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회귀자 사용설명서 127화
양보하지 않는다
“그럼 모임에서 봐요. 기영 오빠, 하얀 씨.”
내 준비가 대충 끝나자 분위기가 좋지 않은 이곳을 나가버리는 이지혜가 갑작스레 원망스러워졌다.
정하얀의 표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살기를 내뿜거나 죽여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은 것 같았지만 얼굴에 짙게 드리운 패배감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장식이 삐, 삐뚤어졌어요. 오빠….”
‘안 삐뚤어졌어.’
“아… 괜찮은 것 같은데.”
“아니요. 삐뚤어졌어요. 제, 제가 고쳐드릴게요.”
“아… 응… 고마워, 하얀아.”
이지혜와 자신의 차이를 실감하고 있는 것이 당연.
곱게 꾸민 예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헐레벌떡 뛰어온 자신과는 다르게 이지혜는 이쪽을 완벽하게 케어해 준 이후에 밖으로 나갔으니 분명 느끼는 게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어린애가 아니고 여성의 역할이 꼭 저런 내조에 국한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장 김현성이 단상에 설 일이 생긴다면 이지혜의 자리에 내가 서서 이것저것 신경 써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
화장을 해줄 수는 없지만 옷의 코디나 전체적인 이미지를 잡아주는 것은 우리 같은 내조인에게는 꼭 해야 할 일이다.
내 대리인단, 그중에서도 대표 대리인을 하고 있는 만큼 이지혜가 보여준 행동은 다분히 정상적인 행동이었다.
문제는 그 모든 모습을 받아들이는 입장에 있는 정하얀.
‘이게 내조라는 거다’라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지혜의 모습과 아직 어려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대사는 마음속에 훅 치고 들어왔음이 분명할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이니까….’
내 목숨을 구했다는 업적은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진 것이 분명.
벌써부터 굉장히 초조해하는 모습이 보였다.
“먼, 먼지가 있네요?”
“아. 고마워, 하얀아.”
“머리에 뭐가 묻어 있어요. 오, 오빠….”
생각보다 충격적이었는지 갑작스레 이곳저곳을 챙기는 모습은 가관.
눈이 글썽글썽한 걸 보니 미안함의 눈물을 쏟기 일보 직전의 느낌이라 굉장히 부담스러워졌다.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챙겨주는 게 이지혜가 아니라 자신이었어야 하는 자책, 내 입장에서는 정하얀이 나에게 달라붙어 이것저것 해주는 것보다 이지혜가 처리해 주는 게 더 좋기야 하지만 이런 사실을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침부터 바, 바빠서요. 저도 준비하고 있었는데… 시간이 남으면 챙겨 드리려고 했거든요. 오, 오빠가 시키신 일 때문에… 깜, 깜빡….”
‘괜찮으니까. 변명하지 마, 하얀아….’
“아냐. 괜찮아. 하얀이가 오늘 얼마나 신경 썼는지 보이니까. 이렇게 예쁜 모습을 보니까 나도 기분이 좋네.”
이지혜가 동시에 처리하고 있는 일들을 만약 정하얀이 알고 있다면 틀림없이 자괴감에 휩싸이리라.
아주 간단한 심부름만을 한 정하얀과는 다르게 이지혜는 린델의 여론조작과 언론조작, 왕성내의 인맥관리 뿐만이 아니라 이쪽을 변호하는 일까지 해내고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내가 정하얀에게 원하는 것은 이지혜의 역할이 아니다.
모두 각자가 할 수 있는 분야가 정해져 있고 각자의 역할이 있다.
“하얀이는 잘해주고 있어. 너무 여러 가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지금처럼만 잘 참아주고 지금까지 성장했던 것처럼 무럭무럭 성장해 주면 된다.
규격 외의 대마법사의 무대는 이곳이 아니다.
“오, 오빠….”
‘여긴 나와 내 단짝의 무대지.’
슬쩍 밖으로 나가니 최근에 인사를 나눴던 빅터하르트와 그의 기사단원 몇몇이 보였다.
살해범을 지켜줄 오늘의 호위무사들이다.
“안녕하십니까, 빅터하르트 님.”
“조금 늦었군, 젊은이.”
“이렇게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쉬고 있는 늙은이를 불러낼 정도로 위험한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젊은이가 생각보다 겁이 많군.”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희라는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하더군. 그럼 천천히 가겠나?”
“네. 물론입니다.”
“쯧 혹시나 해서 묻는 거지만 말일세….”
“예.”
“실리아 쪽의 인원을 죽인 건….”
“당연히 아닙니다, 빅터하르트 님. 어디까지나 저는 살해 위협을 받은 피해자에 불과합니다. 율리에나는 저를 지키기 위해 정당한 행동을 했을 뿐입니다.”
“그렇군.”
“빅터하르트 님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토 소우타가 교황청과 결탁하고 있어 저희 쪽을 압박하고 있기 때문에 제가 용의자로 몰린 것뿐입니다. 모든 것이 계산되어 있는 행동이었을 겁니다. 저희 파란에서 야마토 길드가 린텔 테러 사건의 주범이라고 발표한 보복이겠지요.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저를 암살하거나 저를 살인자로 몰아가려는 수작입니다.”
“그런가.”
“예. 애초에 율리에나를 막을 수 없었다는 게 조금 더 의아하지 않습니까. 빅터하르트 님께서는 어떻습니까?”
“뭘 묻는 건지 모르겠군.”
“만약 제가 가지고 있는 검이 이 주변에 있는 누군가를 해친다고 가정했을 때 빅터하르트 님께서는 검을 막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
“이토 소우타 역시 율리에나를 막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곳의 초대 받은 자유민은 아마 대부분이 율리에나를 막을 수 있을 겁니다. 제가 그자를 고의로 살해한 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그런데 자네는 용의자가 되어 있군.”
“세상이 꼭 진실대로 돌아가는 건 아니니까요. 이건 이미 단순한 살해사건이 아닙니다. 조금 더 정치적으로 얽혀 있는 일이 되어버렸지요. 황제파와 교황파로 나뉜 신성제국 내의 정치 싸움. 린델과 실리아로 번진 이권 싸움 말입니다.”
“그래서 린델 쪽에 이상한 소문을 퍼뜨렸나 보군.”
“…….”
무장인지 알고 있었는데 나름대로 머리도 굴릴 줄 알았던 모양. 심기가 불편하다는 표정에는 살짝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내 일찍이 젊은이 같은 친구들을 많이 봐왔지. 뱀의 혀를 가지고 있는 친구들 말이야.”
“…….”
‘당신 같은 눈치 빠른 영감들이 이래서 싫다니까.’
산전수전 다 겪은 늙은이답게 눈치가 보통 빠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이를 뒤로 먹지는 않은 모양.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곧바로 할아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통 그런 이들은 일신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켜왔네. 그리고 그 본인 역시 항상 끝이 좋지는 않지. 주변 사람은 물론 결국에는 자신조차 망가뜨리는 게야.”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쯧. 모르는 척하지 말게나. 이쪽도 이쪽 나름대로 들려오는 게 있으니까. 지금 린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실리아에 때한 지속적인 도발은 모두 자네가 꾸민 일이 아닌가?”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영감의 눈이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더 이상 시치미 뗀다고 해도 별로 성과가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은 당연지사.
결국에는 슬쩍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반 정도는 맞습니다.”
“…….”
“빅터하르트 님이 좋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이해가 가기는 하지만 저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제가 린델에 손을 쓰지 않았더라면 저는 이 모임에 참석하는 대신 법정에 서게 됐을 겁니다. 이토 소우타를 비롯한 교황파의 덫에 걸려 모르긴 몰라도 조금은 커다란 피해를 감수해야 했겠죠.”
“목숨을 잃지는 않았을 것이네.”
“당연히 그랬겠죠. 저는 용병여왕이 아끼지 마다않는 정부고 요조라 길드 무녀의 손님이니까요.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만약 제가 아무런 뒷배로 가지고 있지 않은 일반인이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목이 날라 가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건.”
“아마도 어려울 겁니다. 양보는 영감님 같은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단어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분쟁을 최소화하기 위해 제가 그들에게 져줬다고 가정합시다. 영감님, 인간이란 말입니다. 무척이나 단순해서 호의가 계속되면 그것이 권리인 줄 압니다. 한 번을 양보하면 그 다음을 양보해야 되고 그 다음을 양보하면 또 그 다음을 양보해야 합니다.”
“…….”
“수많은 자유민 중에도 이곳에 온 제가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여기에서 영감님과 대화할 수 있는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별다른 재능도 특기도 없는 멍청이가 어떻게 이곳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용병여왕이 아끼는 사람이라서가 아닙니다. 무녀의 손님이라서가 아니에요.”
“…….”
“제가 그 어느 것 하나 양보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에 있을 수 있는 겁니다.”
“쯧….”
“양보하지 않아서 이렇게 신성제국 최고의 무인의 보호를 받고 있는 거고 양보하지 않아서 용병여왕의 뒤에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겁니다. 양보하지 않아서 법정이 아닌 파티장에 있을 수 있는 거고 양보하지 않아서 살아 있는 겁니다. 특별한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양보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는 이들은 저 같은 놈들을 이해하지 못해요.”
“생각하는 게 독특하군.”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입니다. 신성제국의 황제가 어째서 교황의 눈치를 보게 되었는지 생각하면 답이 나옵니다. 아마 수세기 동안이나 양보해 왔을 겁니다. 양보하고, 양보하고 또 양보해서 이 지경이 된 겁니다. 분쟁을 피하는 인간이나 집단은 목소리를 낼 수가 없어요. 영감님의 마음도 이해가 갑니다. 제국을 사랑하는 마음도 당연히 이해가 가요. 그렇지만 그건 영감님이 강자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세상에는 저 같은 놈들이 아주 많습니다. 남이 양보하고 남이 땅바닥에 떨어진 것을 게걸스럽게 먹는 이들 말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영감님이 저들을 키운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궤변이로군. 자네 말은 전부 궤변이야.”
“그런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래도 말입니다. 일정 부분 공감하시는 게 있을 겁니다. 만약 검을 휘둘렀더라면 양보하지 않고 내 것을 탐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싸움이 일어나고 다툼이 일어났겠지. 내 손에는 수많은 피가 묻었을 것이고 난 그것 때문에 후회와 자책으로 얼룩진 인생을 살아갔겠군.”
“대신 영감님이 사랑해 마지않는 황제와 영감님의 후대들은 행복한 인생을 살아갔을 겁니다. 물론 조화가 중요하다는 건 이해합니다. 당장 교황파를 쳐내라는 이야기를 말씀 드린 것도 아닙니다. 이미 그들은 이 신성제국의 일부니까요. 그래도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양보하지 않으셔야 합니다.”
“…….”
“저는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양보하지 않고 있을 뿐이에요.”
“만약에….”
“네.”
“만약에 그대가 말하던 저들도 양보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글쎄요. 저도 전쟁을 피하고 싶은 건 마찬가지입니다. 한 가지 확실하게 말씀 드릴 수 있는 건 저는 절대로 피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비키는 건 상대방이 해야 될 일이예요. 저는 카드를 던졌고 그걸 받을지 피할지는 저들 손에 들려 있습니다.”
“만약 저들이 피하지 않는다면….”
“저는 이미 던졌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생각보다 무서운 젊은이로군… 또 뛰어나기도 하고… 희라 고년이 어째서 자네를 마음에 들어 하는지 알겠어.”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영감님.”
“쯧. 희라 고년을 좋아하기는 하나?”
‘눈치 없는 늙은이.’
계속해서 길을 걷고 있는 와중에 들려온 할아범의 목소리에 내 옆에 있는 정하얀이 나를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한 표정.
어떻게 말을 해도 답이 없겠지만 이럴 때 내가 가장 사랑하는 단어가 있다.
“반 정도는.”
“그건 또 다행이로구만.”
“많이 아끼시는 모양입니다.”
“물론. 웃기는 말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희라는 내게 딸 같은 아이일세.”
마지막 말에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파티장의 입구에 도착했는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차희라의 모습이 보였으니까.
붉은색 드레스에 붉은색 머리 새빨간 목소리와 새빨간 입술을 하고 있는 생소한 모습의 그녀가 한 눈에 들어왔다.
“영감이랑 자기,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열심히 했어?”
“별것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둘이 그렇게 나란히 들어오니까 기분이 좋네. 세컨드도 음… 조금 예뻐 보이고. 어디 가서 꿀리지는 않겠는데? 어때 자기? 오랜만에 입어보는 것 같은데 나 좀 괜찮나?”
괜찮고 자시고가 아니다.
노출도가 높은 드레스가 가리지 못한 곳에 자리한 것은 수많은 상처.
그녀가 지금까지 얼마만큼 투쟁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상처들이다.
영감님과의 대화에서 지나치게 감상에 젖었던 모양. 그녀 역시 종류는 다르지만 나와 비슷한 인생을 살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투쟁.
그녀도 지금의 위치에 있기까지 물불 가리지 않고 오직 직진했을 것이다.
차희라는 불이다.
활활 타오르고 꺼지지 않는 불.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과 자신의 몸의 상처를 보여주기를 꺼리지 않는 태도.
절대로 자신은 피하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 실제로도 그녀는 피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름다워.”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목소리 차희라의 얼굴이 붉어졌고 내 손을 꽉 잡은 정하얀의 손에는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붉은용병 길드의 길드 마스터 용병여왕 차희라 님과 제국기사단의 기사단장 빅터하르트 님. 파란 길드의 이기영 님, 마찬가지로 파란길드의 정하얀 님이 입장하십니다.”
우리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