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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53화 (152/1,590)

# 153

회귀자 사용설명서 153화

마를린 영애(3)

‘뭐야, 이놈은. 갑자기….’

조혜진이 몸담고 있었던 작은바위의 길드 마스터.

순간적으로 마음의 눈을 발동시키니 녀석의 능력치와 특성이 눈에 들어왔다.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은 것 같은 느낌. 기억해 둘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물론 내가 이런 말을 할 입장은 아니지만 그동안 대단한 사람들을 많이 봐왔던 나에게 녀석은 그저 그런 놈으로 비춰졌다는 거다.

성향은….

‘열정적인 야망가.’

고유기벽은….

‘양면이 다른 나뭇잎.’

왠지 모르게 졸렬하게 들려오는 기벽. 별다른 보너스 효과도 없는 종류의 능력이다. 대충 녀석이 어떤 인간인지가 머릿속에서 그려지기 시작했다.

‘아하….’

조혜진과 얽힌 이야기도 어느 정도 감이 올 것 같았다. 지금 이런 식으로 이쪽에 말을 걸어오는 것만 봐도 답이 나온다. 대놓고 말하자면 어떻게든 얽히고 싶어 하는 듯한 느낌.

정확히 원하는 바가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쪽에 자신의 존재감을 어필하든지, 아니면 이쪽을 견제하든지 그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행렬 속에서 갑작스레 마를린을 불러 세우는 게 이쪽에게 실례라는 걸 알지는 못하는 모양.

어쩌면 계획된 일일수도 있다. 영역표시라든가 텃세를 부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니까.

겨우 저런 것 가지고 뭐라고 할 정도의 꼰대는 아니지만 기분이 나쁘기는 하다.

“아, 송정욱 님.”

마를린이 입을 열었지만 별로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그저 조용히 정하얀의 어깨를 감싸며 녀석을 지나치는 게 전부.

당연히 마를린은 녀석을 무시한 채로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녀 입장에서는 이쪽과 대화를 나누는 게 더 중요할 테니까.

“누구였습니까?”

“아. 그 작은바위 길드의 마스터 송정욱 님이라고….”

살짝 뒤를 돌아보니 영 좋지 않은 곳을 맞은 것처럼 표정이 일그러진 녀석이 시야에 비쳤다.

면전에서 개무시를 당했으니 저런 표정을 보이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물론 이쪽은 아무 상관도 없는 이야기다.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온 것도 아니었고 마를린 영애가 이쪽으로 혼자 뛰어온 것에 불과하다.

나는 그냥 정하얀과 사이좋게 갈 길을 가고 있었으니 그걸로 끝. 지금 일어난 민망한 상황은 내 잘못이 아니다.

“아아아. 작은바위 말이군요.”

“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캐슬락에서 규모가 제법 크다고 들었습니다. 모험 실적 역시 괜찮고요. 희귀 등급의 던전이 세 개, 영웅 등급의 던전을 하나 정도 공략했었다고 했었나요?”

“아… 저, 저는 자세히는….”

“괜찮습니다, 마를린 영애. 이거 귀인을 지나칠 뻔했군요. 실례가 안 된다면 좀 불러주시겠습니까?”

“네, 물론이죠. 로드릭 경? 송정욱 님 좀 이리 불러 주시겠어요?”

“네, 영애.”

딱 봐도 능력치가 나쁘지 않은 기사가 후다닥 뛰어갔다.

잠깐 동안 무안을 느꼈던 송정욱이라는 놈의 안색이 점점 심각해지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자존심이 상하기는 상한 모양.

그야 뉘 집 개도 아니고 ‘여기 갔다 저기 갔다’라고 말하는 데 기분이 좋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지 않을 수도 없다.

어디까지나 녀석을 이쪽으로 부른 건 마를린 영애였으니까.

결국에는 입술을 조금 깨문 채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녀석이 시야에 비쳤다.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송정욱 님. 정신이 없었던 터라.”

“아니요. 괜찮습니다, 영애.”

“다름이 아니라 이쪽은 린델에서 오신 파란의 부길드 마스터 이기영 님이라고 합니다. 꼭 한 번 송정욱 님과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셔서….”

“그렇군요.”

내 쪽을 슬그머니 살펴보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네가 그럼 그렇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은 가관.

이쪽이 자신을 부른 것이 뭔가 특별한 뜻이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슬쩍 손을 내밀며 입을 여는 송정욱이 시야에 비쳤다.

“반갑네. 작은바위의 길드 마스터 송정욱이라고 하네.”

‘하….’

“그래. 파란의 길드 마스터는 어디계시나.”

‘이 새끼가….’

“언제 한 번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려고 했었는데 마침 잘됐군.”

‘어디다 대고 반말이야?’

“그리고… 혜진이는 오랜만이구나. 파란에 들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아. 오랜만입니다, 송정욱 님.”

‘무시해?’

어의가 상실하다 못해 대역죄를 받아 사약을 마시고 날아가 버릴 지경.

이해는 간다.

나는 길드 마스터가 아닌 부길드 마스터의 입장이었고 송정욱 저 양반은 캐슬락을 대표하는 길드를 운영하고 있었으니까.

굳이 직급으로 분류하자면 놈이 나보다 위에 있다는 거다. 나이도 그렇고 이곳에 들어온 년차도 있으니까.

평소대로 아주 자연스럽게 하대가 나왔을 것이다.

‘내가 명예 주교가 된 걸 아직도 모르는 인간도 있나?’

캐슬락에 있는 자유민들에게는 아직 소식이 들어가지 않은 모양.

언제 한 번 신문에 광고라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영업차 온 것이 맞지만 당연히 굽히고 들어갈 생각은 없다. 영업사원이 꼭 을이라는 법은 없으니까.

물론 적당히 기분을 맞춰줄 생각이 없는 건 아니지만 녀석은 차희라 급의 강자도, 조혜진 정도의 잠재능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굳이 내가 먼저 손바닥을 비벼야 하는 입장이 아니라는 거다. 비벼야 한다면 도리어 저쪽에 해당되는 일이다.

이곳에서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것도 바보 같은 일. 딱히 뭐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이건 무슨 상황인지에 대해 물어보듯 마를린 영애를 바라보니 그녀가 화들짝 놀라 입을 여는 것이 보였다.

“예, 예의를 지켜 주시지요.”

“영애?”

“이기영 님은 캐슬락 영지의 손님이십니다. 무례하군요.”

“마, 마를린… 영애.”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실망입니다, 송정욱 님.”

“그게….”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이기영 님.”

“큼. 뭐, 괜찮습니다. 사과할 사람은 영애가 아니기도 하고…. 그, 아까 제가 한 말은 잊어주시겠습니까?”

“네?”

“포션 관련해서 드린 말씀 말입니다. 본래는 조금 천천히 즐기다 가려고 했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용무만 마친 이후에 빠르게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아!”

마를린 영애의 표정이 구겨졌고 정하얀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슬그머니 정하얀을 이쪽으로 더 끌어당기자 과시하듯 이쪽에 달라붙어 오는 정하얀.

‘이런 표정은 조금 안 어울리네.’

지나치게 기뻐하는 것 이전에 뭔가 콧대가 올라간 것 같은 표정. 자신이 가장 사랑받고 있다는 걸 모두에게 알리고 싶어 하는 것이다.

나름대로 치명적인 표정을 지어 보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내 눈에는 그저 귀엽게만 보인다.

영애의 표정이 창백해진 것은 당연지사.

정하얀 때문이 아니다. 아마도 내가 방금 말한 대사의 속뜻을 읽었을 것이다.

‘영업이고 포션 계약이고 뭐고 다 필요 없으니까 그냥 대충 볼일만 본 다음에 돌아갈래. 캐슬락 여행하는 걸 얼마나 기대했었는데… 기대 이하야. 무례한 사람들 때문에 기분 다운됐어. 이런 곳인 줄 알았으면 안 왔을 거야.’

아마 온갖 부정적인 대사들이 머릿속에 박히고 있을 것이다.

“이기영 님, 그게….”

“자. 이만 돌아가도록 합시다, 영애.”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뻔할 뻔자.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송정욱이라는 녀석을 향해 입을 여는 영애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정식으로 사과해 주세요.”

“네?”

“방금 이기영 님께 보인 무례를 정식으로 사과해 주세요, 송정욱 님.”

“그… 무례라뇨.”

‘이렇게까지 과민반응할 일은 아니긴 하지.’

“제가 뭘 말하고 계시는 건지는 송정욱 님께서 더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아까 전에 이기영 님께 보인 무례를 정식으로 사과해 주세요. 만약 그렇지 않으면 다시는 얼굴을 뵙지 않을 겁니다.”

뭔가 억울하다는 표정.

그렇지만 유다 대주교가 없는 게 다행이다. 김현성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저 멀리 나아가고 있지 않았다면 아마 놈은 신전의 신도들에게 둘러싸였으리라.

“괜찮습니다, 마를린 영애.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뇨. 이기영 님은 저희 캐슬락의 손님이십니다.”

‘손님 자격으로 오지는 않았지만….’

“이기영 님에게 무례를 보인 것은 곧 저희 가문에게 무례를 보인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버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꼭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애.”

감동받았다는 표정 정도는 보내주는 게 당연할 것이다.

어찌됐건 마를린 영애가 나를 위해 무리해 주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작은바위 정도의 길드와 척을 지는 것은 사실 캐슬락에서도 반가운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저렇게 계속해서 압박하고 있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철없는 마를린 영애의 생떼인 셈.

물론 굳이 갑을 관계를 정리하자면 영애 쪽이 갑이기는 하지만….

‘자존심 상할 거라 이 말이지.’

송정욱의 입장에서는 마른하늘의 날벼락일 것이다.

“송정욱 님. 정말!”

“마를린 영애, 괜찮습니다.”

욕하는 시어머니와 말리는 시누이.

내가 봐도 그림이 무척 얄밉다. 상황 자체도 무척이나 나쁜 상황. 길거리 한복판에서 자유민들과 제국민들이 모두를 바라보고 있다.

자유민들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송정욱이 나한테 고개를 숙여야 되는 상황이라는 거다.

‘잘됐네.’

이참에 이쪽과 저쪽의 갑을 관계를 명확히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 느낌.

문제는 녀석이 나에게 고개를 숙이는가.

‘자존심이 강해 보이니까.’

어물쩍 넘어가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였어도 녀석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옛날 길드원인 우리 조혜진 양도 지켜보고 있고 현 길드원 몇몇도 보인다.

제국민들 물론, 무소속의 자유민들도 갑작스러운 사건에 집중하고 있다. 놀리는 건 여기까지라고 생각했을 때 눈에 보인 것은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송정욱의 모습.

‘히야….’

내 입장에서는 얻을 게 없어 보였던 사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숙인 녀석을 보니 어째서 녀석이 내게 고개를 숙였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를린 영애 때문이구나….’

그녀한테 조금 더 잘 보이고 싶다는 것 빼고는 다른 답이 나오지 않는다.

“무례를 용서해 주시지요, 이기영 부길드 마스터.”

“아아. 괜찮습니다, 송정욱 님.”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하하하. 이거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군요.”

“…….”

“마를린 영애, 이제 괜찮습니다. 실수 때문에 일어난 오해니까요. 용서해 드리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

대로변에서 파란의 부 길드 마스터인 내가 캐슬락의 작은바위 길드의 길드 마스터를 용서해 주는 그림은 아름답다.

저 길드뿐만이 아니다. 아마 지금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대부분의 길드와 클랜, 개인들이 이 상황을 보고 느끼는 게 있을 것이다.

‘저 새끼는 건드리면 안 되는구나.’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물론 저것 말고도 얻은 것은 있다.

“안 그래도 작은바위 길드에 한 번 찾아가려고 했었습니다, 송정욱 님. 조만간 영주성에 들려서 저를 찾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제가 찾아가도록 하죠.”

“…….”

“하하하하. 이거 오늘도 즐거운 인연을 만들었군요. 뭐, 더 하실 말씀이 없으니 이만 먼저 가보겠습니다. 마를린 영애는 뭐 할 말이 있는 거 아닙니까?”

“아닙니다, 이기영 님. 그, 중요한 일은 아닐 것 같아서…. 송정욱 님, 그럼 다음에 뵙도록….”

“하얀아? 혜진 씨도 빨리 가시죠.”

“네, 오빠.”

“네, 부길드 마스터.”

“그리고… 음. 혜진 씨?”

“네.”

“캐슬락에 있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고개 숙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

“그리고 다른 길드의 길드 마스터에게 굳이 깍듯이 대할 필요도 없고요. 혜진 씨는 이제 파란 소속이고 파란의 얼굴입니다. 타 길드나 클랜에 고개 숙인다는 건 곧 파란이 고개를 숙인다는 거라는 걸 항상 머릿속에 떠올려 주세요.”

“아…….”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겠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은 그거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조혜진을 어떻게 이쪽에 끌어드릴지에 대한 것. 마를린 영애를 부르려고 하지만 끝내 붙잡지 못하는 송모씨를 보자 좋은 아이디어들이 여러 가지 떠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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