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
회귀자 사용설명서 152화
마를린 영애(2)
괜스레 심장이 쿡쿡 찔려왔다.
그렇지만 김예리의 한마디보다 중요한 것은 이 상황이다.
몇 년간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한 장거리 커플처럼 대하려는 이 마를린 영애가 문제다.
아직까지 포옹을 하고 있는 그녀를 슬쩍 떼어내며 살짝 입을 열자 곧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오랜만에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마를린 영애.”
“저도 마찬가지예요. 이기영 님.”
“미리 마중 나와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사, 사실 언젠가 한 번 들린다는 말씀이 적혀 있는 편지를 받은 후에 이기영 님께서 오시는 날만을 기다렸답니다.”
“네?”
편지를 보낸 시점부터 이곳에 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15일 정도. 계속해서 이쪽을 기다렸다는 게 조금 당황스러웠다.
‘애도 좀 이상한데….’
[제국민 마를린 베라의 고유 기벽을 확인합니다.]
[집착하는 소녀]
[관심 있는 것에 광적으로 몰두하며 집착합니다.]
‘시바….’
앞으로는 조금 거리를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마를린 베라의 성향은 순수한 귀족영애.
당시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을 거라고 판단했었지만 자세하게 속을 들여다보니 또 조금 다르다.
정확히 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정상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
캐슬락 영주의 따님이라는 것밖에는 장점이 없으니 적당한 선에서 밀어내는 게 옳다.
‘머리 아파질 수도 있어.’
제2의 정하얀을 만들고 싶지는 않다.
“높은 성 위에서 항상 린델에서 소식이 들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꼭 들려주실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네….”
“린델에서 나오는 소식지도 직접 전달 받아 읽어보고 있답니다.”
“아… 네….”
‘…….’
“오늘 아침에 저 멀리서 오는 마차를 보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아! 그러고 보니 같이 오신 분들께 인사가 늦었군요. 안녕하십니까, 캐슬락에 오신 손님 여러분들. 마를린 캐슬락이라고 합니다. 편하게 마를린이라고 불러주셔도 됩니다.”
“반갑습니다, 마를린 영애.”
“이쪽은 제가 몸을 담고 있는 파란의 길드 마스터 김현성 씨라고 합니다. 나머지 분들과도 모두 인사 나누시죠. 마를린 영애. 하얀 씨는 뵌 적이 있으시죠?”
“네. 정하얀 님도 반갑네요.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파란 길드 마스터님.”
“저도 마를린 영애에 대해서는 자주 전해 들었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이곳에 머무는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많이 들어보기는 개뿔… 인사 치례라도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마라.’
왕성에 김현성에 대한 이야기를 수차례 뿌린 건 진실이지만 김현성에게 마를린 영애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은 한 번밖에 없다.
괜히 자주 전해 들었다는 이야기를 해주는 건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정하얀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었으니까.
‘뭔가 변명을 해야 하나?’라고 생각하던 찰나 옆에서부터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늦게 뛰어왔는지 숨을 헐떡이는 목소리였다.
“후우… 후우…. 이기영 명예주교님!”
“유다 대주교님! 캐슬락 신전에 계셨군요.”
마찬가지로 교황청에서 만난 작은 인연. 뭐, 같이 차를 마신 게 전부지만 우리 교황청 식구들은 조금 많이 끈끈하다.
“미리 연락을 해주셨으면 마중 나갔을 텐데요. 허허허.”
“하하하. 바쁘신 분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거 유다 대주교님이 오실 줄 알았으면 선물이라도 가져왔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캐슬락에 계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허허. 제가 말씀 드리지 않은 모양이군요. 선물은… 큼. 마음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어떻게. 바젤 추기경님을 잘 계십니까?”
“허허. 그분은 여전하십니다. 베니고어 여신님을 모시는 것에 여념이 없으신지라….”
“그렇군요. 현성 씨. 잠깐 이쪽으로… 말씀 드렸었지요? 이쪽은 제가 몸을 담고 있는 파란의 길드 마스터 김현성 님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저희 길드의 사제님인 선희영 님이시고요. 빈민의 성녀라고 불릴 만큼 봉사에 힘써주시고 계신 사제님입니다. 린델에서 신의 뜻을 설파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사제 중 한 분이시지요.”
“오오오. 이분이 그 김현성 님이시로군요. 그리고 이쪽이 선희영 사제님이시고….”
“네.”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김현성 님. 공명정대하고 정의로우며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이기영 명예주교가 입이 닳도록 칭찬한 이유가 있었군요. 눈이 무척 깊습니다.”
“과찬입니다, 유다 대주교님. 파란의 길드 마스터인 김현성이라고 합니다.”
“빅토리아 주교! 이쪽으로 와서 선희영 사제님과 인사 나누시지요!”
“네. 유다 대주교님!”
“자유민 중에서도 이런 사제님이 있다는 건 복 받은 일입니다.”
“하하하하하하.”
순식간에 서로 인사를 나누고 시끌벅적해지는 분위기 때문에 대충 마를린을 떨쳐낼 수 있었다.
정하얀과도 안면이 있는 이들이 그녀에게 인사하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정하얀은 저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크게 관심이 없는 모양.
오히려 이쪽에 꼭 달라 붙어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누구보다 가장 바쁜 것은 김현성.
갑작스럽게 자신을 향해오는 인사세례에 조금 당황한 것 같은 느낌이다.
인맥은 인맥을 만들고 그 인맥은 또 새로운 인맥을 만든다.
왕성과 교황청에 김현성에 대한 이야기를 뿌리며 긍정적인 분위기를 잡아주는 것만으로도 작업은 끝이라는 거다.
‘이게 형이야.’
별것 아니지만 능력이라면 능력.
기존 멤버들이야 그다지 혼란스러워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길드의 새로운 멤버인 조혜진은 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럴 만하지.’
파란은 잠재능력이 높다.
대외적으로 붉은용병, 검은백조, 카스가노 유노의 요조라 길드와 동맹관계고 포션 시장도 꽉 잡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파란의 위치는 잘 봐줘야 중형 길드.
물론 금전은 짭짤하게 만지기는 하지만 무력이 우선인 이곳에서는 가치가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대접을 받고 있으니 신기한 게 당연할 것이다.
막말로 차희라와 카스가노 유노가 손을 잡고 캐슬락을 방문해도 대주교가 저들을 마중 나오지는 않는다.
도시 안에 있는 주요 인물은 전부다 나온 것 같은 상황이니 저렇게 황당한 표정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혜진아, 알아서 잘 처신해줘.’
“밖에서 이럴게 아니라 일단 안쪽으로 모시는 게 좋겠네요.”
“허허허. 그렇게 하시지요. 마를린 영애. 이기영 명예주교님이 오신다는 소리에 반가워 늙은이가 시간을 뺏었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환영해 주셔서 기쁠 따름입니다. 대주교님.”
“여전히 우리 이기영 명예주교님의 입은 꿀을 바른 듯합니다. 허허. 그럼 마를린 영애 말대로 빨리 들어가시지요. 일단은 영주성에서 머무르면서 쉬시고 신전에도 꼭 들려 주셔야 합니다.”
“네. 물론입니다. 유다 대주교.”
“신도들이 기뻐하겠군요. 허허.”
기사들이 길을 만들고 그 안으로 천천히 마차가 진입하기 시작.
거대한 성문이 열리고 그 안으로 캐슬락의 내부가 시야에 비쳤다. 제국민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긴 하지만 확실히 자유민들이 터를 많이 잡은 곳인 만큼 검은색 머리를 한 동양인들이 시야에 비친다.
“이렇게 갑자기 캐슬락을 찾아 주셔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이기영 님.”
“저도 이렇게 빨리 재회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영애. 그렇지 않아? 하얀아?”
“네. 오빠!”
“아…….”
조금씩 자신을 챙기는 모습을 보이자 그제야 기분이 좋은지 싱글거리는 정하얀.
반대로 마를린은 조금 풀이 죽는다.
김현성 같은 경우에는 유다 대주교에게 붙잡혀서 대화하는 중.
캐슬락이 신기한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파티원들도 눈에 띄었다.
그렇지만 우리 파티원들보다 더 신기해하는 것은 캐슬락에 자리 잡은 플레이어.
아까의 조혜진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괜스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푸흐흣.”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뻔할 뻔자.
지금 들어오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기에 캐슬락의 기사들을 대동한 채 신전의 대주교와 함께 들어오는지 궁금해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저들에게도 진풍경처럼 느껴질 터. 귀빈이라도 방문한 줄 알고 있는지 어떻게든 이쪽을 확인하려고 하는 모습이 안쓰럽다.
‘쯧.’
자신들과 같은 자유민이라는 걸 확인했는지 모두가 놀란 얼굴들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영주성으로 향하면 향할 수록 한 사람에게 시선이 몰리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혜진.’
저들의 입장에서는 캐슬락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녀가 갑작스레 금의환향한 셈이다.
조혜진은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주위를 둘러보지 않았지만 누가 봐도 캐슬락의 자유민들을 의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역시나 별로 좋지 않게 캐슬락을 나왔던 게 맞다.
혹시나 자신을 아는 얼굴이 나오지는 않을까 부담스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옳은 일을 한 그녀가 어째서 죄인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애써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표정이 재미있다.
“마를린 영애.”
“네, 이기영 님.”
“조혜진 씨 기억하시지요? 그 저번에 제가 말씀드린….”
“아아아! 그렇군요. 아버님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혜진 님.”
“네….”
“몇 년 전에는 제가 아카데미에 있었기 때문에 한 번도 뵙지 못 했네요. 캐슬락에서 활동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주 인상적인 활약을 하셨다고….”
“그… 인상적이지는 않습니다. 그저 다른 자유민이 하는 것처럼….”
“조혜진 님이나 이기영 님 같은 자유민 덕분에 저희 신성 제국이 더 발전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제국민을 대표해서 감사의 인사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랍니다.”
캐슬락 영지에 금지옥엽인 마를린이 조혜진에게 딱 달라붙어 대화를 나누자 다시 한번 시선이 집중되는 것 같은 느낌.
일이 점점 더 재미있어 진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사람이 몇몇 있다.
혀를 차거나 인상을 구기는 족속. 가슴에 달려 있는 길드 휘장은 저들이 어떤 길드인지 말해주고 있다.
‘작은바위.’
아마 확실하리라.
캐슬락에 자리 잡은 길드 중에서는 그나마 대형 길드라고 할 수 있는 길드.
그리고.
‘우리 조혜진 양이 고발한 사람들’
지나가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시선이 마주친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내가 저들을 의식해 한 번씩 보고 있는 것뿐이지만 저들도 그걸 알고 있는지 영주성으로 향하는 우리를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해줘야 되나.’
대화를 한 번쯤 나누어 보고 싶은 것은 사실.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고 정확히 어떤 사건이 터졌고 또 저들은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가 무척 궁금해졌다.
“마를린 영애.”
“네? 이기영 님.”
“조금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캐슬락은 이곳에 체류한 자유민들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까?”
“아마 조금은 우호적일 거라고 생각해요. 영주성에 초청해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저희 캐슬락 입장에서도 이곳에 체류한 자유민들의 도움을 받고 있으니까요. 몬스터의 개체 수를 줄여주시는 것도 그렇고 저희 기사들이 할 일을 분담해 주고 계시니 고마울 따름이랍니다.”
“그렇군요.”
“자유 도시 린델만큼은 아니지만 저희 캐슬락에서도 여러 가지로 자유민들의 편의를 봐주고 있고 여러 가지 정책을 시행하고 있어요. 영주민뿐만이 아니라 자유민 분들의 복지로 신경 쓰고 있다고 하는 게 맞겠네요.”
“아아아아아.”
“혹시 더 궁금하신 게 있으신가요?”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영애. 갑작스럽지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있습니다.”
“네?”
“사실 캐슬락으로 온 이유는 이곳에 있는 몇몇 길드와 계약을 맺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저희 길드에서 유통하고 있는 포션을 캐슬락에도 판매할 수 있다면 서로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렇군요.”
“혹시나 괜찮으시면 다리를 놔주셨으면 합니다.”
“네! 물론이죠! 이기영 님의 부탁인데….”
‘계약 건은 이걸로 됐고….’
남은 건 천천히 저들을 만나기만 하면 된다는 거다.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시나리오를 짜고 있었을 때 앞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를린 영애.”
처음 들어본 남자 놈의 목소리. 조금 키가 커 보이는 녀석.
‘뭐야 이놈은 갑자기….’
녀석이 누구인지는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조혜진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걸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