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
회귀자 사용설명서 109화
과거 회상(1)
“혜진 씨, 갑작스럽게….”
“마스터, 정하얀 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사인은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추측하기에는 자, 자살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네? 그게 무슨….”
“믿기 힘드시겠지만 사실입니다.”
“분명히 뭔가 잘못 알….”
“…….”
“정말로 죽었군요.”
“네. 오늘 아침 방에서 목을 매달고 계신 채 죽어 있는 걸 마도 길드의 길드원들이 확인했습니다.”
“혹, 혹시 타살은 아닙니까? 암살자들이 들어왔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닙니다. 틀림없이 자살입니다. 유서도 발견되었고 그… 이것도 확실하지는 않지만… 정하얀 님의 방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편지들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마법적인 처리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해독하진 못하고 있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소식이 들려온 이후 타 길드에서는 혹시나 그들과 내통하고 있는가에 대한 가능성에 대해서 떠올리고 있습니다.”
“내통이라고 말씀하신 게 맞습니까?”
“단순한 추측일 뿐입니다.”
“그건 아닐 겁니다. 린델의 천재 마법사가 지금까지 보여준 업적을 생각해 보면 그럴 가능성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그들과 결탁할 수 있었다면 이미 한참 전부터 그들 편에 서 있었을 겁니다.”
“마스터의 말이 맞습니다, 혜진 씨. 린델의 천재 마법사가 없었다면 애초에 전선 자체가 유지되어 있지 않았을 겁니다. 그녀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라마델 산맥 전투와 북부 프로스트 월 전투, 심지어는 베니고어 방어전을 승리로 이끈 것도 모두 정하얀 님이 있었던 덕분입니다. 내통은 아마 잘못된 정보일 겁니다. 어쩌면 저희를 분열시키려는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닐지….”
“…….”
“혜진 씨, 유서는… 유서에는 뭐라고 적혀 있었습니까.”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라고 적혀 있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물론 마도 길드에서 공개하기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전문은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만… 몸에 가혹행위를 당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암살당한 것이 아닌 게 확실합니까?”
“네. 몸에 남아 있는 상처는 훨씬 이전부터 나 있는 상처라고 들었습니다. 치료를 받지 않아 곪아 터지기 직전의 상처도 있었던 걸로 봤을 때는 혹시 자해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습니다. 포션이나 신성력으로 치료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상처를 남겨놓은 것은 물론 심지어는 차마 말할 수 없는 부분까지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자해….”
“네. 정말로 자해를 했을 가능성도 있었을 겁니다, 마스터. 평소에도 정하얀 님께서는 생명을 뺏는 일에 무척이나 힘들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전투가 끝난 뒤에는 항상 악몽을 꾸셨고 실제로도 전투에 참가하는 것을 무척이나 꺼려하셨으니까요. 개미 한 마리도 죽이기 싫어하시던 분이 어느 날 갑자기 전장에 서게 되셨으니 죄책감을 느끼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린델의 대마법사, 정하얀의 성품을 생각해 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전장에 서는 것 자체가….’
무리였던 것이다.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면… 전적으로 제 잘못이 맞군요. 그녀를 전쟁터로 부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건 아닙니다. 마스터의 탓이 아니에요. 정하얀 님을 설득하신 건 마스터뿐만이 아닙니다. 신성제국과 공화국, 왕국 연합에 있는 모든 이들이 정하얀 님이 움직여 주시길 바라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에 결단을 내리신 것 역시 정하얀 님입니다. 마스터의 설득으로 움직여주신 게 아닙니다. 정하얀 님께서도 신성제국과 린델에 있는 자유민에게 항상 빚을 지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도망쳐 숨으려고 하셨다면 아무도 찾지 못했을 겁니다. 정하얀 님 역시 그 나름의 이유로 이 전쟁터에 합류하신 겁니다.”
“…….”
“아직 스스로 목숨을 끊으신 이유 역시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상황입니다. 마스터, 죄책감을 느꼈다는 것은 아마 사실이겠지만 저는 그분께서 그 때문에 목숨을 끊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고통스러워하신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만큼 자신이 지켜낸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계셨으니까요. 제가 처음에 만났던 정하얀 씨 역시 분명히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 본 적이 있는 장면이다.
사람과 제대로 어울리지 못하는 그녀가 전투가 끝난 뒤에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자신이 목숨을 구한 병사들과 악수를 나누는 장면은 틀림없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리고 함께 나눴던 대화도.
‘보람 있네요.’
‘힘든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아니에요, 현성 씨. 무, 물론 힘들지 않은 건 아니지만 모두가 싸우고 있으니까요. 그… 그리고 기분이 나쁜 것만도 아니니까요. 다들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까 기분이 좋네요. 헤헤…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감사할 뿐입니다.’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그렇지만 조혜진의 말대로 정하얀은 그것이 자신이 감내해야 할 고통임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이제 와 죄책감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고 하기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아직 이유를 파악하고 있는 중입니다. 마법으로 암호화되어 있는 편지에 단서가 있을 것이라 추측, 대륙의 모든 마법사가 계속해서 암호화된 물건을 해석하려 애를 쓰고 있기는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그렇군요.”
조금은 씁쓸한 표정으로 조혜진을 바라보던 바로 그때였다.
콰앙!
어디에선가 들려온 폭음, 적이 온 것은 아닌가 의심하던 것도 잠시.
이윽고 들려온 목소리에는 들고 있는 검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김현성!”
“김아영 님! 이러시면….”
“닥치고 문 열어. 김현성 여기에 있는 거 아니까 문 열라고!”
“일단은 진정하시고… 지, 지금은 회의 중이십니다.”
“좋은 말하기 전에 문 여는 게 좋을 거야. 인내심이 바닥을 기려고 하고 있거든.”
다시 한번 들려온 요란한 소리가 지난 이후에 시야에 비친 것은 무척 익숙한 얼굴이었다.
“아영 씨.”
“김현성, 이 개자식!”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온 거대한 검이 점점 더 가까워지기 시작.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올리자 다시 한번 요란한 소리와 함께 파공성이 울려 퍼졌다.
순식간에 주변에 물건이 사방으로 날아갔고 압력을 버티지 못한 창문이 깨져나간다.
“이 개자식! 네가 언니를 죽였어.”
“…….”
“네가 언니를 전쟁에 끌어 들인 거야. 이 쓰레기 같은 새끼! 너 때문에 언니가 죽은 거라고!”
“…….”
“아영 님…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지금은 전시입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이곳으로 들어와서 저희 길드 마스터에게 검을 겨누다니요! 이 일은 정식으로 길드에 항의하겠습니다.”
“그 입 다물어, 조혜진. 아무리 너라고 해도 그 이상 입을 놀리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항의? 할 거면 해봐. 어차피 지금 이런 상황에서 항의가 무슨 의미가 있는데? 마음대로 해보라고… 어차피 전부 뒈지게 생겼는데 뭐? 그딴 건 엿이나 먹으라 해!”
“그렇지만….”
“내가 분명히 이야기했지, 김현성? 언니는 전쟁에 참가하지 않을 거라고… 네 그 알량한 욕심 때문에 언니가 죽은 거야.”
“정하얀 님이 전선에 서지 않으셨더라면 수많은 민간인이 죽었을 겁니다. 김아영 님.”
“입 다물라는 내 말 안 들려? 난 김현성에게 묻고 있는 거야.”
“어쩔 수 없는 판단이었습니다. 물론 저희 마스터께서 정하얀 님을 설득하시기는 했지만 실제로도 정하얀 님이 계셨기 때문에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그 수많은 전투 때문에 언니가 죽었어. 언니가 죽었다고! 처음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야 했어.”
“아직 정확히 스스로 목숨을 끊으신 이유에 대해서 나온 것이 없습니다. 전투의 충격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 역시 아직 확정된 사안은 아닙니다. 유서나 밀봉된 편지를 정확히 확인해야 합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기에는 이미 너무 많이 왔어. 이 더러운 위선자들아. 그 사람 말을 새겨들었어야 했어.”
“그 사람이 누구….”
“네가 알 필요는 없잖아!”
“죄송합니다.”
“뚫린 입이라고 죄송하다는 소리가 나오나 보네 응? 김현성 이 개자식… 영웅? 웃기지 말라고 그래.”
“그렇지만 조금만 더 차분히 생각을….”
“입 닥쳐. 우리 길드는 이 엿 같은 동맹에서 나간다. 애초에 서로 싸우던 놈들이 하나가 된다는 소리도 어처구니없는 소리였어. 공화국과 왕국연합의 개자식들이랑 손을 잡는 것부터가 무리였다고. 내가 네 말을 듣는다는 것부터가 웃기지도 않을 코미디였고. 수십만 명을 살린 영웅 김현성은 개뿔. 그게 다 무슨 상관이야? 언니가 죽었는데… 언니가 죽었다고! 몇 명이 언니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든 간에 나랑은 하등 상관없는 이야기야. 알아들어?”
“…….”
“앞으로는 볼 일 없을 거야.”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김아영 님.”
“조혜진.”
“정하얀 님께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신 이유는 죄책감 때문이 아닐 겁니다.”
“개소리 하지 마.”
“만약에 그렇다고 한들, 김아영 님께서 이러시는 것은 바라지 않으실 겁니다. 분명 많이 괴로워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저는 자신이 구하신 이들을 두고 기뻐하셨던 정하얀 님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
“아직 정확한 유서의 내용이 나오지도 않은 상황입니다. 실제로도 암살에 대한 가능성도 전부 파악하지 않고 있고요. 어쩌면 밀봉된 편지나 유서에 단서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모든 조사가 끝난 이후에 정하얀 님의 죽음이 저희와 관련된 것이 밝혀진다면.”
“…….”
“제 죽음으로 이번 일에 대해 사죄하겠습니다.”
“난 네 목숨 따위 관심 없어.”
김아영이 뭘 원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는 것이 이상한 상황.
천천히 그녀를 마주보며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일이 끝난 이후에 죽음으로 사죄하겠습니다.”
“마스터는!”
“이게 맞습니다, 혜진 씨. 분명히 저에게도 책임이 있을 겁니다. 어차피 이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제 나름대로 마침표를 찍으려고 했으니까요.”
살아 있을 자격이라는 게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미 이곳까지 오는 도중에 수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사실 지금에 와서 사죄한다고 설치는 것도 웃기는 일. 그렇지만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
아직까지 할 일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눈앞에 있는 김아영의 표정이 복잡해 보인 것은 당연지사. 아마 그녀 역시 생각이 많을 것이다.
계속해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던 바로 그때였다.
쾅!!!
어디에선가 들려온 굉음.
그밖에도 울려 퍼지는 거대한 소리에 실제로 그들이 이곳을 침범했다는 사실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뭐?”
“적습이다!”
“마스터!”
“적습입니다! 조혜진 님, 현재 성벽의 뒤로… 아아아아악!”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것은 익숙하지만 이질적인 마력이다. 정확히 김아영을 향해 쏟아지는 정체불명의 기운에 몸을 움직인 것은 당연지사.
검을 가로로 들어 막아내자 갈라진 마력이 양 옆의 벽을 완전히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성벽으로 향하겠습니다.”
“나, 나는 아직!”
“일단은 힘을 모아야 합니다. 모든 일이 끝난 이후 제 처우는 아영 씨에게 맡기겠습니다. 지금은 부디 힘을 빌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제기랄.”
“혜진 씨, 차희라 님은 아직 도시 내에 있습니까?”
“네. 12시 방향으로부터 계속해서 증원 신호가 오고 있습니다. 아마 붉은용병 역시 그쪽으로 향했….”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린델을 집어삼킨 새하얀 빛.
어딘가에서 터져 나온 그 빛이 주변을 가득 메움과 동시에 감겨져 있던 눈이 떠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