것 같아서 기분이 좋네요.”
“제가 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사실 수고는 희영 씨가 전부 해주셨는데요.”
“많은 준비를 해주셨잖아요. 함께 있어 주시기도 했고… 사실 혼자였다면 이렇게까지 열심히 못 했을 거예요.”
‘그건 아니지.’
사실 내가 함께 있는지에 대한 여부는 별로 상관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최근 조금 잠잠해지기는 했지만 확실히 우리 사제님께서는 봉사하는 시간이 가장 보람차게 느껴진 모양.
특히나 이설호에 대한 건수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만족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처음부터 그 할아버지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던 것 같기는 했지만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분노를 보내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예상하고 있던 것보다 쌓인 게 더 많았던 것이다.
‘나태한 생각, 나태한 정신, 당신은 사회의 악입니다. 빈민촌의 부랑자만큼이나 쓸모없는 인간이에요. 당신들이 이 사회를 좀먹고 있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계속해서 생기는 겁니다. 회개하세요. 물론 제가 원하는 것은 말뿐인 회개가 아닙니다.’
‘아아아아아악!’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 솔직히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눈을 끝까지 돌리지 않았던 것을 스스로 칭찬하고 싶었을 정도.
헛구역질이 나올 뻔하기는 했지만 올라오려고 하는 것을 억지로 집어넣은 이후에 선희영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때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네?”
“함께 아름다운 린델을 만들어 가자는 말씀을 해주셨잖아요.”
“네. 그랬었죠.”
“물론 당시에는 불안하기는 했지만 확실히 이렇게 결과가 나오니 조금은 기쁘네요. 오랜만에 함께하기도 했고… 아무튼 기분이 좋은 날이에요.”
누가 봐도 사제처럼 행동하는 선희영의 모습.
뭔가 점점 더 가까이 붙는 것 같은 느낌.
계획적이라기보다는 마음의 거리가 가까워졌기 때문에 보이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리라.
‘너까지 이러지 마.’
선희영과는 함께 일하는 동료의 포지션이 가장 잘 어울린다.
안 그래도 주변에 있는 여자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물론 선희영의 마음도 이해가 가긴 한다. 나는 그녀의 유일한 아군이었고 새로운 곳에 눈을 뜨게 해준 최초이자 최고의 동료였으니까.
물론 아직까지는 연애 감정이라고 할 정도의 감정을 품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선희영까지 깊게 연관이 된다면 일상이 더욱더 피곤해질 것이다.
정하얀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걸 보여준다고 한들, 어차피 이곳은 일처다부나 일부다처가 당연시 되는 세계.
지금 당장 주위를 둘러봐도 남자 하나에 여자 여럿, 여자 하나에 남자 여럿이 함께 다니는 게 눈에 보인다.
지구처럼 손가락질 당할 일은 아니라는 거다.
애인이나 부인이 있다고 해도 지레 포기하는 상황을 찾는 게 오히려 드물다. 만약 선희영이 이쪽과 가까워지고 싶다는 마음을 먹는다면 정하얀이나 차희라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사전에 차단해야 해.’
적당한 선을 유지하면서 말이다.
“아, 잠깐 식사라도 하시고 들어가는 게 어떠세요? 오랜만에 밖으로 나왔는데 아침이라도….”
“아, 그렇게 하도록 하죠.”
물론 이 적당한 선을 유지한다는 건 조금은 힘들다.
식사를 같이하는 것 정도는 상관없으리라.
테라스가 있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가 적당히 자리를 잡은 이후에 주문을 하니 곧바로 선희영이 입을 열어왔다.
“어제는 조금 어떠셨어요? 기영 씨?”
“보람찬 시간이었습니다. 어디까지나 봉사였으니까요.”
“네. 그렇죠. 봉사였죠. 후훗. 정말 보람찬 시간이었어요. 역시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좋네요.”
“네. 그렇죠.”
“매일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었지만 기영 씨에게는 정말로 감사한 마음밖에는 없네요. 표현 방식은 조금 거칠기는 했지만 제가 잘못되어 있었다는 걸 깨닫게 해주셨으니까요.”
“하하….”
이런 흐름은 별로 좋지 않다. 황급하게 말을 돌리는 게 올바른 판단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러고 보니 하얀이의 상태는 조금 어떻습니까?”
“아직 회복하고 있는 단계예요. 일단 몸은 전부 회복된 거나 마찬가지예요. 붉은용병 내에 계시는 사제님들께서도 힘써주시고 계시니까요. 지금까지 정신을 못 차리는 건, 어디까지나 몸의 피로 때문이니까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렇군요. 그것 참 다행입니다.”
“아. 혹시 기영 씨는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네?”
“계속해서 파란에 남아 있으실 건지를 여쭌 거예요. 요즘 통 길드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것 같아서….”
“아.”
선희영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은 느낌.
확실히 최근에는 파란에 그다지 신경 쓰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안 했다고 하는 편이 어울리리라.
파란은 내부적으로도 외부적으로도 무척 흔들리고 있는 상태.
사실 파란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지금 같은 타이밍이 가장 알 맞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내가 파란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이유는 김현성 때문이다.
‘권력은 한곳에 집중되는 게 편하니까.’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상차림을 차려준 이후에 맛있게 먹으라고 숟가락까지 올려준 상태.
이상희는 거의 리타이어나 다름없고 황정연은 애초에 권력구도 따위에 관심도 없다.
새로운 권력의 중추로 김현성이 우뚝 서는 것은 이미 정해진 수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물론 김현성이 들어온 시기를 생각했을 때 길드 마스터가 아닌 섭정으로 잠깐 동안 길드를 운영하는 것이 전부겠지만 녀석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생각해 보면 아마 여러 사람이 믿음과 호응을 보내고 있으리라.
지금 당장은 내가 파란에 손을 뻗는다고 해도 역효과가 날 수도 있는 상황.
어차피 김현성이 권력을 얻는다면 1등 공신이라고 할 수 있는 나에게 무척이나 많은 콩고물이 떨어질 것이다.
‘굳이 앞서서 챙겨달라고 추한 모습 보일 필요는 없으니까.’
오히려 한발 물러난 상태에서 상대의 애를 태우는 게 더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김현성 왕국에 꼭 필요한 인재니까.
“최근에 조금 바빠서 말입니다. 현성 씨가 이상희 님과 항상 함께 있기도 하고 길드가 위기라고는 하지만 저는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아.”
“오히려 썩은 물을 모두 걷어낸 지금이야말로 제대로 된 집단을 만들 수 있는 기회니까요.”
“아아! 그, 그렇군요. 아… 역시 기영 씨네요. 저는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었는데….”
“하하하….”
“그럼 쉬는 건 조금 미뤄야겠네요. 사, 사실 이런 말씀을 드리긴 부끄럽지만 기영 씨와 함께 봉사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는 건 아닌가 하는 기대도 잠깐 했었거든요. 아! 오, 오해는 마세요. 연애 감정이 아니라… 같은 취미를… 매일 함께… 그 뭐랄까….”
“아아…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 것 같습니다.”
왠지 모르게 붉어진 얼굴.
‘아….’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 건지 눈에 보인다.
아마 둘이 함께 봉사의 집이라도 만들어 그곳에서 생활하며 봉사를 위한 삶을 살아가는 걸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달갑지 않은데….’
만약 그런 집이 완성된다면 사랑의 집이 아니라 공포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집일 것이다.
선희영은 삐뚤어진 생각을 가지고 있을 뿐 삐뚤어진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를 감금해 영원히 함께한다는 정하얀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고방식.
어디까지나 신을 위해 일하는 사제인 만큼 그런 독특한 발상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정상인 건 아니지만….’
“물론 희영 씨가 생각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지만 일단 다른 중요한 문제도 있으니 말입니다. 아마 현성 씨가 어수선한 내부를 잘 정리해 주실 겁니다. 저도 조금은 힘들게 뛰어오기도 했고 어제는 큰 건수를 해결했으니까요. 스스로에게 주는 보상이라고 하는 편이 잘 어울릴 것 같군요.”
“간단하게 말하면 휴식을 취하신다는 거네요. 후훗. 덕분에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져서 좋네요. 아! 물, 물론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에요.”
“네. 이해하고 있습니다.”
당연하지만 사랑과 정, 봉사 정신이 넘치는 선희영 하우스에서 함께 지낼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일단은 김현성이 그리고 있는 그림이 어떤 건지가 가장 커다란 문제.
정치에는 조금 약한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김현성은 김현성이다.
계속해서 이상희와 함께 붙어다니며 그녀를 케어하고 위로해 주는 모습도 매일 보여주고 있는 걸 보면 녀석 역시 나름대로의 생각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은근히 음흉하단 말이야.’
나였어도 이상희의 호감을 사는 것을 첫 번째 과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큰 걸 해줬다고는 볼 수 없지만 이렇게까지 그림을 그려줬는데도 점을 찍지 못한다면 회귀자 자격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
아마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성과들을 가져올 수 있으리라.
‘우리 현성이는 뭘 하고 있을까.’
예전 이지혜의 농담이 농담처럼 생각나 움찔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우리 사랑스러운 김현성의 머릿속은 조금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