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
회귀자 사용설명서 141화
집으로(1)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날이었다.
물론 다른 이들에게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날은 아니었다. 실리아에 있는 대형 길드 하나가 순식간에 사라졌으니 아마 밖에서는 난리가 났을 거라고 생각했다.
최근에 린델 일보에서도 그 이야기를 비중 있게 다루고 있는 편인 만큼 어느 주점을 가도 이토 소우타와 야마토 길드의 이야기를 하고 있음이 틀림없으리라.
왕성에 있는 야마토 길드원들은 이토 소우타가 죽었던 그날 모두 함께 처형당했다.
요조라와 검은백조, 붉은용병이 합류한 교황청의 군대가 녀석들을 그대로 밀어버렸고 실리아의 인원들은 그 어처구니없었던 광경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물론 모두가 죽은 것은 아니다.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 이들은 목숨을 부지할 수는 있었지만 어찌됐든 그것은 소수에 불과.
전투 능력이 있거나 이토 소우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이들은 대부분 그 목숨을 잃었다.
한 번 줄을 잘못 선 것치고는 꽤나 처참한 결과물.
‘쯧….’
현장에 없었던 나는 야마토 길드의 최후를 보고서로만 접해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었지만 어찌됐든 이쪽에 이득이라는 이야기다.
린델 테러 사건으로 인해 구겨진 차희라의 자존심을 세울 수 있었고, 교황청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요조라 길드와 동맹을 정식으로 체결한 것 역시 커다란 성과.
검은백조, 붉은용병, 요조라 그리고 우리 파란까지 포함한 이 자유 도시 연맹은 신성 제국 내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처음이라고 했던가.’
본래 자유 도시끼리 거래와 대화를 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밀접한 동맹을 맺은 것은 사례는 처음.
서로서로 양보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에 가능한 행보였다.
물론 그 동안 나오지 않았던 사례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그, 그럼 오빠가 사제님이 되는 건가요?”
“아마 그렇게 되겠지.”
자유민 중에 교황청의 직위를 받은 또 다른 첫 번째 사례. 그게 바로 이기영이라는 거다.
‘아름답지.’
바젤 추기경의 영향력을 생각했을 때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욱더 확실한 직위.
대주교급과 거의 동급이라고 할 수 있는 명예주교라는 직함은 사실 이쪽에게는 과분할 정도였다.
왕성의 직위와 비교한다면 대충 백작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영향력.
그 어느 신전을 가도 나는 대우 받는다. 이곳에 존재하는 몇몇 신 중에서 최고라고 할 수 있는 베니고어 여신의 명예주교.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울림이라고 생각했다.
잠깐 동안 다른 생각을 한 뒤에 앞을 바라보자 뭐가 그리 불안한지 창백해진 정하얀이 시야에 비쳤다.
대충 어떤 걸 걱정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더 문제가 커지기 전에 해명하는 것이 옳으리라.
“걱정하지 않아도 돼. 말 그대로 명예직일 뿐이고… 책임은 없고 권리만 있는 자리거든. 굳이 기도회에 참석하지 않아도 되고 교황청에 들락날락거리지 않아도 되니까.”
“아….”
“물론 결혼이랑 연애도 가능하고.”
“아!!!”
역시나 이쪽이 문제였던 것 같았다.
정하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라고 할 수 있으리라.
자유 도시에 있는 사제들과는 다르게 베니고어 여신을 섬기는 사제들에게 결혼은 금기지만 자유민 신분의 명예주교인 나에게도 통용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신성한 포도주를 주기적으로 유통해야 되는 조건이 있기는 하지만 다른 제한이 있는 건 아니니까. 공짜로 납품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이쪽은 돈을 벌 수 있으니까 좋지.”
“그, 그렇네요.”
“신전과 가까워진다는 건 좋은 거야. 특히 신성 제국에서는….”
“그럼 정확히 어떤 게 좋은 건가요?”
“여러 가지가 있지. 일단 대표적으로는 대우받는다는 것.”
“아.”
“교황청의 대주교라는 건 직함으로만 따지만 네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직위가 높아. 교황, 추기경, 총대주교, 대주교라는 걸 생각하면 대충 이해가 되지? 물론 중간 중간에 이단심문관장이나 신성 기사단장 같은 직위가 있기는 하지만 교황청에서 무력집단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2순위에 불과하니까.”
“그렇군요.”
“응. 내가 얻은 명예주교라는 직위는 직위 상으로는 대주교의 위치와 동일하다고 생각해면 돼.”
“엄청 높네요. 헤헤.”
특혜야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이단심문관들과 신성 기사단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
기본적으로 나에게 문제가 생기면 내가 이들을 자유롭게 부릴 수 있게 되어 있다.
물론 던전에 데려간다거나 개인적인 전쟁에 사용하는 것은 불가.
그것만 해도 어딘가.
혹시 모를 위험에 처했을 때 교황청의 무력 집단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건 내겐 무척이나 유리한 내용이다.
‘만약 추기경급으로 올라가게 된다면….’
교황청에서 보유하고 있는 세 명의 템플러가 내 위험에 반응한다.
아직 내 눈으로 확인한 적은 없지만 교황청이 자랑하는 괴물들인 만큼 적어도 차희라나 빅터하르트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일 것이다.
‘어쩌면 조금 모자를 수도 있고.’
어디까지나 자유민인 만큼 추기경급의 사제로 올라가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도 있지만 사람 일이라는 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이다.
당장 내가 대주교와 비슷한 직위를 얻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한 오 년 정도 열심히 비비다 보면 자리가 날 수도 있고 자리가 나면 좁은 문을 비집고 들어갈 수도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겉만 번지르르한 왕국의 귀족 작위보다는 몇 백 배는 이득.
진짜 귀족은 황제 쪽이 아니라 교황 측이라는 거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황제파를 배척하는 것은 아니될 일.
본진이랑 멀티 모두 신경 쓸 줄 알아야 되는 사람이 게임에서 이기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걔네들 한테도 많이 얻어먹었으니까.’
일단 빅터하르트가 말한 것처럼 왕성에서는 내게 그리폰을 지급했다.
차희라 것과는 조금 다른 새하얀 그리폰.
명예주교라는 내 위치를 신경 써준 것 같은 느낌이기는 했다. 이곳에서도 종교는 순백의 상징이니까.
슬쩍 옆을 바라보니 성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크기의 녀석이 시야에 비쳤다.
차희라의 것보다는 작기는 하지만 날아다니기에는 무리가 없다.
괜스레 뿌듯해지는 느낌.
값비싼 외제차를 소유한 것만 같은 만족감이다.
사실 이 세계에서 그리폰의 가치가 높은 것을 생각해 보면 공장에서 양산되는 물건과 비교조차 할 수 없으리라.
‘크으….’
여기 올 때 그리폰을 받아서 갈 것이라고는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것도.
‘두 마리나.’
나머지 한 마리는 선물 받은 것 이라기보다는 빼앗아 온 것.
이토 소우타의 소유로 되어 있었던 그리폰이었다.
‘업어 오느라 노력했지.’
공중으로 붕 떠버린 녀석의 재산은 무척이나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탐이 났던 물건이다.
대놓고 소유권을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은근슬쩍 탐이 난다는 소문을 뿌리고 차희라에게 애교 아닌 애교를 부리자 자연스럽게 이쪽의 소유로 넘어오게 됐다.
어째서 녀석을 업어왔는지에 대한 이유는 뻔할 뻔자.
‘우리 현성이 챙겨줘야지.’
혼자서 고생한 우리 회귀자에게 주는 선물로는 딱 알맞다.
검은색의 우람한 녀석은 확실히 수컷이라는 느낌. 내 그리폰이 암컷이니 어쩌면 둘이 짝을 지어줘 사이좋은 가정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5년 후에는… 그리폰의 양산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이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전해져왔지만 시도는 하기 나름.
괜스레 행복해졌다.
“아, 오빠. 바젤 추기경님 오셨어요.”
“아… 응.”
이제 막 출발하려고 하던 찰나, 모습을 드러낸 것을 보니 확실히 이쪽이 마음에 들긴 든 모양.
어제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눴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 주니 감사할 따름이다. 심지어 다른 이들의 모습도 보인다.
카트린 공작부인과 마를린 영애, 엘리제 백작 부인, 제시카 대주교, 헬레나 이단심문관장.
그밖에도 몇몇 이의 모습이 보였다.
이쪽에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은 당연히 바젤 추기경. 아쉽다는 표정이 눈에 띈다.
“아직 출발하지 않으셨군요. 이기영 명예주교.”
“하하하. 아직 용병여왕님이 오시지 않으셔서 말입니다.”
“아….”
“사실은 바젤 추기경님이 배웅해 주시기를 기대했습니다.”
“허허허. 이기영 명예주교님은 언제나 넉살이 좋은 것 같습니다. 허허.”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나와 배웅해 주시니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라 이기영 명예주교님이 떠나시는데 당연히 배웅해 드려야지요. 이 늙은이가 너무 붙잡아 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아니요. 저도 충분히 즐거웠습니다. 조만간 또 찾아뵙겠습니다. 바젤 추기경님.”
이쪽의 손을 꽉 잡고 있는 바젤 추기경의 모습은 확실히 재미있다.
눈에 들어 있는 것은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엄청난 신뢰.
이 양반이 교황이 된다면 어쩌면 내가 추기경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나 역시 손을 꽉 잡게 된다.
물론 아쉬워하는 것은 바젤 추기경뿐만이 아니다.
“이기영 님.”
“아, 카트린 공작부인.”
“조금 안 좋은 타이밍에 오신 것 같아 제가 다 죄송하네요. 사교 모임도 제대로 즐기지 못하신 것 같아서….”
“아닙니다. 사실 전에는 조금 바쁘기는 했지만 요 며칠간은 정말로 재미있었습니다. 소개시켜주신 분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도 정말 즐거웠고요. 평생 만나볼 사람을 전부 다 만나본 것 같지 뭡니까. 모든 게 카트린 공작부인 덕분입니다.”
심지어 마를린 영애는 이상할 정도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쟤는 또 왜 저래?’
괜스레 그저께 봤던 카스가노 유노가 생각났다.
먼저 실리아로 떠나기 전에 오열했던 모습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한 달에 한 번씩 들르겠다는 약속을 해서 겨우 진정시키기는 했지만 무척이나 고역이었다.
그녀의 입장도 이해가 가기는 간다. 계속해서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게 가슴 아픈 것이 당연.
그렇지만 카스가노 유노는 실리아에서 해줄 일이 있는 만큼 린델로 데려갈 수는 없었다.
“흐으으윽… 흐으윽….”
“마를린 영애가 많이 아쉬운 모양이네요. 호호.”
“이, 이기영 님! 꼭, 꼭 다시 와주셔야 돼요. 끄윽….”
“네. 마를린 영애. 당연히 찾아뵙겠습니다. 틈이 나는 대로 올 테니 너무 아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엘리제 백작부인도 꼭 다시 만나기로 하죠.”
“네.”
“제시카 대주교님과 헬레나 이단심문관장님도 꼭 다시 뵙도록 합시다.”
“네. 이기영 명예주교님. 저희가 직접 린델로 찾아뵙도록 할게요.”
“이거 영광이로군요.”
그밖에도 많은 사람이 와 있어 한 사람 한 사람 인사를 해주기가 힘들 지경.
주로 직위가 높은 사람을 중심으로 조지기는 했지만 그밖에도 중요한 사람이 무척 많다.
좋은 유통망을 가지고 있는 귀족도 있고 잠재 능력이 높아 장래가 촉망되는 기사도 있다.
버릴 사람이 없다는 것이 문제.
인적 네트워크를 관리하는 건 확실히 어렵다.
순식간에 인기인이 된 듯한 기분이기는 했지만….
‘조금 지치긴 하네.’
그렇지만 티를 낼 수는 없다.
“혹시 그리폰을 타는 게 처음이시면 교황청에서 따로 기사를 붙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하.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다, 바젤 추기경님. 이미 몇 번 하늘을 날아봤는데 괜찮은 것 같더군요. 아무래도 여신님의 도움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이기영 명예주교님이라면 그럴 만하지요.”
“과찬입니다, 바젤 추기경님.”
슬슬 지루하다고 생각했을 때 즈음에 차희라가 빅터하르트와 함께 그리폰 이륙장에 도착했다.
저기도 여기저기 인사를 나누기는 마찬가지.
나를 슬쩍 바라본 이후에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슬슬 출발하지, 자기?”
“응. 누나. 다들 배웅에 감사드립니다.”
“교황청에는 언제든지 오셔도 됩니다. 이기영 명예주교.”
“하하하. 마지막까지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그리폰의 등에 살짝 올라타자 아니나 다를까 정하얀이 내 뒤에 자리를 잡았다.
차희라는 본인의 그리폰에 몸을 실었고 이토 소우타의 그리폰 위에는 붉은용병 길드의 간부 한 명이 올라탔다.
린델까지 대리운전을 해줄 모양.
살짝 고개를 끄덕인 이후에는 그리폰이 천천히 날갯짓을 하기 시작.
‘집으로 돌아간다.’
나를 둘러싼 배경들이 뒤바뀌니 집이라고 생각한 장소도 바뀐다.
아쉽기는 했지만 나쁘지는 않은 변화.
괜스레 집에 있는 가족들이 보고 싶어졌다. 아니, 그것보다는 다양한 선물에 반응할 우리 회귀자의 반응이 궁금했다.
‘현성아! 형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