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
회귀자 사용설명서 126화
영혼의 단짝(3)
당연하지만 이지혜와 내가 내놓은 해결책은 여론을 천천히 뒤집기 시작했다.
암살자를 핑계로 빅터하르트를 불러들이는 것은 실제로 왕성 내 여론을 잠잠하게 만든 것은 물론 이토 소우타를 견제하는 효과까지 가지게 했다.
율리에나의 기능과 특성을 설명하는 건과 카스가노 유노의 증언이 맞물려져 사건 자체에 대해서는 할 말이 무척 많은 상황.
혹시 의도적으로 내가 검을 날린 것은 아닌지에 대한 가능성에 대한 문제는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이마저도 이토 소우타가 교황청 쪽에 청탁을 넣고 있지 않다면 금방 사라질 혐의였다.
아직까지 나에게 용의자 딱지가 붙어 있는 이유는 신성제국 내 왕성에서 처음 일어난 살인 사건이라는 사건의 특수성과 일본의 대형 길드의 체면을 세워 주려는 교황청의 발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거다.
‘물론.’
이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된 이유는 현재의 린델의 상태에 있다.
본래 린델은 실리아와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는 했지만 린델 테러 사건의 주범이라고 생각되는 야마토 길드의 함정에 빠져 죄 없는 시민의 목이 달아날 수도 있다는 소식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유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물론 목이 달아난다는 건 거짓말.
지금도 의자에 편하게 앉아서 음료를 마시고 있기는 하지만 린델의 시민들이 그렇게 믿어준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당연하지만 저것으로 끝이 아니다.
야마토 길드의 린델 침략 시나리오를 미리 배포해 린델 시민들에게 적대감을 키워놓는 것이 진짜 목표.
특히나 이지혜의 언론 플레이는 내 것보다 조금 더 과격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파격적이었기 때문에 정말로 린델과 실리아의 전쟁이 터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붉은용병이나 검은백조가 의도적으로 일부 과격파들의 행동을 억제하지 않는 다는 것.
언론을 대충 살펴봐도 금방 답이 나온다.
[일성 길드, 실리아 근처 라마델 산맥으로 폭격 마법 훈련 실시.]
[금일 오전 9시 린델의 일성 길드에서 라마델 산맥으로 폭격 마법 훈련을 실시했다. 실리아를 가로질러 라마델 산맥을 타격한 초장거리 원거리 마법은 그간 일성 길드에서는 선보이지 않은… 중략… 이에 일성 길드의 최고 존엄 이설주(21)는 일본놈들의 오만방자한 행태가 극에 달해 자꾸만 우리 길드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다고 발언했다.
자유 도시 실리아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강경발언 역시 서슴지 않은 것은 물론, 3일 뒤에는 실리아의 영해를 삼면 포위해 초장거리 폭격 마법 훈련을… 중략… 진행할 예정이다. -린델일보 종군기자 김성경]
그 일부 과격파 중에서도 어디에선가 많이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일성 길드의 행보는 당황스러울 정도. 나도 모르게 이지혜를 빤히 바라보며 사건의 진상에 대해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이 새끼들 이거 괜찮은 거 맞지?”
“네. 돈 달라는 거니까 안심하셔도 돼요. 어제부로 입금 끝냈고요. 전부 다 이쪽이랑 이야기가 되어 있는 행동이기는 하지만… 하는 짓거리를 보니 저도 조금 불안하기는 하네요. 이 정도로 해줄 줄은 몰랐거든요.”
“너무 심한 도발은 별로 좋지 않은데….”
“그쪽 길드 애들이 확실히 이상하기는 하지만 검은백조에서 확실히 브레이크를 걸어주고 있으니까 안심하셔도 되요.”
“개인적으로 알아?”
“음… 알면 안다고 하기는 하지만… 같이 술자리 한 번 가져본 게 다예요. 정신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아서 친하게 지내기는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쓸 데가 있을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전쟁, 전쟁 노래를 부르는 미친놈들이라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역시나 인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니까요.”
“별별 놈들이 다 있네.”
“네. 약하게 나가는 것보다 오히려 저런 게 효과가 있으니까요. 덕분에 린델 내에서도 전쟁이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으니까… 반응이 오기야 오겠죠.”
말하자면 지금의 린델은 터지기 직전의 폭탄인 셈이다.
실제로 실리아에서 온 상인들은 혹시라도 불똥이 튈까 빠르게 린델을 벗어나고 있었고 죄 없는 대만의 대형 길드 역시 자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대피 절차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전쟁은 안 나요. 신성제국이 분쟁을 막고 있는데 어떻게 전쟁이 일어나겠어요? 안 그래도 공화국이나 왕국연합과의 관계도 틀어지고 있는데 두 도시의 정면충돌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이번 기회에 폭격 마법 훈련이나 실컷 하라고 하세요. 쟤네가 저러면 저럴수록 오빠는 안전해지니까.”
“아. 기왕 이렇게 된 거 율리에나의 정보도 최대한 뿌려. 특히 실리아 쪽으로… 신성력으로도 정화되지 않는 광역 저주, 율리에나를 매개체로 사용해서 도시 하나 전체에 저주를 내릴 수 있는 광역 마법의 연구가 진행 중이고 실제로도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나쁘지 않네요.”
“외부 종군기자들도 실리아로 보내서 언론 플레이 진행하고… 아, 그 일성 길드에서도 정신 공격 전략 병기 개발 같은 것도 진행하고 있다고 발표하라고 서신 넣어봐. 이런 식으로 입 좀 잘 터는 애들 같은데. 아무래도 정상인들이 발표하는 것보다는 미친놈들이 직접 움직이는 게 더 효율적일 테니까.”
“네네. 알겠어요. 일본 쪽 언론은 건드리고 있는 거죠?”
“일단은 불안감 조성 정도는 하고 있어. 우리 무녀님께서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도중이니까. 일본 쪽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아니, 일본에는 최대한 신경 쓰지 마.”
“참 능력도 좋아. 카스가노 유노랑은 어떻게 연줄을 만들었어요?”
“알고 싶어?”
“아뇨. 괜찮아요. 쓸모만 있다면야 어디 사는 누구든 무슨 상관이겠어요.”
“난 누나 그런 면이 좋더라.”
“이 타이밍에 고백?”
“글쎄.”
천천히 이쪽으로 얼굴을 가져다 대는 이지혜의 모습이 보였다.
나 역시 살짝 몸을 일으키기는 마찬가지. 바깥에서 쿵쿵 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오빠!”
“시간 됐나 보네요.”
“그러네. 슬슬 이쪽도 준비해야겠네.”
“준비는 이쪽에서 도와드릴 거예요. 용병여왕님께도 이미 말씀드렸으니까 일단은 기다려 주세요.”
오늘 저녁에 있을 사교모임에 참석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일단은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는 정하얀을 들여야 했기 때문에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전과는 조금 달라진 모습의 정하얀.
지금까지 후드를 뒤집어 쓴 마법사의 모습을 많이 봐와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사교모임에 참석할 정하얀의 모습은 꽤나 아름다워 보였다.
하얀색 드레스에 목걸이와 귀걸이를 하고 있는 모습.
전체적으로 무척이나 깔끔해 보인다.
본래 굉장히 좋은 몸매를 가지고 있었던 만큼 라인이 그대로 사는 드레스는 마치 그녀를 위해 준비된 드레스인 것 같아 보였고 귀엽고 맹해보이던 얼굴에 들어선 화장은 조금은 섹시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전체적으로 오버하지 않고 자신의 색다른 매력을 이끌어 냈다는 느낌이 강했다.
“예쁘네. 우리 하얀이.”
“정, 정말요?”
“물론.”
“헤헤헤헤….”
웃으면서도 힐끔힐끔 방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이지혜를 바라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적대감이라기보다는 고마워하고 있는 듯한 얼굴.
반 감금 상태에 있는 나를 풀어줘 함께 있게 만들어준 장본인이었으니 정하얀이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어머, 우리 하얀 씨 너무 아름다우시다.”
“정, 정말요? 고마워요, 지혜 씨.”
“오늘따라 조금 성숙해진 느낌이네요. 이렇게 일찍 끝내신 거 보니까 빨리 오빠한테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그렇죠?”
“네.”
“예쁜 커플이네요. 아. 지금 막 기영 오빠의 준비를 하려던 참이었는데… 밖에서 기다리시겠어요? 아니면 여기 앉아서….”
“여기 앉아 있을게요!”
“네. 편한 대로 하세요.”
정하얀이 한쪽에 자리 잡자 본격적인 단장이 시작됐다.
사실 그냥 이대로 가고 싶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자리에 어울리고 격식에 맞는 복장을 하고 가는 것은 필수라고 할 수 있는 부분.
물론 이지혜가 나를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것은 조금 과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다들 들어와요.”
“네.”
여성 길드원이 많기로 소문난 검은백조의 아티스트들이 등장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별로 잘생긴 외모는 아니지만 본판은 그리 나쁘지 않으니까요. 다들 최선을 다해주세요. 우리 오빠가 그런 곳 가서 무시당하는 일은 없어야 되잖아요?”
“네. 이지혜 님.”
별로 잘생긴 외모가 아닌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순식간에 이쪽으로 달라붙어 오는 이들을 보니 잠깐 한숨이 나온 것은 당연지사.
별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이지혜가 전부 알아서 해줄 테니까.
“앞머리 조금 남기는 게 좋겠네요. 화장팀은 기왕이면 선해 보이는 인상으로 부탁드려요. 조금 우수에 젖은 것 같은 느낌으로 약간 병약한 느낌으로 가는 것도 좋겠네요. 의상팀은 최대한 강한 색상은 피해주시고… 포인트를 주는 게 더 좋을 것 같네요.”
“네.”
“네.”
“붉은색은 아니에요. 제 말 들은 거 맞아요? 피해자처럼 보여야 한다니까. 귀부인들이 동정심을 가질 만한 느낌으로… 최대한 어려 보이게… 정장 말고 제국양식의 복장으로 할 거예요.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게 좋으니까.”
“네… 네. 알겠습니다.”
겉모습이 중요하다는 건 알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 역시 정치의 일환이니까.
그렇지만 땀을 뻘뻘 흘리며 어떻게든 이지혜의 요구에 맞게 움직이고 있는 검은백조 직원들의 모습은 가관.
지구에서 이름난 메이크업 아티스트들과 코디네이터, 심지어는 뷰티 크리에이터였던 이들도 보인다.
거울로 내 모습을 확인하고 있기는 하지만 솔직히 뭐가 달라지고 있는 지 알 수가 없을 지경.
그렇지만 정하얀의 눈에는 그게 아닌 모양이다.
이쪽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얼굴이 조금씩 조금씩 멍해진다.
‘쟤는 원래 저러니까.’
“하얀아.”
“…….”
“하얀아?”
“…….”
“하얀아?!”
“네… 네!”
심지어 이쪽의 말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보니 나쁘지 않은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시킨 일은 전부 다 끝내 놨지?”
“네?”
“파란에 보내기로 한 물건이랑 무녀한테 전해야 하는 서신.”
“네. 전부 해놨어요. 오빠 말대로 마법으로 꽁꽁 묶어서 보냈어요.”
“잘했어. 역시 하얀이가 최고네?”
“히… 히히. 그런데 오빠. 그럼 이제부터는 계속 여기에 계시지 않으셔도 되는 건가요?”
“응. 행동하는 데 제약이 없지는 않겠지만 사교모임에 갈 수 있을 정도면 이쪽 편의를 많이 봐주고 있는 거니까. 전부 지혜 씨 덕분이지 뭐.”
“아….”
“아마 시간이 지나면 곧 누명도 벗길 수 있을 거야.”
“그, 그거 다행이네요.”
정하얀과 대충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조금 흘렀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이지혜와 검은백조의 길드 여러분들은 피땀을 흘리며 내 모습을 완성하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중,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내 눈에도 뭐가 달라졌는지 보인다.
‘허….’
왠지 모르게 미남이 된 것 같은 느낌. 타고난 본판을 이길 수야 없겠지만 이정도면….
‘우리 현성이한테도 비벼볼 만한데….’
옷빨, 머리빨, 화장빨이라는 게 뭔지 대충 이해가 간다.
거의 대부분이 마무리 됐다고 했을 때 몸을 일으키니 다시 한번 전신거울에 내 모습이 비쳤다.
기본적으로는 양복의 형식을 띄고 있기는 하지만 거추장스러운 장식이 많은 제국귀족의 옷은 확실히 움직이기 편하지 않다.
“한번 돌아봐요, 기영 오빠. 제대로 잘됐는지 볼 테니까.”
“네, 지혜 씨.”
“장식들이 조금 삐뚤어졌네.”
이지혜가 슬그머니 입을 열며 잘못된 점을 꼬집었지만 검은백조의 길드의 길드 직원의 표정은 여전히 좋다.
‘여우네.’
이쪽으로 슬그머니 다가온 이지혜가 마지막으로 내 옷매무새를 점검해 주는 모습은 마치 출근하는 아버지의 넥타이를 매어주는 어머니의 모습.
정하얀에게 과시하는 건지 아니면 본인이 직접 하고 싶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정하얀의 얼굴에는 왠지 모를 짜증이 들어서고 있었다.
‘차라리 대놓고 기싸움을 했다면….’
이쪽이 조금 더 편해질 것 같은 느낌.
살살 정하얀의 속을 긁으며 영역을 침범하려고 하고 있는 이지혜의 모습은 확실히 고단수다.
“우리 오빠 너무 멋지시네요. 그렇죠? 하얀 씨?”
“네? 네….”
중요한 일을 앞두고도 이런 도발을 하는 것은 멈출 수 없는 모양.
“나, 나머지는 제가….”
“지금까지 앉아계셨으니까 계속 앉아 계세요. 이런 건 전문가한테 맡기는 게 좋잖아요?”
심지어 내 목을 슬그머니 팔로 감싸며 상의의 뒤를 정리하고 있는 액션은 대놓고 정하얀을 겨냥한 것 같은 행동이었다.
‘그만해. 지혜 누나….’
“옳지. 다됐다.”
“고마워요, 지혜 씨.”
“뭘요. 당연히 해야 되는 일인데요 뭐. 우리 하얀 씨가 아직 어리고 아무것도 모르니까 저라도 열심히 오빠를 내조해야 되지 않겠어요? 여자친구가 너무 어려서 고생이네요. 호호.”
대놓고 도발하는 듯한 발언, 이지혜의 얼굴을 본 순간 확실히 우리가 영혼의 단짝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이게 내조야, 애송아.’
라는 표정으로 정하얀에게 빅 엿을 먹이는 이지혜의 얼굴은 평소의 내 표정과 굉장히 흡사했다.
“이제 그만 나갈까요? 저도 슬슬 준비해야 되니까요. 하얀 씨, 오늘 하루 우리 오빠 잘 부탁드려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