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회귀자 사용설명서 121화
검은색 세계(2)
‘이… 나쁜 새끼….’
속으로 욕을 해보기는 했지만 사실 상황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조금 찔리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내가 판단한 것이 전부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지금 나는 차희라와 김현성 급의 강력한 아군을 얻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도 이쪽에게 무조건 충성하는….’
완벽한 아군.
이쯤 되면 직업을 선택할 때 소환술사를 고르지 않은 것이 행운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새로운 소환수야.’
눈앞에 있는 이 무녀는 자유 도시 실리아의 대형 길드의 주인인 것은 물론 과거와 미래를 내다보고 기존에 있는 마법과는 다른 개념의 힘도 보유하고 있는 규격 외의 존재다.
정확한 무력을 평가할 수는 없지만 스탯이나 잠재 능력만 고려해 봤을 때, 활용 가치는 정하얀 이상.
입꼬리가 슬슬 올라가는 게 당연했다.
‘어쩔 수 없는 쓰레기인가 보다.’
물론 완벽하게 이쪽의 품에 끌어들이기 전에 몇 가지 확인 작업을 거쳐야 하는 것이 당연.
게다가 궁금한 게 남아 있다.
초조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무녀를 향해 곧바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질문을 몇 가지 더 하지. 검은색 세계에서의 나는 어떻게 죽었지?”
가장 궁금한 질문이었다.
“그건 알 수 없습니다.”
“볼 수 없었다는 뜻인가?”
“네.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 제가 주인님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가. 너는 어떻게 죽었나?”
“주인님을 위해서 죽었습니다.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알 수 있는 것은 검은색 세계에서의 저는 마지막에 대해 한 점의 후회도 없었다는 것뿐입니다.”
“으음…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인연을 맺게 된 건지도 궁금하군.”
“송구하지만 무슨 의미이신지….”
“말 그대로의 이야기다. 네가 알 고 있는 것처럼 나는 타인의 정보를 훔쳐볼 수 있다. 네가 네 정보를 스스로 개방해 준 덕분에 네 정보 역시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고….”
“네.”
“마력 능력치 96에 전설 등급의 직업, 전설 등급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마법사. 아니, 주술사라고 해야 옳은가?”
“네. 맞습니다.”
“네가 말하는 검은색 세계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어 잘은 모르겠지만 그곳에서의 나도 강하다고 하기에는 힘들었겠지.”
“아닙니다. 주인님께서는 그 누구보다 늠름하시고….”
“그런 이야기가 아니야. 단순히 육체의 스펙을 말하는 거다. 내 말이 맞나?”
“네… 그렇습니다.”
“의문점은 어째서 네가 나에게 저항하지 않았는가다. 내가 네 목을 조르는 걸 봤다고 이야기했지만 그 중간에 나와야 할 설명이 빠져 있어. 검은색 세계에서의 우리가 지금보다 더 늦게 만났을 거라고 가정한다면 더욱더 그렇지.”
“네. 정확한 일자는 보지 못했지만 검은색 세계에서의 주인님과 저는 지금으로부터 2년 후에서 3년 후에 만나게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네가 22살 때 만났다는 이야기군.”
“그렇습니다.”
“뭐, 언제 만났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만, 그래도 요지는 네가 나보다 강자의 입장에 있었다는 거야.”
“제, 제가 어찌 감히.”
“내 말이 맞아. 까놓고 이야기해서 네가 나를 죽일 의도가 있었다면 나는 벌써 죽었을 거다. 지금 이곳에서도 그리고 검은색 세계에서도 마찬가지겠지. 어째서 검은색 세계의 너는 나를 죽이지 않았을까?”
의문점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1회 차의 무녀는 나에게 학대 받고 있었던 것이 분명.
백번 양보해서 합의 하에 일을 치렀다고 보기에는 무녀의 정신 상태가 그리 좋지만은 않다.
약물이나 다른 방법을 사용했을 가능성에 대해 떠올려 봤지만 이 정도의 강자에게는 그마저도 잘 듣지 않으리라.
까놓고 이야기하면 무녀가 나를 밀어낼 수 있는 기회는 꽤나 많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이렇게 된 연유가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눈앞에 있는 무녀 역시 내 질문에 공감하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오기 시작.
조금 핵심적인 질문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건….”
“그건?”
“검은색 세계의 제가 주인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발언에 잠깐 의자의 손잡이를 두드린 것은 당연지사.
계속해서 말을 잇는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
“감정을 직접적으로 느끼지는 못해 정확한 말씀을 드리기는 힘듭니다만 틀림없이 검은색 세계의 저는 주인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간병을 하는 동안 정이라도 들었다는 건가?”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아마 운명적인 어떤 이끌림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군….”
“주인님을 걱정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주인님을 머릿속으로 그리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주인님과 함께하는 시간도 당연 길어졌지요. 검은색 세계를 보는 내내 그곳의 저의 마음이 전해져 오는 것 같아 저 역시 가슴이 뭉클했었습니다.”
‘옴므파탈이야 뭐야.’
사실 내 자신이 잘생겼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눈이 조금 찢어졌다는 것 외에는 모난 곳이 없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남이라는 말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외모.
잘생겼다는 수식어는 우리 사랑스러운 김현성에게나 잘 어울리는 표현이다.
강인하고 커다란 눈, 오똑한 콧날과 아주 예쁜 입술, 심지어 몸도 좋으니 놈은 거의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격도 나쁘지 않고….’
사랑을 느끼기에는 조금 더 적합한 대상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생각이 조금 옆길로 새기는 했지만 정리하자면 어째서 이런 여자들이 굳이 나에게 달라붙는 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
정하얀 같은 경우에는 그녀를 궁지로 몰아붙이면서 이쪽에 호감을 가지게 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나머지는 도대체 어째서 이쪽에 집착하고 있는지 영문을 모를 지경.
심지어 1회 차에서는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이런 유용한 여자를 손에 넣었단다.
물론 아직 확정된 사안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말이다.
‘이쯤 되면 특성이라도 있는 거 아닌가.’
아마 그 특성에는 매혹이라든지 유혹이라든지 그런 식으로 적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주인님의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떻지?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었나?”
“아마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주인님이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사람 중에 한 명이었을 겁니다. 네. 분명히.”
1회 차 이기영의 심정은 모르겠지만 아마 그녀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공감하는 것처럼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금 머리를 조아리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어느 정도 이해했다.”
“그, 그렇다면….”
“네 말은 확실히 앞뒤가 맞아. 직접 자신의 정보를 밝힌 것도 그렇고 자신의 상태창을 내게 보여준 것도 아주 인상적이야. 실제로 네가 미래와 과거 그리고 검은색 세계까지 볼 수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굳이 확인해 볼 필요도 없지. 내 눈에는 네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 보이니까.”
“아.”
“그래도 아직 부족해.”
“네?”
“나는 의심이 무척 많아. 굳이 검은색 세계의 일을 가지고 와 자신과 동일시하는 네 심리도 궁금하고, 네가 본 그대로 나에게 이야기를 하는지도 궁금해. 검은색 세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동일인물이 아니야. 마찬가지로 검은색 세계의 너와 지금의 너도 동일인물이 아니고. 물론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으마. 그래도 내 입장에서는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지. 이해할 수 있나?”
“물, 물론입니다.”
부들부들 떨고 있다.
조금 불안한 것 같은 표정, 혹시라도 내가 자신을 내치면 어떡할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네가 이야기해 준 것이 전부 진실이라는 보장도 없지. 혹여나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기도 한다. 주인님이라는 것도 뭔지 잘 모르겠고… 솔직히 말하면 불쾌한 심정이다. 다짜고짜 이런 이야기를 한들 수긍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있겠어?”
“아아아….”
“내가 어떻게 해야 너를 믿을 수 있을까?”
“그… 그건.”
“네가 나에게 검은색 세계에 대해서 말해준 걸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아. 겨우 그것만으로는 내가 네 주인이 되어줄 수 있을 리가 없지. 어떻게 해야 네가 원하는 관계가 구축될 수 있을까?”
쓰레기 같은 딜이기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맞다.
“워, 원하신다면 그, 그 어떤 것이라도 드릴 수 있사옵니다.”
“내가 받고 싶은 건 그런 것이 아냐. 어차피 이 관계가 성립된다면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이 내 것인데… 아니면 말뿐인 관계를 원하고 있는 건가?”
“아, 아닙니다. 제… 제 모든 것이 주인님의 것입니다. 그, 그렇습니다.”
“내가 너를 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아니, 어떻게 해야 내가 안심하고 너를 들일 수 있을까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나.”
“물론입니다. 무, 물론 있습니다. 주인님은 의심이 많으셨으니까요. 네. 생각해 낸 방법이 있습니다.”
조금 흥분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설명해 줬으면 좋겠군.”
“주술입니다.”
“주술?”
“네. 주인님께서 저를 소유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주술입니다. 제 신체의 소유권을 주인님에게 양도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 것도 가능한가.’
들어본 적이 없는 방법이다.
비슷한 종류의 마법에 대해서 생각해 봤지만 생각나는 것이 없다.
아마 그녀가 가지고 있는 고유 주술인 모양.
그녀가 이 날을 위해 준비한 주술이라고 생각해 보면 대충 말이 맞아 떨어진다.
“제 자신에게 스스로 주박을 거는 종류의 주술입니다. 제 신체와 주인님과 정신을 직접적으로 연결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것 같군. 그렇지만….”
그 반대도 가능한 것은 아닌지 조금은 불안해지기는 했지만 그럴 가능성은 일단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필사적이듯이 나 역시 카스가노 유노라는 매물을 얻고 싶다.
굳이 머리 아프게 이런 짓을 하지 않고 빠르게 그녀를 취하고 싶은 심정.
도박은 싫어하는 편이지만 주사위를 한 번 던지는 것치고는 얻는 게 너무도 크다.
“한번 보지.”
“알겠습니다. 그럼 빠르게 의식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눈을 감은 채 활짝 웃는 그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자세한 표정은 확인할 수 없지만 마치 세상을 다가진 것만 같은 느낌.
누가 보면 복권이라도 당첨된 줄 알았을 것이다.
품 안에서 작은 단검을 꺼낼 때는 조금 움찔 하기는 했지만 서둘러 그것으로 자신의 팔에 상처를 낼 때는 그녀가 혈액을 매개체로 주술을 완성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연금술과 비슷한 건가.’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거의 다 됐습니다. 거의!”
“천천히 해도 상관없다.”
허겁지겁 바닥에 주술진을 그리는 모습은 가관.
분명히 천천히 해도 상관없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뭔가에 쫓기는 것 같아 보였다.
나 역시 마법과 연금술을 전문적으로 하는 만큼 그녀가 어떤 것을 하려고 하는지 봤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문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주술이 내 생각보다 더 어렵다는 것에 있다.
그녀 정도의 고위 마법사가 혈액을 매개체로 땀을 뻘뻘 흘려야 겨우 완성할 수 있는 주문이다.
다른 건 몰라도 주문의 효과만큼은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불안한 마음 반, 기대 반의 심정으로 그녀를 기다리자 이윽고 주술진의 한가운데 자리 잡은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
여전히 무릎을 꿇고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자 혈액으로 그려진 주술진에서 희미한 빛이 퍼져 나왔다.
율리에나에게서 반응은 없다.
최소한 나에게 해가 되는 주술은 아니다.
희미한 붉은 빛이 그녀를 감싸 안은 이후에 무녀는 무척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다시금 입을 열었다.
“송, 송구스럽지만 주인님의 혈액을….”
입을 벌리며 위를 올려다보고 있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살짝 상처를 내 그녀의 입 안에 떨어뜨린다.
“내 앞에 계신 분께 나의 모든 것을 바치기를 원하노라. 이 주박은 그 어떠한 것으로도 깰 수 없는 피의 맹약이 될 것이며 그 누구도 우리에게 간섭할 수 없으리라.”
순식간에 터져 나온 빛.
왠지 모르게 그녀의 머리를 붙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머리 위에 손을 올렸을 때 단편적이지만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 시야에 비쳤다.
말 그대로 내가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는 장면.
그녀가 봤던 검은색 세계였을 것이다.
‘싸구려 동정 집어 치워. 거지같은 년아. 네놈들은 전부 다 똑같아.’
‘아아아… 불쌍한 사람.’
‘네가 나를 동정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눈물을 흘리며 내 몸을 꽉 껴안는 그녀의 모습이 잠깐 동안 들어온다.
화아아아아아악!
다시 눈을 뜨니 그녀가 그린 주술진이 그녀의 몸으로 흡수되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성공했습니다, 주인님.”
지나치게 기뻐하는 듯한 얼굴, 괜스레 양심이 쿡쿡 찔려왔다.
‘너무 쓰레기 같은데….’
지금 이 모습을 1회 차의 이기영이 보고 있었다면 틀림없이 이쪽을 향해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이 새끼 완전 쓰레기 아니야?’
괜스레 자괴감이 엄습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