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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20화 (119/1,590)

# 120

회귀자 사용설명서 120화

검은색 세계(1)

비명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방금도 뭐가 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도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은 마찬가지.

‘정신 나간 여자.’

눈앞에 있는 무녀는 정신이 나간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계속해서 문을 당겨봤지만 굳게 닫혀 있는 문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내가 상상하는 종류의 함정은 아니었지만 상상했던 것보다 조금 더 당황스러운 상황.

그 와중에도 눈앞에 무녀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며 계속해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주인님! 주인님! 오랫동안 이날만을 기다려왔나이다.”

“시, 시바!”

“나의 빛, 나의 사랑, 나의 모든 것.”

“가까이 오지 마.”

엉금엉금 기어오는 꼴을 보니 등 뒤로 소름이 돋을 지경.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가 힘들었다.

‘정하얀을 불러야 되나?’

그녀와 신체접촉을 한다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정하얀에게 정보가 날아간다.

아마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곧바로 이곳으로 향해 줄 수 있으리라. 아니, 어쩌면 지금도 이쪽으로 향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렇지만.’

그게 옳은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는 부분.

눈앞에 있는 무녀의 돌발 행동 때문에 이쪽에 첫 번째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녀가 어째서 나를 이곳으로 불렀는지, 그녀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는지 어느새 문을 바로 등지고 있었지만 그녀의 자리는 아까 전 머리를 조아리던 바로 그곳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위치해 있다.

문은 잠겨 있지만 이쪽을 해할 의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뭔가 하려고 했으면….’

진즉에 했을 것이다.

지금 이 와중에도 몸을 파들파들 떠는 것이 불안해 보이기는 했지만 일단은 대화를 하는 것이 옳다.

잠깐 주인님 흉내를 내는 건 어떨지에 떠올려봤지만 그다지 좋지 않을 것 같은 느낌.

본질을 꿰뚫어 보는 눈이라면 그 정도는 파악할 수 있으리라.

슬쩍 주변을 돌아 의자에 앉자 뭔가를 기대하는 것 같은 느낌으로 나를 바라보는 무녀의 얼굴이 보였다.

뭔가 이상한 것 같아 뒤를 돌아보니 예의 그 해괴한 도구들이 보이고 있는 상황.

별로 용도를 알고 싶지 않은 종류의 물건들이다.

‘애초에 이딴 게 왜 여기에….’

“아아아아….”

‘그딴 소리 내지 마.’

“주인님.”

‘기대도 하지 마.’

앉은 위치가 그리 좋지는 않다.

의자에 채찍은 왜 걸려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정상적으로 대화를 하는 게 첫 번째.

문제는 어떤 식으로 대화를 시작해야 되는지 파악하기 힘들다는 것에 있다.

내가 대화를 이끌어 가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그녀에게 맞춰줘야 하는 것인지 혼란스럽다.

압도적인 갑의 위치에 있어야 할 사람이 스스로를 을이라고 해달라 외치고 있다.

그것도 조금 처참한 모습을 자처하면서까지 말이다.

생각이 조금 길어졌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순식간.

일단은 뭐가 됐든 입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눈앞에 있는 무녀가 먼저 입을 열어왔다.

“부디 말씀을 낮춰주시옵소서.”

이게 낫다.

“내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나?”

“하나뿐인 저의 주인님이십니다.”

“질문의 요지는 그게 아니야. 내가 정확히 누구인지 알고 있냐는 말이지.”

“저의 주인님이라는 사실밖에는 아는 것이 없사옵니다.”

‘이게 무슨 개 같은 경우야….’

“처음 본 순간 바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계속해서 찾아 헤매던 분이 당신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셨던 심안 역시….”

“알고 있군.”

“죄, 죄송합니다. 혹여나 불쾌하신지요.”

‘그만해.’

“솔직히 조금 당황스럽다. 주인이니 뭐니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겠고, 솔직히 말하면 나는 당신을 처음 보는 것 같거든…. 이곳에 온 것도 확인할 것이 있었을 뿐이고 어째서 나한테 이러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어. 네 말이 맞아. 조금 불쾌한 심정이라고 하는 게 맞겠네.”

“송구스럽습니다. 제, 제가 미처 주인님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 그렇아… 네… 죄송합니다. 이, 이런 실수를. 주, 죽여주시옵소서.”

“…….”

“이를 어째… 제, 제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앞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부디 요, 용서를!”

‘연기는 아니야.’

감긴 눈에서는 아까와는 다른 의미의 눈물이 나오고 있다.

무척이나 혼란스러워하는 느낌.

눈앞에 있는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에 조금은 더 점수를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하나. 그녀가 미래나 과거를 볼 수 있다는 것.

특성의 설명에도 이미 그런 설명이 적혀 있다.

[특성-본질과 과거와 미래를 꿰뚫어 보는 눈-전설 등급]

[대가를 바쳐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지 않고 애매하게만 설명되었지만 일단 미래나 과거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애초에 특성 이름이 과거와 미래를 꿰뚫어 보는 눈이니까.

‘어쩌면….’

“미래의 나를 본 적이 있나?”

미래의 내가 그녀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쳤고 계속해서 미래를 훔쳐보던 그녀가 그 영향에 잠식되었다는 가정을 할 수도 있다.

저 무녀가 보여주고 있는 행동이 거짓말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것은….”

“아니면 과거에 나를 만난 적이 있나?

“둘 다 아니옵니다. 주인이시여. 정확히 말하면….”

“말하면?”

“정확히 말하면 미래도 과거도 아니옵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알 수는 없지만… 틀림없이 저의 이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있사옵니다. 이상한 말로 여기실 수도 있겠지만 제가 보는 것은 과거이면서도 미래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제 몸에 새겨진 기억입니다.”

“몸에 새겨진 기억?”

“아니, 영혼의 새겨진 기억이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 할지는 알 수 없지만 저는 이곳에 들어온 6년 전부터….”

“4년이라고 하지 않았나?”

“세간에는 그렇게 알려져 있습니다만 제가 이곳에 들어온 지는 6년 전입니다. 워, 원하신다면 4년 전으로….”

“아니, 그런 건 아무 상관없다. 일단은 설명을 해줬으면 좋겠군.”

“제, 제가 처음에 이곳에 오자마자 목격한 것은 주인님과 함께하는 저의 모습이었습니다.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무척이나 행복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물론, 그 당시에 제가 받아들이기는 힘든 기억이었지만….”

“그게 미래를 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연유는 있나?”

“보통 미래의 경우에는 하얀색으로 보입니다. 과거의 경우에는 회색 그리고 과거도 미래도 아닌 것들의 경우에는 검정색으로 보이옵니다. 그, 그리고 저는 이것을 검은색 세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렇군.”

설득력은 있다.

상태창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만약 그녀가 본 것이 미래나 과거가 아니라면 어떤 걸 봤는지는 뻔할 뻔자.

‘1회 차?’

어쩌면 저 여자가 만들어낸 정신병일 수도 있지만 지금 당장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김현성이 겪었던 1회 차뿐이다.

평행세계인지 나발인지일 가능성도 있고 아까 말했던 것처럼 망상일 가능성도 다분하지만….

‘가능성은 있어.’

이 여자는 나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내 특성이 뭔지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다.

본인은 이것이 1회 차라는 것에 대한 자각은 없는 것 같았지만 만약 이 여자가 볼 수 있는 검은색 세계가 1회 차가 맞다면 이 여자 역시 회귀자에 가깝다.

문제는 다름 아닌 나에 대한 것.

‘살아남았었나?’

나 역시 1회 차에 존재하고 있었다. 사실 생존가능성이 낮다는 쪽으로 생각했었다.

내가 1회 차를 겪었던 당시 김현성 역시 회귀자가 아니었을 테니 나는 김현성을 따라가는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박덕구와 계속해서 함께 행동했을 가능성이 크다.

튜토리얼 던전에서 김현성에게 목숨을 구해진 것만 해도 두 번.

만약에 김현성이 없었다면 이기영이라는 인간은 대륙으로 향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저런 여자의 주인 행세를 했던 것을 보면 모르긴 몰라도 조금 능력자였던 모양.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기분이 조금 묘했다.

물론 이 모든 게 저 여자가 본 게 1회 차라는 것이 확실하다는 가정으로 하는 생각이다.

아직 확인도장을 찍어볼 정도는 아니었지만 정보를 얻어 나쁠 것은 없으리라.

“또 다른 것을 본 적이 있나? 아니, 나에 대해서는 무엇을 본 거지?”

“사실 그다지 많은 것을 볼 수는 없었습니다. 송구스럽지만 제 특성은 제가 보고 싶은 것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나 과거는 가끔 원하는 것이 보이기는 하지만 검은색 세계의 경우에는….”

‘페널티가 있는 건가.’

“검은색 세계의 경우에 보이는 것은 단편적이거나 인상적인 장면뿐입니다. 물론 가, 가장 많이 본 것은 주인님과 함께하는 장면이었습니다만… 아니, 사실 대부분이 주인님과 함께 지낸 기억뿐입니다.”

“정확히 어떤 기억을 말하는 거지?”

“말, 말씀드리기 부끄럽지만 그… 그것은….”

슬그머니 내 뒤에 있는 것들을 바라보는 표정이 보였다.

그제야 이 무녀의 반응이 이해가 가기 시작.

‘이기영, 이 새끼 대체 뭔 짓을 한 거야.’

상태창으로 본 그녀의 나이는 겨우 20살.

내가 그녀와 언제 만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나올 정도였다.

“아니, 말하지 않아도 된다. 대충 알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럼 질문을 바꾸어 보지. 검은색 세계에서 우리 둘은 어떻게 만나게 된 거지? 이것도 볼 수 없었나?”

“아, 아닙니다. 주인님과 관련된 것이라면 어느 정도 볼 수 있었습니다. 단편적이어서 자세한 설명을 드리기에는 조금 힘들지만 검은색 세계에서는 제가 주인님을 직접 찾아갔던 걸로 기억합니다.”

“뭐?”

“검은색 세계에서의 저 역시 주인님과 함께 하는 미래를 가끔씩 보고 있었습니다. 무척이나 행복해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혼란을 느꼈던 것이겠죠. 심지어는 주인님과 함께하는 모습을 보고 괴로워했던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곳에 막 들어왔던 저 역시 그랬으니 이해는 합니다만 검은색 세계의 저는 정말로 어리석어 보였습니다. 주제넘게도 주인님을 동정하기도 했습니다. 멍청하게도 주인님과 함께하는 미래를 거부하고 싶어 하면서도 주인님을 가엽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렇군.”

“당시 많이 다치신 주인님을 모셔와 저는 주인님을 치료하는 데 전념했습니다. 그렇게 주인님과 함께 오랜 시간을 보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생명의 은인이군.”

“부, 부끄러울 뿐입니다. 아무튼 간에 주인님이 몸을 거의 회복하신 이후에 본 장면은….”

“…….”

“…….”

“장면은?”

“주인님이 제 목을 조르고 있던 장면이었습니다.”

“뭐?”

“주인님이 제 목을 조르고 있던 장면입니다. 이후는 자세히 보지 못했습니다만 주인님이 하신 말씀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왠지 모르게 불안해진다.

“뭐라고 이야기했지?”

“싸구려 동정 집어 치워. 거지같은 년아. 네놈들은 전부 다 똑같아.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저와 주인님은 맺어지게 되었지요. 그 다음 장면은 시간이 많이 흐른 뒤였습니다. 그렇게 검은색 세계에서의 저와 주인님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지요. 후후….”

‘그게 뭐야.’

어떻게 거기서 맺어질 수가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들은 이야기가 너무 황당해 조금 혼란스러울 지경.

근본 없이 날뛰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하나하나 집어나가자 대충 정리가 되기 시작했다.

첫 번째. 무녀는 미래와 과거와 본질을 볼 수 있다. 미래와 과거만 볼 수 있었던 1회 차의 무녀와는 다르게 2회 차의 무녀는 1회 차까지 엿볼 수 있다.

두 번째. 미래나 과거는 함부로 들춰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랜덤으로 열리고 랜덤으로 볼 수 있다.

세 번째. 무녀가 볼 수 있는 1회 차는 제한적이다. 정황상 자신의 영혼에 새겨진 기억만 열람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네 번째. 이유는 모르겠지만 2회 차의 무녀는 나의 종이 되기를 원한다. 아마도 1회 차를 너무 많이 들여다 본 부작용일 것이다.

다섯 번째. 일단 1회 차에서의 무녀는 1회 차 이기영의 생명의 은인이다.

여섯 번째. 1회 차의 무녀는 1회 차의 미래를, 즉 나와 함께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혼란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의 미래를 부정하고 거부했다.

일곱 번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1회 차의 무녀는 나를 동정했기 때문에 이기영이라는 인간을 구하기로 결심한다. 어떻게 찾아냈는지, 어디에서 찾아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회 차의 무녀는 죽어가는 나를 구해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다.

마지막. 몸을 완전히 회복한 1회 차의 이기영이 1회 차의 무녀의 목을 조른다. 시간이 지난 이후 1회 차의 무녀는 자신의 미래를 변화시키지 못한 채로 지금과 같은 결과를 맞이한다.

미래를 바꾸려고 했지만 바꿀 수 없었던 것이다.

이해관계를 전부 빼고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생명을 구해준 은인의 뒤통수를 거하게 때린 셈.

어떻게 생각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 새끼 완전히 쓰레기 아냐?’

1회 차의 이기영은 완벽한 인간 쓰레기였다.

그것도 구제 불능의 쓰레기.

‘이… 나쁜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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