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회귀자 사용설명서 119화
무녀(2)
‘뭐야. 왜 울어.’
눈은 보이지 않는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분명 그녀는 장님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괜스레 주변의 눈치를 보게 된 것은 당연지사.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보니 내가 다 당황스러워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필사적으로 눈을 돌려봤지만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 같은 느낌에 괜스레 불안해진다.
‘뭐야….’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자 조금은 멈칫 하는 모습.
손수건으로 조용히 눈물을 닦는 것을 보니 본인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자각도 하지 못했던 모양.
도무지 뭔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표정을 읽기가 힘들어.’
눈을 감고 있으니 정말로 표정을 읽기가 힘들다.
타락한 구도자라는 성향은 도대체 어떤 성향인지 파악하기 힘들고 본질과 미래와 과거를 꿰뚫어 보는 눈은 도대체 어떤 미친 특성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저 눈깔이 내가 가지고 있다는 눈깔을 뛰어 넘는다는 것뿐.
말하자면 내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난 셈.
‘시바….’
예상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짜증 나는 경우는 없다.
차희라가 조금 껄끄러운 이유 역시 그녀가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해 예상이 가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적어도 정하얀은 자신의 감정에는 솔직하니 논외.
눈앞에 보이는 무녀의 행동 패턴은 내가 계산할 수 있는 한계를 이미 넘어섰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경계심을 보인 것은 당연지사. 한 발자국 슬그머니 물러서자 곧바로 내 앞을 가로막는 사랑스러운 차희라가 시야에 비쳤다.
‘이제는 희라 누나뿐이야.’
“너. 뭐야?”
“오랜만입니다. 차희라 님.”
“오랜만인 건 오랜만인 거고… 갑자기 여기까지 무슨 일로 찾아오셨데? 그렇게 눈물까지 흩뿌리면서….”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인사를 드리러 왔을 뿐입니다.”
“누구한테? 우리가 평소에 인사를 나눌 정도로 친분이 있는 건 아니었잖아. 아니, 나보다는 우리 자기한테 볼일이 있는 것 같아 보였는데… 내 착각은 아니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저… 정말로 인사를 드리러 왔을 뿐입니다. 차희라 님.”
“우리가 지금 실리아에 있는 개자식들 때문에 조금 민감한 상황이라는 건 알고 있지?”
“…….”
“네가 연관이 되어 있을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거기 있는 잡것들이 별로 좋게 보이지는 않아. 또다시 뭔 개수작을 부릴지 알 수가 있어야지. 이런 상황에서 나한테 인사를 하러 왔다… 이 멍청한 여자야. 여기가 왕성이 아니었으면 넌 뒈졌어.”
“저는 무슨 일이 때문에 그러시는지… 정확히….”
“모르면 닥치고 내 눈앞에서 사라져. 네가 정말 모르고 있는지 모르는 척하고 있는지는 알 바 아니지만 우리 자기가 조금 불안해하는 것 같거든.”
믿음직스럽긴 하지만 조금 날이 선 것 같은 느낌.
이름을 들었을 때의 반응만 해도 사이가 나쁘진 않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역시나 린델테러사건 때문에 조금 민감해진 모양이다.
물론 저 무녀가 평소와 다른 행동을 보이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차희라의 반응이 이해가 간다.
차희라와 빅터 할배가 이야기를 나눈 것을 생각해 보면, 무녀는 이 모임에 그다지 열정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았으니까.
갑작스럽게 일찍 온 것도 모자라 인사를 명분으로 찾아오기까지 했으니 뭔가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을 해보는 게 당연하다.
폭언 아닌 폭언을 퍼붓자 함께 온 무녀의 똘마니들 역시 한 마디씩 내 뱉기 시작.
물론 똘마니들이 일어선 것은 차희라에게 그다지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말씀이 너무 심하십니다. 차희라 님.”
“유노 님께서는 어디까지나….”
“입 다물라고 했어. 쓰레기들.”
심지어는 슬그머니 마력까지 운용하고 있는 상황.
잠깐 동안 침묵하고 있었던 유노가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 아닙니다. 여러분. 그만하셔도 됩니다. 제가 조금 갑작스러웠던 것 같군요.”
“…….”
“차희라 님. 그리고 다른 분들도… 자리를 불편하게 했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혹여나 실리아에서 잘못을 저지른 것이 있다면… 그들을 대신해 제가 사과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천천히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인 이후에 말을 내뱉는 모습은 무척이나 침착.
빅터 할배가 빤히 차희라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진심 어린 사과에 반응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제국에 몸을 담고 있는 입장이라면 두 권력자의 싸움이 달가울 리가 없다. 남은 것은 차희라의 선택뿐이었다.
“받아들이지.”
‘나쁘진 않았어. 희라 누나.’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시간 보내시길….”
용병여왕은 고개를 끄덕였고 무녀는 조용히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어처구니없게도 이쪽의 귀로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은 바로 그때.
-부디 시간이 나실 때 제 방으로 와주셨으면 합니다. 서관 2층에 위치해 있습니다.
‘어….’
분명히 나에게만 들려왔다.
-부디 꼭 와주셨으면 합니다.
‘이게 뭔 거지같은 상황이야.’
어이가 출타할 지경.
어째서 하나부터 끝까지 이해가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어째서 그녀가 나를 찾는 건지, 정말로 나를 보고 눈물을 흘린 것이 맞는지.
왜 자신의 방으로 나를 초대하는 건지 모든 게 장막 속에 가려져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룻밤 불장난을 저지르자는 것도 아니고….’
호텔에 있는 바에서 이런 제안을 받았다면 그나마 즐거웠을 것이다.
정보가 조금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다. 마침 차희라가 이쪽을 바라보며 칭얼거리는 것이 들려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 소름이 끼친단 말이야.”
“아는 사람이야? 누나?”
“대화한 것도 이번이 두 번째.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정말로 신기하네… 이렇게 길게 말한 적도 처음이야.”
“…….”
“약 5년 전에 이곳에 들어와 실리아에서 길드를 세웠고… 지금은 무척이나 승승장구하고 있는 신흥 길드 요조라의 주인이야. 사실 행보도 명확하지는 않아. 일각에서는 미래나 과거를 본다는 소리도 나오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걸 볼 수 있다는 헛소리가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행보를 생각해 보면 거짓말처럼 보이지도 않고… 사실 나도 아는 게 별로 없어.”
“…….”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마, 자기. 우리 부하나 검은백조는 확실하게 숙지하고 있을 테니까. 도착하면 물어보지, 뭐.”
“응.”
“아, 한 가지 확실한 정보는 있어.”
“뭐?”
“저 여자 맹인이야.”
“그 정도는 나도 알 수 있어.”
역시나 이런 쪽으로 차희라에게 기대는 것은 무리다.
‘보고서라도 받아올 걸 그랬나.’
애초에 조금 더 제대로 된 준비를 하고 왔어야 했다.
“저 여자 조금 이상해요, 오빠.”
“그래?”
“네. 조금 이상해요. 뭔가… 이상해요….”
사실 정하얀이 사람을 잘 보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저 여자는 하얀이에게는 꽤나 밉보인 모양.
내 쪽에 더욱더 달라붙어 오는 것을 보고는 조금 민망해졌다.
“할아버지, 우리는 이만 들어가도 되지?”
“물론. 식사는 어디서….”
“오늘은 여기 식당에서 간단히 때울 거야. 아니, 사람들 시켜서 대충 방으로 보내줘. 두 시간 후에… 아무래도 장거리 비행을 했더니 조금 피곤하거든.”
“대련 어쩌고 하지 않았나?”
“기분 잡쳤어.”
“뭐, 좋을 대로 하도록 해. 그리고 항상 말하지만 괜한 분란을 만드는 건….”
“알아. 싸우면 안 된다는 거. 그래도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는 거 알잖아. 린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지?”
“알고 있지만 희라야, 항의할 것이 있으면 기관을 통해 정식으로 항의하는 게 옳아. 너는 너무 다혈질….”
“알고 있어.”
“쯧. 위로 올라가도록 해.”
“내일 또 봐.”
마치 자기 집인 것 같은 움직임, 넓은 왕성을 싸돌아다니고 있는 것을 보니 이 신성제국에서 차희라가 받는 대우가 어떤지에 대해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여기 밥도 조금 먹을 만해. 조금 느끼하기는 하지만 가끔 먹기에는 질리지가 않거든. 일단 방으로 가자.”
초행인 나와 정하얀은 전적으로 차희라에게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새끼 강아지가 어미를 쫒아가는 것처럼 쫄레쫄레 따라가는 모양새는 내가 생각해도 조금 우습다.
아무래도 자기 방 역시 마련되어 있는 모양.
계단을 계속 내려가다 보니 어느새 차희라의 방 앞이다.
문을 여니 단순히 넓다고 설명할 수 없는 커다란 공간이 시야에 들어왔다.
방 안에 방이 있는 구조.
4개나 5개는 되는 것처럼 보인다. 비싼 호텔을 가본 적은 없지만 아마 그 어떤 호텔이더라도 이곳과 비교하기는 힘드리라.
“어차피 방 많으니까 대충 자리 잡으면 될 거야. 화장실도 두 개나 있고.”
“좋네요.”
“제국한테 받은 방이라서… 조금 쓸 만하지? 사실 가끔 들러서 묵기에는 괜찮아. 이런 걸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가끔 사치부리는 기분이 들어서 좋거든. 밥 올 때까지 대충 있든지. 두 시간 정도 남았으니까. 나는 잠깐 볼일이 있어서 나갔다 올 거야.”
“알겠어.”
“심심하면 적당히 주변이나 돌아다녀. 어차피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위험하지도 않을 거고.”
“응.”
시원시원하게 말하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아마 차희라 역시 이렇게 빨리 온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업무 관련으로 급한 일이 있었던 것이 분명.
챙길 것을 챙긴 이후에 방문을 닫고 나가는 모습이 조금 바빠 보인다.
차희라가 나가자 기분이 좋은지 정하얀은 침대 위로 뛰어들어 푹신함을 느끼는 중.
몇 가지 충고할 것에 대해 떠올렸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아직까지는 잘해주고 있기도 하고….’
지금은 정하얀에게 신경 써줄 여유가 없었으니 말이다.
이유야 뻔할 뻔자.
그 무녀가 신경 쓰였던 탓이다.
‘부디 시간이 나실 때 제 방으로 와주셨으면 합니다. 서관 2층에 위치해 있습니다.’
간곡히 부탁하는 어조로 말했던 목소리가 계속해서 머릿속에 울리고 있는 상황.
혹시나 함정은 아닐까 생각하기는 했지만 설마 신성제국의 성에서 이해할 수 없는 짓을 저지를 정도로 멍청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쪽이 마음의 눈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을 때, 그녀를 찾아가야 하는 것은 필연적인 이야기.
어떻게 됐든 한 번쯤은 대화를 해보는 게 옳다고 할 수 있으리라.
마음의 눈이라는 특성은 사실상 내 밥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러 가지 능력치가 딸리는 내가 유일하게 사용할 수 있는 무기, 그런 무기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솔직히 내키지 않는다.
‘마침 차희라도 나간 상황이고….’
기회가 있다면 지금이 가장 적절한 타이밍.
만약 내가 상상하는 최악의 상황이 온다고 한다면 그녀를 어떻게든 제거해야 한다.
“하얀아.”
“네?”
“잠깐 나갔다 와야 될 것 같아.”
“아… 네.”
“여기서 조금 기다리고 있을 수 있지?”
“…….”
“금방 올 거야.”
내키지 않는 표정이지만 정하얀은 내 자유를 억압하지는 않는다.
버려진 강아지의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두고 방문을 나서는 것은 순식간.
성에서 일하고 있는 시종이나 하인들의 눈에 띄게끔 이들에게 질문을 하거나 인상을 남기는 것도 당연.
혹시 모를 사고가 났을 때 이쪽의 움직임을 설명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함정이라면….’
불안하기는 하지만 그럴 확률은 적다고 생각했다.
내 몸에 이상이 생긴다면 정하얀에게 곧바로 신호가 간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위치에 있는 만큼 버틸 시간은 충분.
가방에 가득 가져온 물약을 매만지고 잠잠한 율리에나도 괜스레 한 번 쓰다듬는다.
그러고 보면 그녀가 접근했을 때는…….
‘율리에나도 반응하지 않았어.’
그녀를 적으로 판단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정황상 그녀가 나를 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정설.
이설호와의 일이 모두 마무리된 지금 굳이 나를 죽일 생각은 없다. 이쪽에 해를 끼친다면 문제가 더욱더 커진다.
이윽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자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는 요조라 길드의 인원들이 보이기 시작.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쪽을 향해 인사를 해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도대체 뭐야….’
“이쪽 방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네.”
“무기는….”
율리에나를 바라본 한 남자가 자신이 잠깐 맡겠다는 의사를 표현했지만 넘길 수 있을 리 만무.
타이밍 좋게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관없습니다. 들여보내도록 해주세요.”
“네, 무녀님.”
고개를 끄덕이고 살짝 문을 연 순간 눈앞에 보인 것은 무릎을 꿇고 눈을 감고 있는 장님.
혹시 모를 위험이 있는지 궁금해 율리에나를 만져봤지만 여전히 반응은 없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나의….”
“…….”
“주인님이시여.”
‘무슨 개소리야.’
천천히 겉옷을 벗은 채로 이쪽에 절을 올리는 꼴은 가관.
부들부들 떨리는 얼굴과 환희에 쏟아져 내리는 눈물을 보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누가 봐도 황당한 상황에 잠깐 동안 사고가 정지된 것만 같다.
“아아아아… 나의 주인님. 오랫동안 당신을 기다렸나이다.”
‘미, 미친년….’
“이 못된 종에게 벌을, 벌을 내려주시옵소서… 나의 주인이시여.”
‘개 시바….’
슬쩍 옆을 바라보자 그동안 보지도 못했던 해괴한 도구들이 눈에 띈다.
“부디 벌을 내려주시옵소서… 나의 주인 나, 나의 주인님.”
“미친!”
갑작스러운 상황에 문을 다시 열어봤지만 철컥거릴 뿐 열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미천한 돼지에게 벌을 내려….”
“저리 꺼져!”
비명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