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112화 (111/1,590)

# 112

회귀자 사용설명서 112화

어서 일해라!(2)

세종과 황희 정승에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황희가 열 차례 넘게 사직하기를 청했지만 세종이 결국 윤허하지 않아 죽기 직전까지 일을 해야 했다는 이야기다.

건강의 문제로 사직을 요청하면 자택 근무를 시켰고, 노쇠해 움직일 수 없다 사직을 청하면 가마를 보내 직접 궁으로 불러들였다.

심지어 서류 업무는 누워서라도 처리하라고 관료들을 황희의 집으로 보내기까지 했으니 정말로 죽기 직전까지 일을 했던 셈이다.

‘시바….’

나 역시 비슷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는 상황.

김현성이 나를 제대로 갈아 벌이려 작정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만약 김현성 왕국이 커지게 됨으로써 김현성이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면 그 이름 옆에 내 이름도 함께 언급될 것이 분명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일만 하다 과로사한 멍청한 놈으로 말이다.

물론 받은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여러 비리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황희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얻을 수 있었다.

‘힘.’

당연하지만 길드 내에서 이기영이라는 인간의 위치가 이전과 완벽하게 뒤바뀌었다.

물론 이전에도 결코 낮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누구 봐도 지금의 나는 파란의 실질적인 힘을 휘두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 힘을 휘두를 시간이 없다는 게 문제지만….’

현재의 파란은 거의 모든 일에 내 손을 거치면서 돌아간다.

물론 지금까지 맡고 있는 직책 중, 임시라는 단어를 붙이고 있는 직책이 많다는 것을 고려해 봤을 때 이후에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일단은 내가 파란의 행정 시스템을 전부다 꿰고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한 의미로 다가온다.

전반적인 모든 제반사항을 꿰뚫어 볼 수 있다는 것.

김현성이 나를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길드 마스터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다 보니 다른 길드원들이 설설 기는 것도 당연지사.

안 그래도 무게감 있는 내 직함이 날개를 단 격이었다.

두 번째는 금화다.

파란은 블랙 기업이 아니라 일한 만큼 보상해주는 따뜻한 길드라는 것을 홍보하기라도 하듯, 나는 길드 내에서 가장 많은 연봉을 받는 사람이 됐다.

심지어는 길드 마스터인 김현성 보다도 많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받았던 연봉이 1만 골드 1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내가 받는 연봉은 약 12배가 뛰었다.

한화로 약 12억을 받는 셈이니 이전과 비교하면 성공도 이런 성공이 없다.

물론 이 정도의 연봉도 부족하게 느껴지는 것이 현실.

문제는 내가 꼬박꼬박 월급을 받아갈 수 없을 정도로 파란이 망가진 데 있다.

연봉은 올랐는데 길드의 사정상 월급을 받을 수 없는 상황.

심지어 월급을 길드 직원들이 아니라 내가 직접 벌어야 하는 초유의 사태.

파란은 현재 위기 아닌 위기를 겪고 있었다.

재정난과 인력난으로 말이다.

‘일단 이것부터야.’

뭐가 됐든 일단은 이 둘부터 해결하는 것이 옳다.

눈앞에 있는 보고서를 정신없이 읽어나가고 있었을 때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기영 님, 피해 대책 위원회에서 올린 보고서입니다. 이건.”

“책상에 놔두세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처리하고 곧바로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괜찮으시면 정연 씨 좀 불러주시겠습니까?”

“그… 황정연 님께서는 지금 따로 할 일이 있으시다고….”

“네? 분명히 쉬고 오겠다고….”

“급한 일이 생겼다고 합니다.”

‘도망쳤어.’

잠깐 쉬고 오겠다는 말을 믿지 말았어야 했다.

하기야 만 하루 동안 이곳에 있었으니 무척이나 오래 버틴 셈.

그나마 그녀가 그간 쌓여 있는 서류를 전부 분류했기 때문에 일이 편해지긴 했다.

컴퓨터가 없는 세계.

그녀 같은 재원은 필요한 상황에만 딱딱 꺼내 쓰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말도 없이 도망칠 줄은 상상도 못했던 부분.

아마 본인의 일도 밀린 일이 많았을 테니 이해는 하지만 괜스레 내 신세가 조금은 더 처량해졌다.

“길드의 홍보는….”

“말씀드렸던 대로 기사에 파란의 정권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싣는 것을 우선으로 하고 저주받은 신단의 공략 일지를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일정은 3일 뒤로 부탁드립니다. 아니, 다시 하겠습니다. 무료 분을 공개한 이후에 일부는 판매하는 게 좋겠군요.”

“공략 일지를 판매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판매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럼 이건은 사업부로….”

“아뇨. 그냥 놔두도록 하세요. 사업부는 따로 할 일이 있으니까요.”

“네?”

어차피 사업부도 내 관할이다.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나를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길드직원의 표정이 눈에 띄었다.

“조금 수정 작업을 거쳐야겠지만 충분히 팔리고 남을 겁니다. 저주받은 신단의 이야기는 자극적이니까요.”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것 같습니다.”

“원정을 떠나기 전 이설호의 관한 이야기도 집어넣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조금 다듬어야겠지만 말입니다. 혹시 길드 내에서 글을 써봤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면 전부 모아서 수정 작업에 돌입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시작하도록 하죠.”

“좋은 생각입니다만… 출판과 대량생산까지 생각하게 되면 시간이 더 걸릴지도 모릅니다. 부길드 마스터.”

“모든 일정을 재조정하겠습니다. 아, 또 공략 일지와 함께 기사에는 저주받은 신단에서 구했던 아이템 목록도 올리는 게 좋겠군요. 율리에나의 대한 정보 역시 푸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가지고 계신 전설 아이템도 말입니까.”

“네. 당연하지만 아이템의 기능에 대한 것은 풀지 않겠습니다. 어디까지나 전설 아이템 보유자라는 말에 초점을 맞춰 홍보를 진행해 주도록 해주세요. 그게 빠르면서 효과적일 겁니다.”

“공략 일지에 대해 더 궁금해하겠군요.”

“네.”

전설 아이템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먼저 관심을 끈 이후에 공략 일지를 공개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지사.

모르긴 몰라도 아마 어마어마하게 팔려나갈 거라고 생각했다.

대중은 궁금한 것이 많다.

어디서 아이템을 얻었는지 어떻게 전설 등급의 주인으로 인정받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 할지도 모른다.

갑자기 든 생각치고는 조금 괜찮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전설 등급의 아이템에 대해 들을 기회는 없었을 테니까.

심지어는….

“환상물약의 출하 시기는 조금 앞당기도록 하겠습니다. 시기는 제가 조금 더 앞당기도록 하지요. 공략 일지 판매와 동시에 함께 푸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일정을 조정하겠습니다.”

다른 쪽으로도 홍보효과를 많이 노릴 수 있다.

신단 공략의 일등공신이었던 물약은 아마 불티나게 팔리게 되리라.

계획 자체는 나쁘지 않다.

뭔가 일이 잘 풀리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이상하게 부족한 느낌.

“음…….”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방향성을 잘못 잡은 느낌도 있다.

길드의 상품을 홍보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길드 자체를 홍보해야 한다.

이런 식이라면 아무리 일이 잘 끝나도 돈만 버는 것으로 일이 마무리 지어질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길드의 가치는 올라간다.

그렇지만 그게….

‘파란과 함께 일하고 싶다는 뜻이 되는 건 아니지….’

결정적인 한 방이 부족하다.

“아. 혹시 마차의 광고판 같은 경우에는 시세가 어떻게 됩니까?”

“조금 싸게 하면 하루에 200골드 정도 한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으로 가는 마차의 경우에는 가격이….”

“나쁘지는 않군요. 가성비도 괜찮고 무엇보다 지금 당장 써먹을 수 있다는 게 마음에 듭니다.”

“네. 혹시 광고판에는 어떤….”

“조금 더 생각해 봐야 될 문제 같습니다. 그것보다 영웅 등급의 아이템 목록은 전부 정리했습니까?”

“거의 끝났다고 들었습니다.”

“경매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빨리 가져오라고 전해주세요. 쓸모없는 아이템은 전부 매각하겠습니다.”

“네.”

인정하기는 싫지만 일은 나쁘지 않다. 하나부터 열까지 내 손과 연관이 되어 있으니 유동적으로 일정을 조정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괜찮게 느껴지는 부분.

아마 일반적인 회사였다면 일정을 조율하는 데도 수많은 회의를 거쳐야 했을 것이다.

이것저것 전부 따져가며 한계에 부딪치는 일도 있었으리라.

혼자 모든 걸 조정하니 귀찮은 관료주의에 발목 잡힐 만한 일은 없다.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지금 일이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애초에 내 능력에 한계가 있는 것이 문제다.

본래 여러 명이서 하던 일을 혼자 처리하려고 하니 머리가 아픈 것이 당연하다.

내가 소설 속에 나오는 행정능력자처럼 이것저것 착착 할 수 있었으면 조금 더 일이 쉬워졌을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제국법도 전부 숙지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

일반적인 일은 처리하는 데 무리가 없지만 조금 민감한 세금 문제나 제국법에 관련되어 있는 문제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공부를 하면서 처리했어야 했으니까.

‘쓸모 있는 인재가 없는 것도 한 몫하고….’

사실 이게 가장 크다.

파란은 결코 그 규모가 작다고는 할 수 없다.

물론 실질적으로는 7개의 파티를 위해 돌아가고 있는 연예 기획사 같은 느낌이기는 했지만 그들을 보조해 주는 평길드원이나 길드직원의 숫자도 상당하다.

이들 중에 그렇게 특출한 인재가 없다는 소리는 뻔할 뻔자.

애초에 그 늙은이들이 조금이라도 뛰어난 이들의 목을 사전에 날려버렸다는 이야기.

물론 실제로 죽이지는 않았겠지만 압박해 길드에 나가는 것을 종용하든 아니면 올라오기 전에 쳐내건 둘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죽어서도 쓸모없는 놈들.’

얼마나 자기의 자리에 집착하고 있었는지 답이 나온다.

실질적으로 업무를 뛰어야 하는 인원이 없으니 내가 독박을 쓰는 건 무척이나 당연한 흐름.

‘값싼 인력.’

값싸고 유능한 인력.

필요한 것은 값싸고 유능한 인력이다.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 길드의 이미지고 이런 길드의 이미지를 결정짓는 것이 바로 홍보, 마케팅.

현재의 파란의 상황을 보자면 값싼 이들이 지원을 하는 것은 맞지만 유능한 이들이 지원할 정도는 아니다.

어떤 식으로 파란의 이미지를 좋게 사기 치는 게 좋을까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

대충 입을 여니 밖에서 박덕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나요.”

“들어와도 된다, 덕구야.”

“끄응… 거, 너무 바빠진 거 아니요?”

“응. 바쁘지 정말로 바쁘다.”

“우리 길드 마스터가 형님한테 전해주라고 한 게 있어서 왔수.”

“뭔데?”

“거 피로회복제라는 모양인데….”

“아….”

‘김현성 나쁜 새끼.’

이쯤 되면 전생에 내가 녀석과 원수라도 졌었던 모양이다.

이야기 속의 황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얼마나 형님의 건강을 걱정하는지… 어디서 구해왔는지는 모르겠는데 거 효과가 대단하다 합디다. 한 방이면 3일 정도는 밤을 새도 끄떡없다고….”

박덕구가 입을 열면 입을 열수록 괜스레 더욱더 무서워진다.

‘이러지 마, 이 새끼야….’

계속 이대로 가다가는 사단이 나도 뭔 사단이 날 것은 당연지사.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녀석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단순한 게 가장 좋은 해결책이 될 수도 있으니까….’

슬그머니 입을 여니 초롱초롱한 녀석의 눈빛이 나를 반겼다.

“덕구야, 잠깐 이야기 좀 하자.”

“뭐요?”

“우리 길드의 이미지가 어때?”

“거… 망한 길드 아니요? 이제 막 다시 일어서고 있고… 뭐, 앞으로는 잘되겠지만 나쁘지는 않아 보이는 것 같은데… 큼.”

완벽한 정답이다.

“그럼 우리 길드의 장점이 뭘까?”

“갑자기 그런 걸 물어도….”

“진지하게 물어본 게 아니니까 대충 대답해도 돼. 뭐라고 말해야 유능한 인재가 우리 길드로 들어올까?”

“그런 건 잘 모르겠는데… 거, 우리 길드의 장점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젊음과 열정 그리고 패기 아니요? 그리고 형님이 있다는 것이지! 크으….”

“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답을 얻은 느낌.

이 간단한 걸 어째서 생각하지 못했는지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박덕구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리자 자신이 도움이 됐다는 걸 깨달았는지 녀석 역시 있는 힘껏 웃음을 보내기 시작.

옆에 앉아 있는 박중기를 향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중기 씨.”

“네. 부길드 마스터.”

“지금 당장 린델 운송 조합에 연락을 넣고 사방으로 전단을 뿌릴 수 있도록 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역시나 인원을 확충하실….”

“아뇨. 일단은….”

“…….”

“인턴을 모집해야 될 것 같습니다.”

나만 갈릴 수는 없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